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조건’주는 것이 보살의 행이요 부처님 가르침이다

질문 한 철 목숨 걸고 공부해서 자유인이 돼 보자고 다짐했건만 천방지축 날뛰는 제 마음 하나 다스리기가 여간 쉽지가 않습니다. 주인공 자리에 관하면서 가고는 있지만 진전이 없는 것 같아 답답하기도 하고요. 이 날뛰는 몸과 마음을 잘 길들이고 싶은데 좀 구체적인 방법은 없을까요?

답변 옛날에는 자기를 다스리고 길들이기 위해서 소나 코끼리를 가지고 비유를 해서 방편을 썼는데, 나는 항상 여러분들한테 직결되게끔 방편을 썼습니다. 그 방편은 여러분들이 여러분들한테 “첫째, 자갈을 물어라. 둘째, 많은 식량을 욕심내지 마라. 그래서 아무거나 먹지 말라 이 소리죠. 셋째, 길을 올바로 가게 하기 위해서 채찍질을 해라.” 이겁니다.

자기를 다스리고 길들이기 위해서
첫째, 자갈을 물어라.
둘째, 많은 식량을 욕심내지 마라.
셋째, 채찍질을 해라.
몸과 마음을 길들이는 방법

“자갈을 물어라.” 하는 뜻은 여러분들이 여러분의 몸을 다스리고 길들이기 위해서 자갈을 물게 했던 것입니다. 그건 뭐냐 하면 “안으로 모든 걸 굴려 놔라.” 이게 자갈입니다. 왜냐하면 바깥으로 쓸데없는 말을 하고 그저 해 버릴 말을 하고 이러는 거를 금지시키기 위한 방편입니다. 안으로 굴려 놓지 않는다면 자기를 맛볼 수 없으니까요.

둘째는 “모든 것을 밥을 주지 마라.” 이런 뜻입니다. 그것은 “공식을 구하라, 안으로. 안으로 공식을 구하지 바깥으로 탐욕을 내지 마라.” 이런 뜻입니다. 한마디로 해서 이걸 말을 하지만 그 문제는 여러 가지로 아마 표현될 겁니다. 그래서 공식을 구하라. 이 공식을 구하는 데는 여러 가지로 탐욕이나 뭐, 취하는 욕망이나 이런 것을 다 버리고, 그런 게 생기면은 거기다 놓고 다 몰락 놔라,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공식을 구하라 이런 뜻이죠.

셋째는 예전엔 소로 비유를 했고 코끼리로 비유를 했었는데요, 우리 지금 현상세계에서 가만히 보십시오. 길을 올바로 들지 못해서 남의 밭에 농사지어 놓은 거를 짓다진다면 그 얼마나 타인이 손해가 나겠습니까? 그런고로 자기도 손해가 나는 일이죠, 모두가. 이해가 갑니까? 그래서 예전에는 방편을 쓰되 “몽둥이로 때려 줘라. 두들겨 패라.” 이랬습니다. 야생마처럼, 야생 소처럼 그렇게 날뛰는 거를 두들겨 패라 이랬습니다. 올바로 길을 가라 이런 뜻이죠. 그래서 나는 채찍이라고 이렇게 말을 했죠.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자신을 길들이고 자신을 리드해 나가고 자신을 모두 이끌어 가는 데는 자기가 자기를 채찍질을 해야 된다는 얘기죠.

비유할 때 말입니다, 옛날에 눈먼 거북이, 귀먹은 거북이가 쏜살같이 내리는 물속에서 고개를 들고선 좀 여유 있게 이렇게 구경을 하지 못한 채 항상 물속에서 허우적거린단 말입니다. 그런데 거북이가 생각하기를 ‘한 세상에 나와서 하늘 구경도 못 하고 이거는 항상 쏜살같이 내려가는 물을 휘젓고 빠져 가면서 허우적거리고 이렇게 산대서야 이거, 이거 살았다고 할 수 있겠나.’ 하고 거북이가 한탄을 했더랍니다. 그러니까 그 거북이도 수십 번을 진화돼서 거북이로 태어나다 보니까 그런 생각도 했겠죠. 그래서 고생 안 해 본 사람은 고생하는 사람의 마음을 모른다 이런 뜻도 되죠. 그렇게 고생을 하다 보니까 아, 좀 마음이 여유가 생기고 ‘죽어도 고만 살아도 고만. 이런 생명을 살아 뭘 하나. 하늘도 구경 못 하고 허우적거리고 물속에서 항상 이렇게 헤매고, 그러다 보면 남한테 잡아먹히기나 하고 이렇게 하는 생명이 살면 뭘 하나.’ 하는 생각을 하고선 그냥 그 쏜살같이 내려가는 물 속에서 그냥 튀어 올라왔단 말입니다. 튀어 올라오는 그 시각에 바로 뗏목이 떠내려가다가 탁 마주쳤단 말입니다.

