75. 닦음의 길 15

널리 알려진 것처럼 보리달마(菩提達磨)는 선불교를 중국에 전한 인물이다. 선(禪)이 전래되면서 적지 않은 오해들이 생겼는데, 그 중에서 가장 큰 것은 선불교가 언어, 문자를 부정한다는 생각이다. 이러한 오해는 문자를 세우지 않는다는 ‘불립문자(不立文字)’의 전통에서 기인한 것 같다. 선에서는 문자가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곧바로 가리켜서(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것을 강조한다. 그러나 선에서 부정하는 것은 언어, 문자가 아니라 거기에 집착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시선이 문자에 머무는 한 결코 진리라는 달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교학(敎學)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標月之指), 즉 방편이다. 붓다의 말씀을 담은 수많은 방편을 통해 달을 볼 수 있다면 이는 부정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으로 권장해야 할 일이다.

이입사행(二入四行)은 선이 교학을 부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달마의 수행체계다. 이것은 진리에 들어가는 두 가지 길과 네 가지 수행을 의미한다. 먼저 두 가지 길이란 이치를 통해 불법의 대의를 깨치는 이입(理入)과 수행에 의지해서 진리에 들어가는 행입(行入)을 가리킨다. 달마에 의하면 이입(理入)은 경전을 통해 모든 중생이 부처와 똑같은 성품을 지니고 있음을 굳게 믿는 것이다. 다만 번뇌, 망상이라는 먹구름이 붓다의 성품을 가리고 있으므로 벽관(壁觀) 수행을 통해 이를 걷어내야 한다. 그러면 나와 너, 범부와 성인이 모두 하나라는 것을 깨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깨침은 자교오종(藉敎悟宗), 즉 교학에 의지해서 가능하다는 것이 달마의 생각이다.

그러나 이입만으로 깨침에 이를 수는 없다. 여기에는 반드시 수행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진리에 들어가는 두 번째 길인 행입(行入)이다. 달마는 네 가지 수행(四行)을 제시하고 있는데, 첫 번째가 보원행(報怨行)이다. 이는 상대에 대한 원망이나 증오의 마음을 내려놓는 수행이다. 누군가 자신을 힘들게 하면 대개 미워하고 원망하는 마음을 갖게 되는데, 그러한 마음을 텅 비우는 일이다. 지금의 상황은 과거 자신이 행한 업보를 받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미움의 감정을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수행자의 큰 적인 미움과 원망을 지혜롭게 대치하는 공부라고 할 수 있다.

두 번째는 수연행(隨緣行), 즉 인연 따라 살아가는 일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인연에 의해서 일어나고(因緣生) 인연이 다하면 소멸하는(因緣滅) 다이내믹한 과정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존재의 실상을 잘 살펴서 순간순간의 상황에 일희일비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뜨거운 여름과의 인연도 소멸해야 아름다운 가을 단풍과 만날 수 있고, 가을과도 이별해야 눈 내리는 하얀 겨울과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장자〉의 ‘인연 따라 자신의 삶을 즐기라(隨緣樂命).’는 가르침과 통한다. 수연행은 상황에 먹히지 않고 자신의 마음을 지혜롭게 다스리는 수행이다.

세 번째는 무소구행(無所求行), 즉 구하는 바 없이 실천하라는 것이다. 이것은 곧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말라는 뜻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공(空)하며, 인연 따라 생멸하는 과정에 있기 때문이다. 무소구행은 이러한 이치를 살펴서 세속적인 욕망과 자신에 대한 집착을 다스리는 수행이다.

마지막 네 번째는 칭법행(稱法行)으로 이것은 모든 것을 진리에 맞게 행동하는 것이다. 이것은 나와 너, 중생과 부처가 본래 ‘하나’임을 밝게 깨쳐서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하는 이타행(利他行)을 실천하는 일이다. 여기에도 모든 것은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는 연기의 진리가 작동하고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달마는 언어, 문자로 이루어진 경전을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깨침의 길을 가는데 중요한 안내서로 인식하였다. 그는 특히 〈능가경(楞伽經)〉을 중시했다고 전해진다. 다만 교학에서 그치고 실천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깨침에 이를 수 없기 때문에 벽관 수행을 강조한 것이다. 벽(壁)은 바람을 막아주는 기능을 한다. 달마는 번뇌, 망상이라는 바람을 막고 우리 모두가 부처 되는 진리의 길을 보여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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