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각 이룬 비구니·우바이 禪者들

대혜 문하 비구니·우바이 ‘눈길’
진국태부인, 대혜에 ‘정각’ 인가
무제·초종 등 여섯 비구니 ‘탁월’
비구니→비구니 법맥 전수하기도

당대를 거쳐 송대에 이르기까지 비구니 선종사찰이었던 절강성 온주 정거사 산문 입구.

인류사에 여성과 남성의 대결 구도가 있듯이 불교사에서도 이런 면을 배제할 수 없다. 고대 인도에서는 여인의 존재감이 매우 낮았다. 여자들은 아이 낳는 존재로 여겼으며, 이 관념이 여성의 남성에 대한 본질적인 열등성을 강조하여 인도인들은 여인을 남성과 동물 중간 정도의 존재감으로 보았다. 그런데 부처님법에서는 여인이 하열한 존재가 아니었다. 

비구 ‘10대 제일’이 있듯이 〈증일아함> ‘비구니품’에는 붓다의 뛰어난 비구니 제자를 언급하고 있다. 그런데 여인오장설(女人五障說)·변성성불(變性成佛)·비구니 팔경계(八敬戒) 등 왜 여인성불에 부정적인가? 이는 후대에 경전과 율장이 편집될 때 그 시대적인 요청이 가미된 것으로 생각한다. 여하튼 중국에서 선이 발전하면서 비구니와 여인 선자들이 꾸준히 배출되었다.

송나라 때로 접어 들어 비구니 활동이 두드러졌다. 비구니가 비구니에게 법맥을 전하는 일이 있었고, 대혜 종고(大慧宗苑, 1089~1163) 문하에 정각을 이룬 비구니 및 재가 여성 제자가 많았다.   

먼저 대혜에게 법을 받은 비구니와 진국태부인을 보자. 진국태 부인에 관해서는 〈서장(書狀)> ‘답진국태부인(答秦國太夫人)’이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우바이 禪者 진국태부인
송나라 수도 개봉에 허씨 성을 가진 노부인이 살고 있었다. 그녀의 법명이 ‘법진(法眞)’으로, 장태사(張太師)와 결혼하였다. 그녀 나이 30세에 남편이 세상을 하직했고, 홀로 자식 둘을 키웠다. 이런 역경 속에서도 그녀는 불교를 믿으며 두 아들을 훌륭히 키웠다. 모친의 정성에 큰 아들 소원(昭遠)은 자사(刺使)에 올랐고, 작은 아들 덕원(德遠)은 승상 지위에 올랐다.  
 
그녀는 나이 70세에 이르러 여생을 조용히 보내며, 마음속으로 대혜 선사를 친견해 가르침 받기를 서원했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 수만리 떨어진 항주의 경산사까지 가는 일이 쉽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대혜 선사의 제자인 도겸이 집으로 찾아왔다. 그래서 노부인은 도겸에게 정중히 법문을 청하며 말했다.   

“스님, 저는 대혜 스님의 법문을 듣는 것이 평생의 소원입니다. 그런데 몸이 늙어 멀리까지 갈 수가 없습니다. 부디 스님께서 대신 법문을 들려주십시오. 대혜 선사께서는 우리 같은 늙은이를 만나면 어떤 법문을 해주십니까?”

“스님께서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누구에게든 ‘마음이 있는 자는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법문을 들려주시고, 도 닦아 부처가 되기를 원하는 자에게 무자(無字) 화두를 참구하라고 합니다.”

“어떻게 무자 화두를 참구하라고 지도하십니까?” 

“한 승려가 ‘개에게도 불성(佛性)이 있는가? 없는가’를 물었을 때 조주 선사께서 ‘무’라고 하셨습니다. 바로 조주 선사께서 답하신 ‘무’의 참뜻을 깨치면 부처가 될 수 있습니다. 왜 ‘무’라고 했는가를 간절히 의심하면 해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 의심을 놓지 말고 앞으로 밀어 붙일 뿐 왼쪽도 오른쪽도 보지 말아야 합니다.”