우리가 지금 공부하는 데도 그런 격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허우적거리고 그렇게 거기다 굴려 놓고 그냥 또 거기다가 ‘너만이 할 수 있어.’, ‘감사해.’ 하고 두 가지로 항상 굴리다가 어느 때에는 뜬금없이 뗏목을 만난다. 이런 뜻은 뭐냐 하면 뜬금없이 자기 그 불성 기둥이 불쑥 솟는다 이런 뜻과 같아요. 우리가 지금 쏜살같이 내려가는 물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금 현재라고도 볼 수 있죠. 그런데 마음의 여유가 없으면 하늘을 어떻게 구경하겠습니까? 그래 어쩌다가 탁 그냥, ‘죽으면 죽고 살면 산다’ 하고 펄떡 나오는 반면에 그 뗏목이 아다리가 돼서 거기 올라서서 여유 있게 구경을 했더랍니다.

몰론 우리가 살아가는 데에 눈뜨고 귀 뜬 사람은 살기가 좀 여유가 있겠지마는 눈멀고 귀 먼 사람들은 살기가 여유가 없습니다. 눈먼 거북이나 똑같죠. 허우적거리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따 죽을지도 모르고 오늘 지금 살 거만 생각하고 욕심을 내고 건너지도 못할 걸 건너려고 앨 쓰고 그러는 거죠. 그래서 옛날에는 비유를 할 때에 그 소를, 두 번째 가선 “먹이지 마라. 굶겨라. 안으로 공식을 해서 자기가 스스로 배가 부르게 해야 된다.” 이렇게 했던 거죠. 우리가 생각해 보면 ‘사람이 한 치 앞도 못 본다’ 하는 것은 우리 정신계의 자기를 자기가 발전을 못 시키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래서 옛날에 코끼리를 길들이고 다스리고 하는 데는 뭔 일로 그렇게 하느냐 하니까, 이 세상에 둘도 없는 대왕을 올바로 모시기 위함이고, 둘째는 모든 중생들을, 일체 만물을 다 이익하게 하기 위해서 그 길을 들인다 이런 말을 했죠. 그런 거와 같이 자신이 자기를 길을 안 들이면 누가 길을 들이며, 자기 자신을 리드 안 하면 누가 리드하며, 자기 자신이 자기를 이익하게 하고 계발시키고 정신계의 후원이 돼서 모든 것이….

나는 그렇게 여러분들한테 얘길 했죠. 비가 안 온다 온다 이거를 알게 하는 게 아니라, 내가 죽는다 안 죽는다 그거를 알게 한 게 아니라, 죽는 거 사는 것을 떠나서 내가 자작, 자유스럽게 자재할 수 있는 것을 여러분들한테 얘기한 거죠. 병이 낫는다 말하고 안 낫는다 말하고를 떠나서, 병뿐이 아니라 일체 삶에 대한 요소입니다. 그것을 떠나서 내가 자유자재하는 것이 얼마나 좋습니까? 목마르면 물 먹고 잠자고 싶으면 잠자고 배고프면 밥 먹고…. 이게 얼마나 자유스럽습니까?

