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이언진여(離言眞如)의 경계

누가 물었다.

“어떤 것이 네 가지 상(相)이 없는 경계입니까?”

“그대가 한 생각 마음에 의심하는 것을 땅이 와서 막아버리고, 그대가 한 생각 마음에 애착하는 것을 물이 와서 잠기게 하고, 그대가 한 생각 마음에 성내는 것이 불이 와서 태워버리고, 그대가 한 생각 마음에 기뻐하는 것이 바람이 와서 날려버리는 것이니라.

만약 능히 이러한 이치를 알아버리면 경계에 휘둘리지 않고 어디서나 경계를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동쪽에서 솟아 서쪽에 사라지며 남쪽에서 솟아 북쪽에 사라지며 가운데서 솟아 변두리에 사라지며 변두리에 솟아 가운데서 사라지며 물 위를 다니기를 땅 위처럼 하며, 땅 위를 다니기를 물 위처럼 자유자재하게 하는 것이니라. 어째서 이렇게 하는가? 지(地)·수(水)·화(火)·풍(風)의 사대가 꿈과 같고 허깨비 같아 실체가 없어 공(空)함을 통달했기 때문이니라.”

상(相)이 없는 경계를 물었다. 이는 생(生)·주(住)·이(異)·멸(滅)의 사상(四相)이 떠나간 생멸이 없는 경계, 다시 말해 공(空)한 경지를 물은 것이다. 외부 경계로부터 전혀 구속을 받지 않고 또한 지(地)·수(水)·화(火)·풍(風)의 사대에 구속받지 않는 생사가 없는 경지다. 이러한 경지에 들어가려면 사대가 공(空)함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상(相)을 벗어나는 것은 곧 무상(無常)을 뛰어넘는 것이다. 상(常) · 낙(樂) · 아(我) · 정(淨)의 열반 사덕(四德)이 갖추어진 부처님의 세계가 상(相)이 없는 세계다.

〈금강경〉에서는 아상(我相) · 인상(人相)·중생상(衆生相)·수자상(壽者相)의 사상(四相)을 가지고 말하면서 “상이 있으면 중생이고 상이 없으면 부처다”고 말했다. 상(相)이란 밖으로 드러나는 모습을 두고 하는 일반적인 말이지만 그것이 변하는 어떤 상태, 상황을 두고 네 가지로 구분해 ‘사상(四相)’이라 한다. 그런가 하면 인간의 의식에 관념적으로 만들어진 고집으로 어떤 주장을 내세우는 것도 상이다. 현상계(現象界)의 모든 것이 상인데, 배후의 본체계(本體界)를 말하려고 부득이 네 가지 ‘상이 없는 것’을 물었다. 이는 이언진여(離言眞如)의 경계를 물은 것이다. 사대의 구속을 받지 않고 자유자재하게 되는 것은 사대가 공(空)함을 깨달아서 얻는 것임을 말하고 있다.

중국의 방거사(龐蘊ㆍ?~808)가 남긴 임종게 법문이 전해지고 있다.

“다만 모든 있는 것을 공(空)하게 볼지언정 간절히 없는 것을 실(實)이라 여기지 말라. 세상 잘 살아라. 마치 그림자와 메아리 같은 것이니라.(但願空諸所有 切勿實諸所無 好住世間 猶如影響)”

여기서 있는 것은 상(相)이고 없는 것은 공(空)이다. 대혜종고(大慧宗苑ㆍ1089~1163) 선사도 〈서장〉에서 방거사의 이 게송을 인용하면서 당시의 사대부들에게 선수행을 가르쳤다. 생사해탈(生死解脫)을 목표로 삼는 선의 실제 수행에 있어서 사대육신을 벗어나는 죽음에 임해 좌탈입망(坐脫立亡)을 보여준 사례가 있었다. 임종을 앉은 채로 하는 것을 좌탈(坐脫)이라 하고 선 채로 숨을 거두는 것을 입망(立亡)이라 했다. 죽을 때의 자세가 무슨 의미가 있느냐 반문할는지 모르지만 임종에 임해서도 고도의 정신력으로 수행의 내공(內工)을 보여준 일면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삼조(三祖) 승찬(僧璨) 대사가 선채로 입적했다 하고, 육조(六祖) 혜능(惠能)은 좌탈을 하였으며, 오대 등은봉(五臺鄧隱峰)은 물구나무를 선채 입적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 외에도 좌탈한 선사들의 이야기는 꽤 많이 전해진다. 좌탈입망이 죽음의 문제를 뛰어넘는 초탈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곽산 경통(샅山景通)은 들판에 마른 나무를 쌓아 놓고 스스로 불을 붙여 불 속에 들어가 앉아 자신의 몸을 태워 입적(入寂)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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