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儒·道 아우르며 불교 보호하다

송대 대표하는 재가거사 장상영
〈유마경〉 탐독하고 불교에 매료
승려들 타락으로 비판 높아지자
불·유·도 합일한 〈호법론〉 펴내

송대 사대부 장상영이 쓴 〈호법론〉의 표지와 첫 페이지. 〈유마경〉을 읽은 후 불교에 매료된 장상영은 불교를 옹호하는 〈호법론〉을 펴내며 송대를 대표하는 재가불자가 된다.

중국이나 우리나라는 대승불교 국가로서 시대를 막론하고 재가자 활동이 활발하다. 당나라 때도 재가 선자가 있었지만 송대로 들어서는 재가 수행자들이 더 많아졌다. 비슷한 시대인 고려 시대에도 청평거사 이자현(1061~1125)·백운거사 이규보(1168~1241)·이승휴(1224~1300) 등이 있었다. 북송대에는 임제종 황룡파에 소동파·황산곡·장무진 등 재가자가 많았는데, 점차 양기파로 옮겨졌다. 특히 간화선의 제창자 대혜 종고에 의해 배출된 사대부들은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다. 여기서는 대혜의 재가 제자들과 송대의 대표 거사인 장상영에 대해서 보기로 하자. 

무진거사 장상영의 행적 
무진거사(無盡居士) 장상영(張商英, 1043~ 1121)에 대해 기록마다 다른데, 팽제청의 〈거사전〉에 의하면 다음과 같이 전한다. 

장상영은 과거 급제 후, 통주 주부를 임명받았다. 곧 서적과 관련된 일이다. 하루는 사찰을 방문해 경전의 방대한 대장경 목록을 보며, ‘나의 공자 성인의 책들이 오랑캐 책보다 못하구나’라고 자신도 모르게 탄식하였다. 그날 집으로 돌아와 낮에 보았던 대장경의 정교한 목록을 생각하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때 부인 상 씨가 ‘왜 잠을 이루지 못하느냐?’고 묻자, 그는 낮에 있었던 일을 설명하며, 이런 말을 했다  

“아무래도 무불론(無佛論)을 지어야겠소.”
“아니, 당신이 이미 부처가 없다고 해놓고, 무슨 논이 필요합니까?”

장상영은 부인의 말을 그냥 넘겼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그가 친구 집에 방문했다가 책상 위에 놓인 〈유마경〉을 읽게 되었다. 그는 ‘유마거사의 병은 지대(地大)로부터 온 것이 아니고, 또한 지대를 여읜 것도 아니다(此病非地大 亦不離地大)’는 구절에 탄식하고, 경전을 빌려 집으로 돌아왔다. 부인 상씨가 이를 보고 또 말했다. 

“이 〈유마경〉을 숙독한 후에 무불론을 써보시지요.”

장상영은 이렇게 인연되어 돈독한 불자가 되었고, 훗날 무불론이 아닌 〈호법론(護法論)〉을 저술하였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뒤에서 자세히 서술한다. 〈인천보감〉에 그는 “불교에 귀의해 불학을 공부한 연후에 비로소 유학을 알게 되었다”라는 내용이 전한다. 장상영의 학문적 깊이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장상영은 사천성 신진 사람으로 자는 천각(天覺), 호는 무진거사(無盡居士)다. 1066년 23세에 진사가 되었는데 왕안석의 추천으로 중앙관직에 올랐고, 1072년 29세에 감찰어사에 임명되었다. 

거사는 북송대에 대 선지식인 동림상총(1025~1091)·회당조심(1025~1100)·대혜종고(1089~1163) 등과 교류했고, 진정극문(1025~1102)에게서 깨달음을 얻었다. 장상영은 바로 원오 극근과 대혜의 사제 인연을 매듭지어준 분이기도 하다. 

〈호법론〉의 불교사적 의의 
‘호법’, 법을 보호하고, 불교를 선양하는 내용에 있어서는 두 가지 차원이다. 선사가 자체적으로 공부가 되어 유불을 일치시키는 경우인데 운문종은 ‘선+유교’의 일치이며, 황룡파는 ‘선+도교’적인 측면이다. 다음은 국가에서 불교를 핍박하는 데에 반발해 유불도 삼교를 회통하는 경우이다. 역사적으로 대부분 후자에 속한다. 