그런데 날아가는 새들도 자기 둥지가 떠내려갈 거를 알고서 미리 아주 철통같이 하는데 왜 사람은 자기가 떠내려갈 걸 모르고 사느냐는 얘기죠. 우리가 요거는 요거다 조거는 조거다, 이것은 옳고 이거는 그르다 이렇게 가르친다면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의 그 정말 불기둥의 위력을 모르실 겁니다, 아마. 우린 생명이 불이라고 그랬죠. 불로 인해서, 생명으로 인해서 신앙이 생긴 거라고요. 그래서 자기 자성을 완성하지 못하면 우리가 여유 있게 살 수가 없다. 우리가 지나가다가도 뭐가, 그런 걸 일부러 생각하는 게 아니라 이것 무뜩 생각이 나면은 ‘아, 이거….’ 그렇게 되게끔 돼 있거든요. 자동적으로 그렇게 되게끔 돼 있어요. 어디가 어떻게 됐든 지각이 일어나고 지혜가 생기고, 감각적으로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모든 걸 모면하고 가죠.

“자기가 자기를 자갈을 물려라.” 이랬다고 그래서, 자갈 아닌 자갈을 물렸다고 해서 그게 그냥 있는 게 아니라 자기가 자기를 자갈을 물려 놓고 스스로서 그 자갈은 없어져도, 자갈이 다 스스로 없어져도 그냥 자갈 낀 거와 같이 항상 하고 간단 말입니다.

전선으로 이렇게 불이 들어오고 있죠. 우리가 다른 걸 못 본다면 그걸 좀 보세요. 전선 줄이 말입니다, 줄이 불 들어오게 하는 거 아니죠. 줄 속에 선이 불을 들어오게 하죠. 그 전선 줄의 속에서 불이 들어오게 하지 겉에서 불 들어오게 하는 일은 없죠. 그런데 겉의 그 감아 놓은 전선 줄이 없어도 아니 되고 속의 알맹이가 없어도 아니 되죠. 그러니까 양면이 다 둘이 아니죠. 이게 없어도 아니 되고 이게 없어도 아니 되고.

그렇듯이 사람도 자기 주인공이 없어도 아니 되고 자기 육신이 없어도 아니 된다. 우리 육신은 전선 줄의 껍데기와 같은 거니까 안에 보존하고 있는 자기를 진짜로 믿어라. 그 보존하고 있는 전선 줄만이 불을 들어오게 할 수 있다. 불을 들어오게 할 수 있는 반면에 모두 밝게 살게 할 수 있다. 그뿐이 아니다. 모든 것을 발전시키고 영향력을 주고 모두, 일체 모든 거를 다 거기서 나오게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 전선의 그 알맹이를 믿지 못한다면 껍데기는 항상 바깥으로 컴컴하다고 불을 찾을 겁니다. 그리고 안의 그걸 모르니까 믿지 못하니까 선뜻 넘어서지 못하죠. 나는 예전에 이렇게 생각을 했거든요. ‘어차피 한 번 죽을 건데 뭐 죽고 사는 걸 그렇게 겁내랴.’ 그러고 아무 데라도 뛰어들어 봤던 거예요. 죽고 사는 걸 개의치 않고 말이에요. 여러분들도 그렇게 하셔야 된다는 겁니다.

생활 속에서 둘 아닌 도리를 실천하려면

질문 큰스님께서는 일체가 둘 아닌 도리를 늘 말씀하시는데 막연히 머리로는 이해를 하지만 생활에서 적용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일상생활 속에서 어떻게 둘 아닌 도리를 실천해 나가야 할는지요.

답변 이 세상에서 모든 사람들이 더불어 주고받고 삽니다. 더불어 살지 혼자 사는 사람 없어요. 옷도 더불어 같이 주고받고 입었고, 먹는 것도 주고받고 먹고, 모두가 일체가 다 그래요. 그런데 “어떻게 둘 아니게 실천을 하느냐. 어떻게 둘 아니라고 하느냐. 분명히 줬고 분명히 받았는데 어째 둘이 아니라고 하느냐.” 이러겠죠.

그런데 내가 전깃줄 얘기를 가끔 하죠. 전기, 전력이 들어왔을 때는 이게 불이 들어옵니다. 전력이 끊어졌다 이럴 때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습니다. 양면의 전깃줄을 갖다가 이렇게 이어야 전기가 들어옵니다. 그렇듯이 이것은 이거를 주고받을 때, 이걸 줄 때에, 이걸 받을 때 한순간은 이게 같이 이 마음이, 즉 말하자면 정신계가 둘 아니게 이어진단 얘깁니다. 이어지니깐 찰나에 주고받은 예가 없단 얘기죠. 찰나에 주고받은 예가 없다. 그리고 함이 없이 살고 있다. 삶이 없이 살고 있다.

