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당나라 때 남전선사(748~834)의 ‘남전선사가 고양이의 목을 벤 뜻은 무엇일까(南泉斬猫)’란 화두가 〈무문관〉 〈벽암록〉 〈종용록〉 〈선문염송〉 등에 나온다. 화두(공안)는 조사 스님이 제자를 깨달음의 길로 이끌기 위해서 만든 고도로 상징적이고 함축된 교육 프로그램이다.

남전 스님이 동당과 서당의 스님들이 고양이를 두고 다투는 것을 보고, 고양이를 잡아들고 “여러분이 이치에 합당한 한 마디를 하면 이 고양이를 살려주고 못하면 목을 베어 죽이겠다”고 말했다. 대중이 아무 말을 못하자 남전은 마침내 고양이를 베었다.

마침 출타 중이던 제자 조주 스님이 저녁에 돌아오자 남전선사는 낮에 있었던 사건에 대하여 들려주고 “너라면 어떻게 말하겠느냐” 하고 물었다. 조주 스님은 아무 말이 없이 짚신을 벗어 머리에 이고 나가 버렸다. 남전선사는 “네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고양이를 살릴 수 있었으련만…”이라 하였다. 〈무문관〉

‘남전선사가 고양이 목을 자른 화두’는 충격적이고 극단적인 아주 짧은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것 같다. 조주 스님이 발에 신어야 할 짚신을 머리에 인 것은 스승이 고양이의 목을 벤 것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이치에 어긋난 행위임을 지적한 것이다.

위의 화두는 〈무문관〉 제1칙 ‘개에게 불성이 있는가(趙州狗子)’와 상통한 화두이다. 개와 고양이가 바뀌었을 뿐이다. “개에게 불성이 있느냐”고 묻는 질문에 ‘있을까? 없을까? 부처님은 일체 중생이 모두 불성이 있다고 했는데, 왜? 조주 스님은 없다고 했을까? 도대체 이것이 무슨 뜻일까?(是甚投)’ 이렇게 참구하는 것이 간화선(看話禪)의 정통 선법이다. 

진리를 탐구하는 철학자나 구도자의 기본자세는 회의(懷疑) 즉, 의문(의심)이다. 조사어록에 나타난 조사 스님의 평론은 “‘있다(有) 없다(無)’의 양단에 얽매여 집착하는 제자들의 고정관념을 칼로 단호하게 잘라주어 깨달음의 길인 중도(中道)를 제시한 것이다”고 하였다. 

인간이 사는 현상세계는 나와 너, 큰 것과 작은 것, 선악과 미추가 서로 상대적이고 이원적인 구조로 되어 있다. 이것 때문에 갈등이 생기고 고통이 생긴다. 승찬 조사는 ‘신심명’에서 “애정과 증오하는 두 마음만 없애면 지극한 불도가 명백하게 드러난다”고 하였다. 

법사는 진보와 보수, 지연과 학연 등 어느 한 쪽에 치우친 설법을 하면 안 된다. 편파적인 말을 하면 다양한 이해관계가 있는 청법대중은 싫어한다. 차별이 없는 평등한 마음으로 중도 정법을 설해야 한다.

〈법화경〉 ‘법사품’에서 법사의 마음자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법사는 여래의 방에 들어가, 여래의 옷을 입고, 여래의 자리에 앉아서 사부대중을 위하여 설법하라. 여래의 방이란 중생을 사랑하는 자비심이요, 여래의 옷이란 부드럽게 잘 참는 인욕심이요, 여래의 자리란 진리에 대한 바른 견해인 반야공(般若空)이다.”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진리의 내용인 연기(緣起)가 공(空)이요 중도(中道)이다. 반야공은 차별이 없는 평등한 공의 세계를 깨달았을 때 나타나는 지혜이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