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화선 확립한 불세출의 선지식

오직 ‘無’자 공안 참구 강조
공안선을 ‘간화선’으로 정립
의심없는 묵조선 비판·논쟁
韓 전승돼 ‘한국선’ 자리매김

중국 절강성 항주 경산사 객당(客堂)에 모셔진 대혜종고의 진영이다. 대체로 두 개의 향판을 세워놓는다. 왼쪽 향판은 승치(僧値, 한국의 입승), 오른쪽은 지객 한자가 쓰여 있다

대혜종고의 행적 
간화선 제창자 대혜종고(大慧宗苑, 1089~ 1163)는 어려서 유학을 공부했다. 12세에 출가해 17세에 구족계를 받았다. 대혜는 처음 운문종에서 공부한 후 조동종에서 참구하였다. 이후 다시 임제종 황룡파 담당 문준(1061~1115)의 제자가 되었다. 

문준이 병으로 입적하기 전에 대혜를 원오극근에게 천거하며 그를 찾아가라고 하였다. 대혜는 스승 문준의 어록을 만들고, 탑명 원고를 청탁하기 위해 만난 무진거사 장상영(1043~1121)과 도반이 되었다(1120년). 대혜는 몇 년간 여러 지역을 유행하며 수행하면서도 극근과 인연이 닿지 않았다. 그러다 1125년 천녕사에서 극근을 처음 만나 가르침을 받고, 42일 만에 깨달음을 얻었다.

대혜가 스승에게서 법을 받고 활동하려던 시기는 북송에서 남송으로 넘어가는 시기다.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의 침략으로 송은 강남으로 천도해 남송(1127~1187)을 세웠고, 송나라 조정은 금나라와의 주화파(主和派)와 주전파(主戰派)로 나뉘어 대립했다. 당시 주전파에 속해 있던 대혜는 항주(남송의 수도) 경산사(徑山寺)에서 간화선을 보급하며 사대부들과 교류하고 있었다. 이 무렵 조정은 ‘금과 화해하자’는 주화파로 분위기가 흘러갔다. 1141년 고종의 신임을 받던 재상 진회(1090~1155)는 주전파인 장준·한세충·악비의 병권을 빼앗고, 악비를 모함해 죽였다. 53세 무렵, 대혜는 반역을 모의했다는 혐의를 받고, 승복과 도첩을 박탈당한 뒤 유배되어 총 16년간 귀양살이를 했다.  

1155년 사면되어 항주로 돌아온 대혜는 영은사에 머물다가 1157년 장준의 천거로 다시 경산사 주지가 되었다. 이 무렵 조동종의 굉지정각과 선법 논쟁을 하며 ‘화두선’이라고 하는 간화선을 제창하였다. 4년 후 다시 절강성 사명산의 아육왕사로 거처를 옮겼지만, 조정의 요청으로 다시 경산으로 돌아와 74세로 입적하였다. 저서에는 편지글을 모은 〈서장〉, 스승 극근의 어록을 모은 〈정법안장〉·〈대혜어록〉 등이 있다. 대혜는 ‘보각선사(普覺禪師)’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묘탑 이름은 보광(寶光)이다. 

묵조선·간화선 논쟁
대혜는 당시에 참선하는 수행법을 비판하였는데, 비판 대상이 조동종의 굉지정각(1091~1157)이다. 이 비판한 내용을 살펴보고, 묵조선과 간화선을 비교해보면 간화선의 사상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본다. 대혜와 정각이 첨예하게 대립했는데, 이를 ‘묵조와 간화의 대논쟁’이라고 한다. 논쟁의 원인에는 당시 대혜가 살았던 시대적인 상황도 배제할 수 없다.

대혜는 나라가 어려울 때, 조동종 계열 스님들이 침묵하고 있던 점에 반감을 가지면서 형식적인 선정과 의식에 집중하는 조동종의 선풍을 ‘(다만 앉아 있는)고목무심(枯木無心)의 묵조사선(?照邪禪)’이라고 비판하였다. 즉 일체중생이 본래 부처라는 사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단지 안일함에 안주해 있는 승려들에 대한 비판이다. 한편 조동종의 정각은 “결코 대혜의 간화선이 제일의선(第一義禪)이 아니다”라고 응수하고 나섰다.

그러나 〈인천보감〉에 의하면, 대혜와 정각, 두 스님의 인연은 표면적인 것과는 다르게 매우 각별한 사이였다. 대혜가 15년간의 유배생활을 마칠 무렵, 정각은 조정에 상소를 올려 아육왕산 광리사 주지로 대혜를 추천하였다. 대혜가 유배생활을 마치고, 그해 명주 광요선사에서 공식적인 개당설법을 할 때, 증명법사로 정각이 참석하였다. 또한 정각은 대혜가 유배지에서 사찰로 돌아오면 수많은 대중이 함께 상주할 것을 예상하고, 소임자에게 ‘한 해 예산을 서둘러 준비하고, 창고의 물품이나 쌀을 비축해 두라’고 분부하였다.

1년이 지나 대혜가 주석하고 있던 도량에서 쌀이 부족하다고 하자, 정각은 비축해 두었던 식량을 대혜에게 보내었다. 대혜는 정각을 찾아가 감사를 하며 말했다. “고불(古佛)이 아니라면 어떻게 이와 같은 역량이 있겠습니까?”훗날 대혜가 정각에게 다시 말했다. “이제 우리 모두 늙었소. 그대가 부르면 내가 대답하고, 내가 부르면 그대가 대답하다가 누군가 먼저 죽는다면 남아 있는 사람이 장례를 치러주도록 합시다.”   

몇 년 후 정각이 천동산에서 열반에 들기 전날, 대혜에게 유서를 보냈는데 대혜가 그날 밤 천동산에 도착하여 정각의 장례식을 주관하였다.

