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알 수 없는 비밀

“도를 배우는 사람이 잘 알지 못하고 이름이나 글귀에 집착해서 범부니 성인이니 하는 이름의 장애를 받기 때문에 도의 눈이 가려져서 분명히 알지를 못하고 만다. 12가지로 분류되는 모든 경전은 모두 언어문자로 표현하는 말일 뿐이요. 배우는 사람이 근본 이치를 알지 못하고 표현하는 이름이나 글귀에서 지해(知解)를 내니, 이는 모두 언어문자에 의지하는 결과라 인과에 떨어져 삼계의 생사윤회를 면할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그대가 만약 나고 죽고 가고 머무름을 옷을 입고 벗듯이 자유롭게 하고자 한다면 지금 당장 법을 듣고 있는 사람을 알아야 하느니라. 이 사람은 형체나 모양이 없으며, 뿌리도 없고 근본도 없으며, 어디에도 머무는 곳이 없이 물고기가 마음대로 헤엄치듯 움직이고 있으니 온갖 방편의 시설에 응하나 작용하는 자취가 없느니라. 그렇기 때문에 찾으려면 더욱 멀어지고 구하려고 하면 더욱 어긋나버리니 이것을 비밀이라 하는 것이니라.”

이 장에 와서 임제는 또 공부하는 사람이 명심해야 할 점을 상기시킨다. 이름이나 글귀에 집착해서 도의 근원을 잘못 알지 말라는 주의다. 명구상의 지해는 사람의 생각이 지식적인 개념에 머물러 의식화되어버리는 것이다. 이는 도를 깨닫는 장애물이라 도안(道眼)을 열리지 못하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도(道) 그 자체는 지식으로 판단되지 않고 사유심(思惟心)으로 알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원각경(圓覺經)〉에 “사유심으로 여래의 원각경계를 헤아리는 것은 반딧불을 가지고 수미산을 태우려는 것과 같다”고 한 말이 있다.

〈삼승십이분교〉는 부처님 말씀 전체를 수록한 경전을 그 형식과 내용에 따라 12가지로 분류해 놓은 것이다. 경전이 비록 법을 설해 놓은 말씀이지만 이는 말로 이해시키는 설명이다. 이른바 방편설인 것이다. 선에서는 이 방편설을 곡담(曲談)이라 하며 이를 떠나 직설(直說)인 격외선지(格外禪旨)를 터득할 것을 요구한다.

인과에 떨어진다는 말은 잘못된 업을 지어 나쁜 과보를 받는다는 뜻이다. 백장야호(百丈野狐)의 선화(禪話)에 “수행을 크게 이룬 사람도 인과에 떨어지는가 떨어지지 않는가?” 하는 질문에 “떨어지지 않는다(不落因果)”고 답하여 500생의 여우 몸을 받았고 “인과에 어둡지 않다(不昧因果)”고 답하여 여우 몸을 벗어나게 하였다는 이야기를 연상케 한다. 백장(百丈)을 만나기 전에는 대답을 잘못하여 여우 몸을 받았다는 것이고 백장(百丈)을 만난 후에는 대답을 바로 하여 여우 몸을 벗어나게 했다 하여 전백장후백장(前百丈後百丈) 이야기라고도 한다. 나고 죽는 생사를 옷을 입고 벗는 것에 비유하여 말하기도 한다. 고려 시대 자진원오(慈眞圓悟ㆍ1215~1286) 국사의 임종게에 “태어나는 것은 옷을 입는 것이고 죽는 것은 옷을 벗는 것이다(生也如着裙 死也如脫俊)”고 하였다.

‘나고 죽고 가고 오고’ 하는 생사윤회를 벗어나고자 한다면 법문을 들을 때 듣는 그 사람을 바로 알라고 하였다. 이는 자기 진아(眞我)를 찾으라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내가 누구인가?’ 하는 자기 정체를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정체를 망각한 사람들을 향해 임제는 매서운 일침을 가하고 있다. 임제가 무위진인(無位眞人)이라 하고 무의도인(無依道人)이라 말한 그 사람이 바로 모든 사람들의 자기 정체인 ‘진아’이다. 선은 정체 회복의 공부다.

이 ‘진아’가 오온으로 구성된 육신의 옷을 입고 벗는 주인이다. 일체의 속박을 벗으나 아무 데도 의지함이 없는 자유자재한 존재로 끝없는 대기대용(大機大用)을 발휘하는 당사자인 것이다.

그러나 어디에도 머무는 자리가 없다. 다시 말해 시간과 공간적인 위치가 없다. 좌표를 점찍을 수 있는, 누구도 아니고 무엇도 아닌 정체 없는 정체가 무위진인이다. 그렇기 때문에 생각을 앞세워 찾으려 하면 더욱 멀어진다고 하였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말로 설명할 방법이 없다. 그래서 부득이 비밀이라는 말을 덧붙여 놓았다. 그야말로 알 수 없는 비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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