장상영 이전에도 불일계숭(1007~1072)은 한유(768~824)의 배불에 항거해 〈보교편(輔敎扁)〉을 지었다. 조선시대 함허득통은 〈현정론〉, 청허휴정은 〈삼가귀감〉을 통해 유불도 일치 및 배불에 대응하였다. 그렇다면 장상영의 〈호법론〉은 어느 면을 띠고 있는가? 전후자 모두를 아우르고 있다고 본다.  

송나라가 국제적으로 위기에 처한 데다 유교를 국교로 했지만, 사찰은 점차 비대해지는 면이 있었다. 상업이 발달하고, 화폐경제로 전환되면서 사찰에 재산축재를 하는 이들이 있었다. 이같은 상화에서 몇몇 승려들이 타락하였고, 도첩 판매까지 늘었다. 물론 당나라 말기부터 불교계가 비판을 받았지만 송대로 들어 유교를 숭상한 탓인지 사대부들에 의해 불교가 비판받는 일이 빈번했다. 

이런 시대적인 배경을 바탕으로 장상영이 불교를 옹호하기 위해 유교·도교를 아우르는 논을 저술했는데, 이것이 〈호법론〉이다. 〈호법론〉에서 장상영은 ‘유가에도 다 군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소인배가 있듯이 불교에도 범성(凡聖)이 함께 있다’고 하며 불교를 옹호했다. 〈호법론〉은 대장경에 입장(入藏)되었고, 유·불·도 삼교 합일을 토대로 불교를 변호한 논으로 오늘날까지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말기, 환암혼수(1320~1392)가 승준과 만회에게 명하여 청룡사본(충북 충주)으로 〈호법론〉을 간행하였다.

무구거사 장구성의 생애 
대혜종고가 일으킨 간화선은 승려 제자보다 재가 제자를 위한 법문이 더 많다. 대혜 문하에서 승려는 84인이 법을 받았으며, 재가자는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대혜는 어록에서 “크게 한번 깨달으면 유학이 곧 불교요, 불교가 곧 유학이다. 승(僧)이 곧 속(俗)이요 속이 승이며, 범(凡)이 곧 성(聖)이요, 성이 곧 범이다”라고 하면서 삶과 수행의 길이 곧 하나임을 밝힌 데서도 재가자에 대한 태도를 알 수 있다. 선사의 어록 30권 중에도 사대부들과의 법문과 편지가 많이 차지한다. 여럿 제자 가운데, 장구성을 살펴보자.  

장구성(張九成, 1092~1159)은 절강성 항주 출신으로 무구거사(無垢居士)이다. 주희는 장구성에 대해 칭찬을 하면서도 ‘선만 하여 뼈 속 깊이 대혜의 영향을 받았다’라며 그를 배척하였다. 장구성은 ‘선학이 정묘해 유학 사상과 일치되기 때문에 당연히 국가에 유익하다’는 사고를 갖고 있었다. 
또한 장구성은 “지금의 학자는 헛되이 자신만을 지키고 있다. 물속이나 불속에 들어갈 정도로 실천적인 것을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 산속에 들어가 가만히 수행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宋元學案〉”라고 하였다. 

이런 사상을 갖고 있기 때문에 장구성이 대혜를 따르며, 참선하였을 것으로 추론된다. 장구성은 1141년 진회(秦檜)와 대립했는데, 진회는 ‘장구성을 수령으로 한 대혜종고 문하의 2000여 명은 해산하라’고 하며 배척하면서 유배를 종용하였다. 바로 대혜가 장구성과 가깝다는 이유로 대혜도 유배된 것이다. 장구성은 1156년 진회가 죽자, 복권되어 다시 정치계로 돌아왔다.   

무진거사의 수행 구도  
장구성이 어떻게 불교 공부를 하였는지를 보자. 〈인천보감〉에 시랑(侍郞) 장구성 거사에 대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장구성이 영은사의 오명悟明 선사를 뵙고 종지를 물어보니 오명선사가 이렇게 답했다. “그대는 지금 한창 열심히 공부해서 이름을 날릴 때인데, 어찌 생사 문제를 참구하고 있는가?”  

