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공성상(空性相)

청화 스님이 엮은 금타대화상의 〈금강심론(金剛心論〉 ‘제1편 일인전에 일인도 제2장 보리방편문 제3절 삼신요별(三身了別)’에, 법신(法身)·보신(報身)·화신(化身)의 삼신(三身)을 각각 법신은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 체대(體大). 진(眞). 공(空)], 보신은 원융무애지[圓融無碍智. 상대(相大). 여(如). 성(性)], 화신은 수연불변식[隨緣不變識. 용대(用大). 여여(如如). 상(相)]으로 배대하였다. 곧 법·보·화 삼신이 심·지·식(心·智·識)이며, 〈대승기신론〉의 체·상·용 삼대와 같으며, 진·여·여여(眞·如·如如)이며, 공·성·상(空·性·相)이라는 것이다.

법·보·화 삼신이 진리의 여러 측면을 인격화한 것이라면, 공·성·상(空·性·相)은 이치로 본 것이다. 수연불변식은 일진여[一眞如. 대승기신론의 일심(一心)]가 인연에 따라 오염하되[隨緣眞如], 변하지 않고 깨끗하여[不變眞如], 오염되기도 하고 깨끗하기도 한 ‘있는 그대로의 모습[如如相]’을 보인다. 이 ‘여여상[相]’의 그러한 성품[性]이 참공[眞空]인지라, 공·성·상(空·性·相)이 하나도 아니요[非一], 둘도 아니며[非二], 또한 셋도 아니다[亦非三].

삼신과 공성상의 관계를 다시 부연하자면, 진[眞. 법신, 공(空)]·여[如. 보신, 성(性)]가 삼계육도[여여(如如).화신. 상(相). 곧 욕·색·무색계 삼계의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천의 육도(六途)]에서, 인연 따라 다르게 익어가니[隨緣異熟] 오염된 의식을 받아들이는 범부 중생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성품은 변치 않으니[眞性不變] 깨끗한 의식을 받아들이는 성인이요 붓다이다.

오염된 중생과 깨끗한 성인이 함께 있는 그대로의 모습[如如相]이 화신이고, 오염과 깨끗함이 한결같은 일여의 성품[一如性]이 보신이며, 성품과 모양의 본래 공한 경지[本空境地]가 법신이다.

법신은 맑은 허공[淸空心界]과 같고, 보신은 (공덕의 성품이) 충만한 바다[淨滿性海]와 같고, 화신은 바다 가운데 떠도는 거품 중생의 모습[?相衆生]과 같으나, 실상(實相)은 공도 아니고 유(有)도 아니며[非空非有], 참붓다는 3신(三身)도 아니니, 수행을 통해 말과 글을 떠난 실제 뜻을 요해(了解)하도록 해야 한다.

〈대반열반경〉에 이자삼점[伊字三點. ∴ 또는 ∵. 산스크리트]의 비유가 나온다. 점 세 개를 삼각형으로 찍어 놓은 글자를 가리키며, 산스크리트 문자 의 발음을 음사(音寫)한 것이 한자로 ‘이(伊)’이므로 이자삼점이라 한다. 이는 가로도 세로도 아니고 삼각의 관계를 이루었으므로 물(物)이 하나도 아니고 다르지도 않으며[不一不異], 앞도 뒤도 아닌 것[非前非後]에 비유한 것이다. 열반경에서는 법신·반야·해탈의 삼덕(三德)에 비유한다. 다른 곳에서는 공·성·상(空·性·相), 법보화 삼신, 불법승 삼보, 삼법인 등이, ‘셋이 곧 하나이며[三卽一], 하나가 곧 셋임[一卽三]’에 비유하기도 한다.

“무엇을 이름하여 ‘비밀히 감춘 것’이라 하느냐. 마치 ‘이자의 세 점 ∴’과 같다. 만약 (가로로) 나란히 있어도 이(伊)자를 이루지 못하고 세로로 있어도 또한 (이자가) 이루어지지 않나니, 마치 마혜수라왕 [대자재천(大自在天), 색계의 맨 위에 있는 색구경천(色究竟天)에 사는 신(神). 힌두교의 시바신] 얼굴에 눈이 세 개 있는 것과 같아야 비로소 이자삼점을 이루는 것이다. 만약 각각이라면 또한 다시 글자를 이루지 못한다. 나도 또한 이와 같아서 해탈(解脫)의 법이 열반이 아니요, 여래의 몸[法身]도 열반이 아니며, 마하반야(摩訶般若) 또한 열반이 아니니, 세 가지 법이 각기 다름도 또한 열반이 아니니라. 나도 이제 이와 같은 세 가지 법에 안주하나 중생을 위한 까닭에 (짐짓) 이름하여 열반에 들어간다고 하는 것이니라.”

〈大般涅槃經 T0374_.12.0376c11-17, T0375_.12. 0616b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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