왜냐하면, 방편으로 이렇게 표현을 할까요, 그전에 말했듯. 머슴으로 사는데 자기네 집이 아니죠. 자기네 집이 아니니까 자기네 맘대로 할 수가 없죠, 머슴은. 주인이 맘대로 하죠. 그래서 주인이 시키는 대로 했다 뿐이지 자기 마음대로 할 수가 없어요. 그렇듯이 이 주인이 이렇게 시키면 시키는 대로 내가 듣는데, 듣는 순간, 주는 순간, 말을 하는 순간에 하나가 돼 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주인 대신 내가 하는 거죠.

그러니깐 항상 그 한 찰나 찰나마다 이게 따로따로가 아니라 함이 없이 하게 된단 얘기죠. 그래서 자기 속에서 한생각이 나서 ‘이걸 해야겠다’ 이러고 하는데도 함이 없이 하게 되고요, 남이 주는 거를 받았다 하더라도 받은 사이가 없고 그 상대방도 준 사이가 없다는 얘기예요. 이거 이해가 가시는지 모르겠지만 이해가 모두 가셔야 될 겁니다, 아마.

모든 사람들이 살아나가는 데 이게 둘이 아니다라는 실천을 해야 할 텐데 둘이 아니라는 것만 말로 알고 있지 실천을 할 수가 없단 얘기죠. ‘항상 둘이 아니라고 그러시는데 이게 어째서 둘이 아닌가. 저쪽에서 나를 줬고 내가 저쪽에서 받았는데 어떻게 둘이 아닐까.’ 이렇게 생각하시죠. 근데 한순간 전깃줄에 닿는 거와 같단 얘기죠.

이 마음이라는 건 그렇게 빨라요, 속도가. 마음이라는 게 그렇게 속도가 빨라서 한생각에 그냥 그저 갖다 놓고 ‘고맙다, 고맙지 않다’ 하더라도 그렇고 하나로 그냥 이어지기 때문에 고맙단 말 없이 그냥 고맙게 되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자기 몸은 시자로 쓰고 자기 정신은 부처로 쓴다.” 이런 말이 있죠. 그래서 항상 스스로서 ‘둘 아니다’ 이렇게 나오는 것을 실천을 하시는 데에 그게 묘미가 있다.

실천을 하시는 데 그러면 어떻게 생각을 하고 실천을 하느냐. 생각을 하지 않아도 본래 잠재해 있다면 그냥 해도 그게 둘 아닌 줄 알게 되는 거죠. 그냥 모르고 우리가 그냥 주고받고 이렇게 해도 그게 둘 아니게 그냥 실천이 됐다는 얘기죠. 모두 내 몸뚱이 네 몸뚱이를 가지고 이렇게 실천이 되게끔, 둘 아니게 실천이 되게끔 된다면 일일이 생각을 안 해도 되는 것이다 이겁니다.

뿌리가 뭐, 떨어졌다가 붙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자기 뿌리는 자기 뿌리가 가지고 있죠. 자기가 있는 데에 자기 뿌리가 있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항상 상대방이 나에게 줘도 상대방이 그 사람도 자기 뿌리를 가지고 있어요. 나도 내 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근데 한순간에 그 뿌리와 뿌리가 한데 합쳐져 버려요. 합치게 돼 있어요.

이 텔레비전을 끄면 안 나오죠. 텔레비전을 켜면 나오죠. 그렇게 자유자재해라 이 소립니다. 우리가 그냥 이렇게 하게 되면 벌써 둘이 아니게끔 된다 이 소리죠.

죄의식으로 마음이 무겁습니다

질문 저는 마음공부를 한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사실은 제가 못된 짓을 많이 해서 저로 인해 많은 주변 사람들이 마음의 상처를 입었습니다. 마음공부를 하다 보니 저를 돌아보게 되고 또 그 죄의식 때문에 마음이 무겁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참회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답변 ‘전자에 많은 죄를 지었는데 이거 나는 어떡하나.’ 이러지 마세요. 죄가 있든 없든 다 불태워 버리는 작업입니다, 이게. 그래서 “악도 놓고 선도 놓고 긴 것도 놓고 짧은 것도 놓아라.” 하는 겁니다. 그럼 그 가운데서 솟아 나온다. 자기 참자기가 솟아 나온다. 그러면 그대로 여여하게 삶을 살 수 있다. 그럼으로써 모두가 여여하게 살 수 있게끔 이끌어 줄 수 있다.