장구성이 말했다. “옛 어른(先儒)이 말하기를, 아침에 도를 깨달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 하였습니다. 그러나 세간과 출세간의 법이 처음부터 다르지 않아 옛날 훌륭한 신하 중에도 선문(禪門)에서 도를 얻은 사람이 부지기수이거늘 유교와 불교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불교계의 큰스님인 선사께서 어찌 말로 저를 막으려 하십니까?” 

오명선사는 그 정성이 갸륵해서 그를 받아주며 말했다. “이 일은 생각 생각에 놓아서는 않된다. 시절인연이 무르익어 때가 되면 저절로 깨치게 되어 있다. 조주에게 한 승려가 묻기를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이 무엇입니까?’라고 하자, 조주가 ‘뜰앞의 잣나무니라’라고 답했다. 이 화두를 들어 보아라.” 

그러나 장구성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 깨닫지 못했다. 그러다 우연히 호문정공(胡文定公:胡安國)을 뵙고 마음 쓰는 법에 대해 자세히 물었다. 호안국은 ‘논어·맹자의 인의(仁義)를 유추해보면, 그 속에 요점이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공은 그 말을 염두에 두었다. 어느 날, 밤에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면서 ‘측은지심은 인이 비롯되는 곳이다(惻隱之心仁之端)’라는 구절을 깊이 궁구했다. 그러다 장구성은 개구리 울음소리를 듣고, 홀연히 뜰 앞 잣나무 화두가 들리며(擧) 갑자기 깨달은 바가 있어 게송을 지었다. 

“봄 하늘 달밤에 한마디 개구리 소리가 
허공을 때려 깨서 한 집을 만들도다. 
바로 이런 때를 뉘라서 알겠는가! 
산꼭대기 곤한 다리에 현묘한 도리 있도다.”

장구성은 대혜를 한번 뵙기를 바라던 터에 대혜로부터 내왕하라는 전갈을 받았다. 그는 선사를 방문해 여러 벗들과 함께 날씨에 관한 이야기만 하고 헤어졌다. 그런데 다음 날 대혜가 제자들에게 ‘장시랑이 깨달음이 있더라’는 말을 하였다. 

얼마 후 장구성이 대혜를 찾아와 〈대학(大學)〉에 나오는 ‘격물의 뜻(格物致知)’를 물으니, 대혜가 답했다.

“공은 격물(格物)만 알았지, 물격(物格)은 모르는군.” 
“거기에도 어떤 방편이 있나요?” 
“이런 이야기가 있지 않습니까? 안록산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그 사람은 난이 일어나기 전, 낭주 태수로 있을 때 초상화를 그려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당 현종이 촉 땅에 행차했을 때, 그 그림을 보고 격노해 신하에게 그의 목을 칼로 치라고 하였다, 마침 안록산은 섬서성에 있었는데 갑자기 목이 땅에 떨어졌다는 이야기 말입니다.” 

모두들 어리둥절했지만, 장구성만 이 말을 듣고 홀연히 깨닫고 게송을 읊었다. 

자소(子韶)는 격물(格物)이요. 
묘희(妙喜)는 물격(物格)이니 
한 관(貫)이 얼마나 되는가? 
오백돈이 둘이로다.  

장구성은 참 자유를 얻었고, 마음이 텅 비어 의혹이 없어졌다. 이후 장구성은 경산사에 머물고 있는 대혜를 자주 찾아갔다. 1년 후인 1141년에 장구성과 대혜가 유배를 갔다. 〈서장〉에 보면, 대혜와 장구성이 오고 간 편지가 있다. 장구성은 남안(南安)에서 유배생활을 보내는 14년 동안 불교 경전과 유가 서적들을 공부하였다. 혹 지나가는 선객이 있으면 반드시 경계를 확인해 보고 선열(禪悅)의 즐거움을 맛보았으나, 한 번도 득실(得失)을 마음에 두지 않았다. 장구성을 아는 지인들은 그의 풍모를 높이 평가하며 존경하였다. 장구성과 대혜는 유배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1156년, 두 사람이 만나 오롯이 선리만을 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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