대혜의 대표 6가지 공안
①조주(趙州)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 

어느 승려가 조주에게 물었다.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이 무엇입니까?”
“뜰 앞의 잣나무니라.”   

②조주(趙州) 구자무불성(狗子無佛性) 
어느 승려가 조주에게 물었다. 
“개는 불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다.”

③동산(東山) 수상행(水上行)
어떤 승려가 운문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부처님께서 나오신 것입니까?”
“동산이 물위로 간다.”  

④운문(雲門) 간시궐(乾屎厥)
어느 승려가 운문에게 물었다. 
“부처란 무엇입니까?”
“똥 닦는 막대기이다.”  

⑤동산(洞山) 마삼근(麻三斤)
어느 승려가 동산수초에게 물었다. 
“부처란 무엇입니까?” “마삼근이다.” 

⑥ 마조(馬祖) 대여일구흡진서강수즉향여도(待汝一口吸盡西江水卽向汝道) 
방거사가 마조에게 물었다. 
“만법과 더불어 짝하지 않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대가 서강의 물을 다 마시면 그때를 기다려 말해주리라.”

이렇게 6가지가 있는데, 이 여섯 화두는 현재까지도 스님들이 수행할 때, 많이 들고 있는 화두이다. 이 가운데 중시하는 것은 두 번째인 무자 화두이다. 오직 ‘무’자 공안 하나만을 끝까지 참구하여 안신입명처(安身立命處)를 찾도록 강조하였다.  

대혜 사상의 특징과 의의 
대혜종고에 와서 오직 ‘무’자 공안 하나만을 끝까지 참구하여 안신입명처(安身立命處)를 찾도록 강조하였다. ‘간시궐(幹屎厥)’ 등 다른 몇 개의 공안들을 동시에 제시하면서 하나의 공안으로 결판내라는 간화선이 확립된 것은 대혜에 의해서이다. 〈서장〉에 의하면, “바깥쪽을 향하여 달리 의심을 일으키지 말라. ‘간시궐’ 위에서 의심이 부서지면 항하사수 의심이 한꺼번에 부서지리라”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법연-극근-종고의 3대에 걸쳐 이어오던 공안선이 대혜종고에 의해 간화선으로 확립되었다.   

구자무불성은 대혜의 할아버지인 오조 법연에게서 비롯되어 대혜에 의해 강화되었다. 대혜도 화두 가운데 무자 화두를 강조하셨으며, 후대 무문 혜개의 〈무문관〉도 무자화두를 중심으로 한다. “3백 60의 뼈마디의 8만 4천 털구멍으로 전신全身에 이 의단을 일으켜 ‘무’자를 참구하라”고 하면서 사량분별심을 경계하기 위한 것으로 무자 화두를 강조하였다. 〈서장〉에서 재가자들에게 편지로 답한 내용이다. 

‘부추밀에게 답함’ 
“그대가 만일 산승을 믿을 수 있을진댄 시험 삼아 시끄러운 곳을 향하여 구자무불성화(拘子無佛性話)를 볼지언정 깨닫고 깨닫지 못함을 말하지 말지니, 바로 마음이 시끄러울 때를 당하여 아무렇게나 잡아들어서 깨달아보라. 요컨대 고요히 앉을 때엔 다만 한 대 향을 사르고 고요히 앉되, 앉을 때 혼침(昏沈)에 들지 말며 또한 도거(掉擧)하지도 말지니, 혼침과 도거는 선성(先聖)의 꾸짖으신 바니라. 고요히 앉을 때에 이 두 가지 병이 현전함을 깨닫자마자 다만 구자무불성화를 들면 두 가지 병은 애써 물리쳐 보내려 하지 않아도 당장에 고요해지리라.” 

‘여사인 거인에게 답함’
“들어 일으키는 곳에서 알아차리려 하지 말며 또 사량으로 헤아리지 말고 다만 뜻을 붙여 가히 사량치 못하는 곳으로 나아가 사량하면, 마음이 갈 바가 없어서 늙은 쥐가 소뿔 속으로 들어가 문득 거꾸러짐을 보리라. 또 마음이 시끄럽거든 다만 〈구자무불성화〉를 들지니, 부처님 말씀ㆍ조사의 말씀ㆍ제방 노숙의 말씀의 천차만별을 ‘무’자만 뚫으면 한꺼번에 뚫어 지나서 사람에게 물을 필요가 없으려니와, 만일 일향으로 사람에게 묻되 부처님 말씀은 어떻고 조사의 말씀은 어떻고 제방 노숙의 말씀은 어떻고 하면 영겁토록 깨달을 때가 없으리라.”

화두는 산란과 혼침을 제거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요, 공안에 대해 대의단(大疑團)을 일으키는 것이다. 대혜가 정각의 선을 묵조사선이라고 비판한 것은 의심이 결여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주된 선이 간화선이다. 고려 보조국사 지눌이 대혜의 사상을 받아들이면서부터 근자에 이르기까지 이어지고 있다. 지눌은 세 차례에 걸쳐 깨닫는데, 마지막 세 번째에 이르러 견성의 경지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지눌 이후, 송광사 16국사를 배출하면서 간화선이 꾸준히 발전하였고, 고려 말기 몽산 덕이의 간화선풍이 풍미를 이루면서 간화선은 곧 한국선으로 자리매김되었다. 특히 대혜의 무자화두 참구법은 지눌의 〈간화결의론〉, 진각 혜심의 〈구자무불성화간병론〉, 서산 휴정의 〈선가귀감〉으로 흘러왔으며, 현 우리나라 선자(禪者)들이 가장 많이 들고 있는 화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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