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선(禪)

“여러분, 그대들이 지금 나의 법문을 듣고 있는 것은 그대들의 지(地)·수(水)·화(火)·풍(風)으로 이루어진 육신이 아니라 그 지·수·화·풍을 활용하고 있는 것이니라. 만약 능히 이와 같이 보아버린다면 바로 가고 머무르는 데 자유롭게 될 것이다.

산승이 보건대 꺼릴 것이 없다. 그대들이 만약 성인을 좋아한다면 성인이란 이름뿐인 것이니라. 선을 공부한다는 어떤 사람들은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한다고 하지만 틀려먹은 짓이니라. 오대산에는 문수보살이 없기 때문이니 문수보살을 만나고 싶은가? 그대들 눈앞에 작용하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다르지 않고, 어디를 가도 의심할 것 없이 작용하는 이것이 살아있는 문수보살이니라. 그대들 한 생각 마음의 작용에 아무런 차별이 없는 빛이 모두 참된 보현보살이요, 그대들 한 생각 마음의 작용에서 스스로 속박을 풀어 가는 곳마다 해탈하는 그것이 바로 관세음보살 삼매법이니라. 문수·보현·관음 세 보살이 서로 주인도 되고 손님도 되어 출현할 때는 한꺼번에 출현하니, 하나가 곧 셋이요 셋이 곧 하나인 것이다. 이와 같이 알아버리면 비로소 경전이나 조사의 가르침을 잘 본다고 할 것이니라.”

〈능엄경〉에 ‘반문문성(反聞聞性)’이라는 말이 있다. 25원통장 가운데 관세음보살의 이근원통의 내용에 들어 있는 말이다. 이 말은 귀가 소리를 들을 때 이근(耳根)이 성진(聲塵)을 따라가는데 무엇이 소리를 듣는가? 바깥의 소리를 듣지 말고 듣는 성품을 들으라는 말이다.

임제도 이 장에 와서 법문을 듣는 것은 사대로 구성된 몸이 하는 것이 아니라 사대를 활용하는 것이 듣는 것이라고 한다. ‘반문문성’과 일맥상통하는 이야기이다. 육근(六根)이 육진(六塵)을 상대할 때 각각 짝하는 경계가 다르지만 보는 것이나 듣는 것이나 냄새를 맡는 것은 동일한 성품이다. 이것을 알아버리면 바로 해탈이라는 것이다. 선(禪)은 주체적 자아확립이다. 밖으로 찾을 것이 전혀 없는 내면을 향한 자기탐구라고 할 수 있다.

오대산은 예로부터 문수보살이 머무는 곳으로 알려진 곳이다. 〈화엄경〉 ‘보살주처품’에서 이 산에 문수보살이 머문다고 하였다. 우리나라도 오대산을 문수성지라 한다. 신라 때 중국에 들어간 자장율사도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했다고 하며 무착 문희(無着 文喜ㆍ811~900) 선사가 오대산으로 가다가 문수보살을 친견해 대화를 나누었다는 설화도 전해진다. 오대산으로 가다가 문수보살이 화현해 나타난 한 노인을 만났다. 노인이 물었다.

“어디서 오는가?”

“남방에서 옵니다.”

“남방의 불법은 어떠한가?”

“말법의 비구들이 계율도 잘 지키지 못합니다.”

“대중들은 많은가?”

“300명에서 500명 정도 됩니다. 여기 불법은 어떻습니까?”

“범부와 성인이 함께 살고, 용과 뱀이 섞여 있느니라.”

“대중은 얼마나 됩니까?”

“전삼삼 후삼삼(前三三 後三三)이야.”

〈벽암록〉 35칙에 소개된 이 내용은 나중에 ‘전삼삼 후삼삼’이라는 공안(公案)이 만들어져 널리 회자 되었다.

이 외도 무착이 문수를 팥죽을 쑤던 솥에서 만나 “네 문수는 네 문수요, 내 문수는 내 문수다” 하고 주걱으로 뺨을 때렸다는 설화도 있다.

문수보살의 성지로 알려진 오대산에 문수보살이 없다는 말까지 하여 외부로 향하는 마음을 근절시키고 일체 불보살이 자기 성품(自性) 안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육조단경〉의 자성삼보(自性三寶)와 자성삼학(自性三學)과 같은 뜻의 말이다. 한 생각 마음의 작용에서 스스로 속박을 풀어 가면 그것이 바로 해탈이고 보살의 삼매법이라는 말이 의미심장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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