“잘 알겠습니다. 오늘 도겸 스님을 뵙고 가르침을 받았으니, 대혜 선사를 친견한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열심히 공부하겠습니다.”

그날부터 노부인은 용맹정진에 들었다. 오로지 한 생각, “왜 ‘무’라고 했는가”를 묻고 되물으면서 7일 밤낮을 정진하다가 한순간 깜빡 잠이 들었다. 그때 오색이 찬란한 봉황새 한 마리가 집 정원 뜰에 내려앉았다.   

‘아, 저 새 위에 올라앉으면 편안하겠구나.’ 이 생각과 동시에 그녀는 새 등에 올라탔다. 그러자 봉황이 허공을 향해 날아올랐고, 잠깐 사이에 구만 리 장천에 이르렀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집들은 조그마한 점이 되어 오글거리고, 큰 강은 줄 하나 그려놓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  

‘조그만 점과 같은 저 집들 속에서 서로 살겠다고 욕심을 내고 성을 내며 치고 박고 살고 있으니, 참으로 기가 막힌 노릇이다.’ 

그녀는 인생살이의 참 면모를 깨달았다. 그리고 봉황새가 날아가는 대로 몸을 맡긴 채 세상의 이곳저곳을 모두 구경한 다음 집으로 돌아왔다. 봉황새가 사뿐히 정원에 내려앉는 순간 그녀는 꿈에서 깨어남과 동시에 무자 화두를 깨쳤다. 그녀는 기쁨에 못 이겨 덩실덩실 춤을 추다가 시를 지어 깨달음의 게송을 읊었다.    

“꿈 속에서 봉황을 타고 푸른 하늘에 올라보니, 비로소 인생살이가 하룻밤 여인숙에서 보낸 것임을 알았네. 돌아와 보니, 한바탕 행복한 꿈길이네. 산새의 한 울음소리, 봄비 온 뒤 해맑더라.(夢跨飛鸞上碧處  始知身世一據廬  歸來錯認邯鄲道  山鳥一聲春雨餘) 날마다 경전을 읽으니, 옛적의 지인을 만나는 것과 같구나. 수여 곳에 걸림이 있다고 말하지 말라. 한 번 보니, 한 번 다시 새롭구나.(逐日看經文  如逢舊識人  莫言頻有碍  一擧一回新)”

그 뒤 도겸 스님이 다시 노부인을 방문했는데, 부인은 이 두 수의 시를 주면서 대혜 선사에게 증명해달라고 부탁했다. 시를 본 대혜는 노부인의 정각을 인가한다는 답장을 보내었다.
 
일타 스님께서도 말씀하셨듯이 수행에는 ‘간절한 의심’이 있어야 한다. ‘법(Dharma)’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문제이듯이 화두에는 좋고 나쁜 것이 따로 없다. 자신이 어떤 화두를 잡았으면, 그 한 화두를 간절하게 꾸준히 밀어붙이는 자세가 필요하다.  

대혜의 여섯 비구니 제자들  
이어서 대혜의 여섯 비구니 제자를 만나보자. 제자에는 △무제(無際) △초종(超宗) △자명(慈明) △묘도(妙道) △무착(無著) △진여(眞如) 등이다. 

〈속비구니전>에 의하면, 대혜의 대표 제자로 혜조무제, 무착묘총이 있다. 무제와 무착의 관계는 제자와 스승 관계다. 무제는 무착에게서 삭발했는데, 아무리 정진해도 깨달음에 진척이 없었다. 그러던 중, 스승인 무착을 따라 경산의 대혜 문하에 입실해 깨달음을 얻었다. 무착은 제자 무제에게 ‘대중을 지도하라’고 했는데, 당시 많은 사람들이 무제 비구니를 따랐다는 기록이 전한다. 