무조건 주는 것이 보살의 행이요, 무조건 주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너는 잘했으니깐, 너는 못했으니깐’ 이 이유를 따지는 게 부처님의 법이 아닙니다. “너는 참 진실하게 잘하고 간다.” 이렇게 말들 하죠. 진실하게 잘하고 간다는 것도 집착하지 말아야죠. 평등하게 봐야 합니다. 왜냐? 진실하게 잘하고 간다 하면 못하는 게 있으니깐요.

그래서 ‘있다, 없다’가 없다 이겁니다. 있다, 없다가 없다. 법정에서나 있다, 없다를 논의하지 이 부처님 법에서는 그냥 둥글게 여여하다는 얘깁니다. 우리가 마음을 다스리고 씀씀이를 쓰는 데에 너그럽고 지혜롭게, 의리와 도리를 가지고, 진짜 사랑이라기보다도 자비…. 아니, 그건 모두가 이름이니까요. 이름 없는 그 진실을 그대로 행할 수 있다면…. 이런 과정이 없이는 진짜 부처가 될 수 없거든요.

나부터 죽어야 모두가 둘 아니게 할 수 있지 않습니까. 내가 살고, 내가 있다고 자부하고 하는 사람이 어떻게 보이지 않는 마음을 둘 아니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이 모든 게 공이다 하는 거. 이것은 항상 고정됨이 없다. 고정됨이 없으니까 함이 없이 하는 거다. 발자국을 떼어 놓아도 떼어 놓은 사이가 없다. 그것에 집착하지 마라. 악을 저질렀다고 해서 어차피 지은 거 그냥 놓아라. 그것은 껍데기가 한 게 아니라 모든 게 알맹이가 전자부터 한 거니까 알맹이가 해결을 해야지, 자기가 한 거 자기가 해결해야지 왜 집이, 시자라고 하는 이 집이 왜 상관을 합니까? 일일이 왜 상관을 해요? 울고 찌고 바깥으로 헤매고 말입니다.

그러니깐 고정됨이 없이 이렇게 간다고 하는 그 자체가 그냥 우리가 말을 해도 항상 이 사람하고 말을 했다가 그거 무심코 그냥, 여러분들 그렇게 놓고 가잖아요. 무심코 놓고 그냥 딴 사람하고 얘기하고, 또 이것 보고 저것 보고, 자유롭게 보고 자유롭게 말하고 자유롭게 만나고 자유롭게 하시잖아요. 그게 바로 함이 없이 하는 거 아닙니까? 그렇게 함이 없이 하는데도 이거는 있다고 우기거든요, 마음이. ‘내가 오늘 이렇게 이렇게, 내가 했는데….’ 이렇게 하거든요.

그런데 이게 고정된 게 하나도 없단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생활하시면서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누가 왔으면 “어서 와!” 하고 말을 해 놓고 그러곤 갔어요, 얘기하고. 갔으면 그뿐이지, 그냥 만나서 얘기했을 뿐이지, 거기에 뭐가 있습니까? 그것이 바람처럼 달아나갔어요. 또 왔어요. 또 만나고 또 보고 또 듣고, 남편 만나고 자식 만나고, 부인 만나고 자식 만나고 형제 만나고 이래도 그냥 만났을 뿐이지, 거기에 뭐가 붙습니까? 거기서 뒤에 또 생각이 나면 또 거기다 놓으시란 말입니다. 그 놓고 그냥 하면 함이 없이 되기 때문에 모든 게 죄나 이런 것도 다 없다 이겁니다. 선도 없고 악도 없는 그 가운데서 여여하게 그대로 삶을 정말 통탈하게 살 수 있다 이겁니다.

