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닦음의 길 11

우리의 감정을 조절하는 에너지도 총량이 있기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면 자연스럽게 폭발하게 된다. 예컨대 화를 참을 수 있는 에너지의 총량이 10이라면, 10의 한계를 넘어섰을 때 비로소 화를 내는 것이다. 누군가로부터 심한 욕을 들었을 경우 그 에너지가 8이라면 아직 2라는 에너지가 남아있기 때문에 화를 참을 수 있다. 그런 상태에서 5에 해당되는 좋지 않은 소리를 듣는다면, 총량인 10을 넘어서는 13에 해당되기 때문에 그 에너지를 감당하지 못하고 ‘화’라는 감정을 밖으로 분출하게 된다. 이는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문제다. 그렇다면 화를 조절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6바라밀 가운데 욕됨을 참는 수행으로 인욕바라밀이 있다. 인욕은 화가 났을 때 이를 대치하는 공부다. 불교에서는 우리가 사는 세상을 사바세계라고 하는데, 이는 참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땅(忍土)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인욕바라밀은 억지로 참으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일까? 물론 그것은 아니다. 억지로 참는 것은 오히려 몸과 마음을 해치기 때문에 차라리 화를 내는 것이 나을 때도 있다. 수행으로서 인욕바라밀은 화가 일어나는 현상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고 마음을 평온한 상태로 유지하는 공부다.

언젠가 한 바라문이 붓다에게 심한 욕설을 퍼부은 적이 있다. 붓다는 이에 흔들리지 않고 비유를 들어 상대를 설득시킨다. 집에 손님이 찾아오면 어떻게 하느냐는 물음에 바라문은 맛있는 음식을 차려서 대접한다고 대답한다. 그런데 손님이 바빠서 음식을 먹지 않고 돌아갈 경우 어떻게 하느냐고 되묻자 그럴 때는 버리기 아까워서 자신이 먹는다고 답하였다. 이때 붓다는 촌철살인의 한 마디를 던진다.

“당신은 나에게 욕이라는 음식을 대접했지만, 나는 그 음식을 먹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남은 욕은 누가 먹어야 하겠습니까?”

얼굴이 빨개진 바라문은 자신의 무례를 깨닫고 용서를 구한 다음 붓다의 제자가 된다. 자신을 향해 욕을 하는 사람마저 제자로 만드는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그 힘은 바로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평정심에서 나온다. 평정의 마음일 때 그 어떤 거친 욕이라도 나를 흔들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인욕바라밀의 핵심은 참는 데 있다기보다는 마음을 평온하게 유지하는 데 있다 할 것이다. 인내는 마음의 평정으로부터 나오는 자연스러운 작용이다.

대개는 현장(玄唆, 602~664)의 인욕이란 번역을 많이 쓰지만, 개인적으로 구마라집(鳩摩羅什, 344~413)의 안인(安忍)이란 번역이 더 마음에 든다. 마음이 평안(安)할 때 욕됨을 참을(忍) 수 있는 힘이 나오기 때문이다. 〈금강경〉에는 붓다의 전생인 인욕선인(忍辱仙人)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가리왕은 인욕선인의 팔과 다리를 잘랐지만 그는 화를 내지 않았다. 반대로 잘린 팔과 다리를 제석천(帝釋天)이 붙여줬을 때도 고맙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이를 가리켜 양무심(兩無心)이라 한다. 욕됨을 당했을 때나 도움을 받았을 때나 둘 다 마음에 흔들림이 없었다는 뜻이다. 이 무심이 곧 안(安)이고 여기에서 참다운 인(忍)이 나왔던 것이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는 누군가로부터 욕을 들으면 쉽게 화를 내고, 반대로 칭찬을 들으면 즐거워한다. 그런데 화를 내거나 기뻐하는 상황 모두 주체는 내가 아니라 상대였다. 결국 주연인 상대의 말에 따라 조연인 내 마음이 이리저리 흔들린 것이다. 기분이 상할지 몰라도 그 순간 우리는 상대에게 놀아난 꼭두각시에 불과하다. 모두가 평정의 마음을 상실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우리 속담에 참을 인(忍) 자 세 개면 살인도 면한다는 얘기가 있다. 그러나 세 번 참는 동안 그 마음이 과연 온전할 수 있을까? 억지로 참으면 그만큼 부작용도 크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참기 이전에 마음을 평정의 상태로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인욕은 단순히 참는 수행이 아니라 마음의 평안(安)을 통해 중생에서 부처로, 조연에서 주연의 삶으로 질적 전환을 이루기 위한 공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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