한편 〈조동종니승사>에는 무제와 초종 비구니를 함께 소개하고 있다. 또 〈운와기담>에 의하면, ‘두 비구니는 모두 대혜 종고의 제자’라고 소개하면서 이들의 법거량을 기록하고 있다. 이 문헌에는 이들이 모두 비구니인데도 ‘도인(道人)’이라는 호칭을 쓰고 있다. 무제 도인이 탑 주변을 청소하면서 게송을 읊자, 초종 도인이 다음 화답을 하였다.

“탑은 본래 먼지가 없는데, 무엇을 쓸어 없애려는가? 쓸어 없애는 즉 곧 바로 먼지가 생김이니, 이렇게 해서는 도달하지 못한다네.(塔本無塵 何用去掃 掃섦塵生 所以不到)”

다음은 비구니 자명을 보자. 〈대혜보각선사보설>에 ‘니자명대사(尼慈明大師)’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여기서도 비구니에게 ‘대사(大師)’라는 호칭을 쓰고 있다. 〈조동종니승사〉에 ‘자명이 대혜의 제자’라고 언급하고 있다. 

이외에도 대혜에게 비구니 제자로 묘도와 진여 두 사람이 전한다. 묘도 비구니는 정거사에 오래 머물러 살았다. 묘도는 정거사에서 개당설법을 하였고, 모 비구니와의 법거량이 〈속비구니전>에 전한다. 

〈속비구니전>에 의하면, 진여는 출가 전에 황궁에 살았다. 황궁에서 교귀비의 신하였는데, 귀비가 진여의 출가를 허락해주었다. 진여는 여러 지역을 행각하며, 선지식을 찾다가 민(?, 현 복건성)에서 대혜를 만나 법을 받았다. 〈속전등록> 제 29에는 진여와 제천(濟川) 거사의 문답이 전할 정도로 깨달음이 높은 경지에 이른 듯하다.  

비구니 법등(法燈) 
송나라 시대 선종에 한 가지 특기한 점이 있다. 송나라 초기까지 이런 기록이 전하지 않는데, 비구니가 비구니에게 법맥을 전한 점이다. 

〈속전등록>과 〈선등세보>에 “정거사(淨居寺)에 사는 비구니 혜온(慧溫)이 온주(溫州) 정거사 비구니 무상 법등에게 법을 전했다”는 구절이 전한다. 이는 임제종 법계에서 유일한 기록으로 평가된다〈조동종니승사>. 즉, 비구니 혜온이 비구니 무상 법등에게 법맥이 전수된 것이다. 

〈속비구니전> ‘정거사 법등전’에 의하면 혜온 비구니를 정거사의 대선지식으로 소개하고 있다. 혜온은 온주의 정거사에 출가해 용문 청원(1067~1120, 오조 법연의 제자) 문하에 입실해 깨달음을 얻었다. 〈운와기담〉下에는 궁중의 승좌문답(陞座問答)에서 혜온이 보여준 법거량이 전한다. 법등이 혜온 선사를 모시고 대중들과 함께 수행하다가 깨달음을 얻었으며, 법등은 혜온의 허락을 받아 법석에서 설법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그런데 여기 혜온이 상주한 온주 정거사는 절강성(浙江省)에 위치하는데, 이 절은 당나라 때에도 비구니 사찰이었다. ‘정거사 비구니 현기(玄機)’라는 기록이 전하는데, 이 현기 비구니가 설봉 의존(822~908)과 문답하고 깨달음을 얻었다는 내용이 〈오등회원>에 전한다. 이 현기는 당나라 때, 6조 혜능의 법을 받았으니 곧 현기는 청원 행사·남악 회양 등과 사형사제인 셈이다.

이와 같이 현기 비구니가 머문 정거사가 당나라~송나라 때까지 비구니가 상주했던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볼 때, 당대를 거쳐 송대에 이르기까지 비구니 전문 도량인 선종사찰에서 비구니만의 선풍이 이어지고 있음을 추론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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