이 자동적인 컴퓨터 얘길 만날 했죠. 거기에 과거에 입력된 것이, 자꾸자꾸 현실에 자꾸 놓으니까 입력이 되는 대로 과거에 입력된 게 자꾸 없어진다. 그게 팔자 운명, 모두 자기가 지어 놓은 것들, 나쁜 거 이런 것이 모두 하나씩 하나씩 없어지는 겁니다. 그런데 이건 성급하게 과거에 지은 모든 업보가 한번 관하면 되는 줄 알아요. 물론 쉬운 것도 있죠. 금방 이렇게 저거 한 건 관하면 금방 그건 될 수도 있죠.

그런데 늦게 된다, 금방 된다, 안 된다 이런 것이 없어요. 그건 자기 할 탓이니까. 자기 지혜에 달려 있고 요량에 달려 있어요. 공용으로 사용을 하느냐, 그냥 자기가 현실에 사는 것처럼 산다고 그냥 하느냐 이게 문제죠. 우리가 그대로 공용으로 하는 거예요, 그대로. 그대로 공식하고 있고요. 경전에서는 원식이라고 합디다만 그냥 공식이라고 해도 여러분들이 다 알아듣겠으니까 말이에요. 먹는 것만 식이 아니에요. 우리가 모든 생활하는 데서 나오는 걸 거기다 집어넣는 것도 공식이란 말입니다.

이렇게 해서 어떤 거든지 대치를 하고 어떤 거든지, 보이지 않는 데서 나를 친다 하더라도 대치할 수 있고, 보이는 데서 어떤 문제가 생긴다 하더라도 대치할 수 있고, 모든 걸 자기가 여여하게 살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왜 딴 이름은 믿고 딴 형상을 믿으면서 진짜 자기를 수억겁을 거치면서 진화시키고 형성시켜서 나온 장본인을 못 믿는단 말입니까. 진짜 장본인을. 진짜 장본인의 그 움죽거리지 않는 주장자를 싸고 있는 자기 영혼이 없으면, 불성은 그대로 있는 거지만 자기 영혼이 없으면 태어나지 못하거든요. 그 영혼을 구제를 해야, 영혼이 구제를 받아야…. 구제를 받는다는 건 그렇게 자꾸 해야 영혼과 불성과 둘이 아니게 되면서 이게 그냥 함락이 되는 거예요. 즉 우주가 함락이 되는 것과 같아요.

벌써 일 초 전도 과거예요. 몇천 년 전만 과거가 아니라 일 초 전도 과거예요. 그러니 ‘내가 했다. 과거에 내가 뭐 어떻게 했어. 죄를 많이 지었어.’ 이럴 것도 없고, ‘미래에 내가 어떡하면 잘 살까.’ 이런 걱정 할 필요도 없어요. 단, 오늘 지금 이 시간에 내가 그렇게 원만히 할 수만 있다면 그대로 저절로 오는 거예요, 저절로. 저절로 길이 트이고, 저절로.

불편한 사람은 피하게 되는데

질문 이렇게 사람들을 상대하다 보면 그냥 마음이 편해지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보기만 해도 마음이 무겁고 불편해지면서 에너지를 뺏기는 듯한 느낌이 드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웬만하면 살짝 피하게 되는데 공부를 하려면 그런 사람들도 바로 부딪치면서 가야 되겠지요?

답변 그게 자기 자신이 없다면 모두가 없다고 그러죠. 자기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그 인연도 만든 겁니다. 그런데 나쁜 사람이라도, 도둑이라도, 강도라도 만나서 내가 좋게 해 주면 다 좋은 겁니다. 다 언짢은 게 아닙니다. 언짢은 마음이 들더라도 공식으로서 그냥 넣으세요. 공용으로 그냥 넣으세요, 둘 아니게. 넣으시고선 속으로 그냥 관하시고선 좋게 말하고 그냥 좋게, 그 상대가 좋게 생각할 수 있게끔 말해 주고 끝내시는 게 좋지 않겠어요? 피하실 것이 없죠.

그런다면 언제 어느 천 년에 이 세상에, 지구뿐만 아니라 우주의 모든 물체도, 이 산사의 목신도, 또 땅의 지신도, 또 물의 수신, 즉 용신도, 그 모든 거를 어떻게 둘 아니게 할 수 있겠습니까. 모두 인연을 지으세요, 좋은 인연으로써. 그럼 아주 간편하게 사시게 되실 겁니다. 항상 무겁지 않게 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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