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순 서울시장 극단적 선택에
국민들 황망… 이후 상황도 우울

예나 지금이나 자살은 부정 인식
삶의 괴로움과 무상을 인정 않고
회피하려는 無明의 행동이 ‘자살’

‘삶은 고통’이며 그 원인은 갈애
고성제 집성제 가슴에 새겨보자
고해의 바다서 익사하지 않는다

지금 우리 국민은 황망한 혼돈의 늪에 빠져 있다. 온 국민이 코로나19의 사슬에 얽혀 신음하고 있는 와중에, 故박원순 前서울시장의 ‘극단적 선택’이라는 단어로 표상되는 행위로 많은 사람들이 멍한 상태에 빠져 있다. 
故박 前시장은 우리 사회의 정치문화 발전에 큰 축으로 역할을 해 왔고 한국 정치의 새로운 아이콘으로 부각되어 왔다. 그런 사람이 비서의 성추행으로 고소를 당하고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 끊었다. 故박 前시장의 영결식 이후 전개되는 여러 상황과 담론의 수준은 우리를 우울케 만들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자살에 대해 인류가 공유하는 태도는 도덕적으로 옳지 않다는 것이다. 자살은 자신의 소중한 생명을 훼손하는 일이고 또한 자아실현의 가능성을 스스로 포기하고 삶을 인위적으로 종결시키는 행위로 보고 있다. 칸트는 자신의 목숨을 끊는 것은 인간을 한낱 ‘고통 완화의 수단’으로 대우한다는 점에서 옳지 않다고 비판했다. 쇼펜하우어도 자살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회피하는 것으로 본다. ‘이타적 자살’도 있다. 베트남 스님들의 독재 반대나 티베트 스님들의 독립 쟁취를 위한 소신공양이 이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일반론적인 자살과 성격이 다르다. 

한국은 2003년 이후 OECD 34개 회원국 가운데 부동의 자살 사망률 1위를 이어 오고 있다. 자살에 따른 연간 경제적 손실이 6조 4800억원에 이른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더구나 한국 청소년의 사망원인 1위가 바로 자살이라고 하니 보통 문제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범 정치인으로 평가받으며 존경과 비전의 표상이 된 유력 정치인들이 극단적 선택을 하고 있으니 청소년에게 모방 자살의 유혹을 줄까 걱정이 된다. 우리나라가 자살 공화국이 된 것인가? 우리 민족은 이 땅에서 수많은 시련을 겪으면서 끈질긴 생명력을 유지하여 왔는데 어째서 이런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가. 

자살을 방지하고 예방할 수 있는 붓다의 지혜는 무엇인가? 바로 ‘사성제(四聖諦)’이다. 모든 존재가 무상하고 괴로움이라는 고성제, 괴로움은 갈애와 집착으로부터 생긴다는 집성제 그리고 모든 괴로움이 사라지는 멸성제와 깨달음의 세계에 이르는 실천 방법인 도성제가 그것이다. 

이 사성제는 붓다 가르침의 기본이요 핵심이다. 사성제 중에서 고성제는 자살 방지와 예방에 제일 중요한 치유약이다. 산다는 것은 바로 고해의 바다를 항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괴로움과 무상을 삶의 양식에서 거부할 때 고해의 바다에서 익사하는 것이다. 익사의 한 형태가 바로 자살이다. 고와 무상을 일상적 삶에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때, 우리는 큰 마음과 큰 지혜로 고해의 바다를 넘어 저 언덕에 도달할 수 있다. 고성제가 사성제의 으뜸인 이유가 다 있다.
 

다음 집성제, 즉 괴로움의 원인이 갈애와 집착임을 알 때 고해의 바다를 항해하는 배에 엔진을 단 것이다. 필자는 고성제와 집성제만 가슴에 새겨도 자살의 유혹을 쉽게 넘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살은 결국 삶의 괴로움과 무상을 인정하지 않고 이를 회피하려는 데서 나온 무명의 행동이다. 여기에 한국 불교의 과제가 있다. 사성제라는 진제, 즉 궁극적인 진리를 자살이라는 구체적인 문제에 연결시키는 세속제, 즉 일상적 진리로 전환시키는 연구와 작업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 사성제의 지혜를 이 땅의 중생을 구제하고 제도하기 위한 교육적인, 사회정책적인 방안에 대한 탐구가 절실하다고 생각한다. 세상은 점점 어지러워지고 불교의 역할은 점점 커지니 이를 어쩌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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