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와 평정심

13-1 빙산의 윗부분은 표면 마음이고 밑둥은 무의식입니다. 무의식은 삶의 배경입니다. 삶의 실상을 잘 볼 수 있는 사건이 최근 미국에서 발생했습니다. 시위를 하던 흑인을 목눌러 제압한 백인 경찰이 숨이 막혀 바둥거리는 것을 계속 저항한다고 더욱 강하게 눌러 살인에 이르렀습니다. 신속히 제압하여 수갑을 채운 후에는 목누르기를 중지해야 했음에도 그동안 경찰의 과잉 제압은 공공의 안전을 위해 불가피한 법집행이라고 합리화 해온 데 대해 전 세계가 분노하고 있습니다. 무력으로 신대륙에 입성하여 원주민인 인디언들을 정복하면서 인디언들의 보복을 대처하기 위해 무기 소지가 일상화되었고, 총기에 의한 무차별 끔찍한 사고가 수시로 발생해도 무기 소지법이 폐지가 안 되고 있습니다. 무기 산업이 미국을 초강대국으로 만들었고 세계 경찰 역할을 자임하게 만들었지만 이마저도 오직 자기 나라만 잘 살려는 이기심을 숨기지 않고 공공연하게 선언하는 트럼프의 아집과 독선에 의해 산산히 무너지고 있습니다. 교육과 의료와 선교를 통해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 우월한 문명국으로 뽐내던 서구의 민낯이 코로나 사태에 의해 드러난 것이지요. 그동안 추구하고 뽐내온 자유와 평등에 입각한 사랑의 정신은 코로나에 의해 빙산 밑둥이 드러난 모습입니다.

마음 작용, 개인 넘어 세계 퍼져
지혜·자비 증상, 명상 통해 가능
내면 풍파 잠재울 평상심 필요

13-2 그런가 하면 부모가 아이를 가방에 가두어 질식 사망케 하고 무차별 구타 감금한 사건들도 발생하였습니다. 이미 몸의 멍을 발견하여 아동 학대임을 경찰에 신고하였지만 경찰은 부모의 폭력을 가볍게 넘겨 결국 사망에 이르게 되었지요. 이런 사건이 한두 번이 아니지만 사고를 미리 예견하여 선제적 조치를 하는 데는 아직 미흡합니다. 모두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사후 처방에만 급급하여 언제나 안전 불감증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이기심은 사회 전반에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그 결과가 참혹합니다. 마음의 은밀한 작용이 개인의 불행과 고통만이 아닌 사회 전반 그리고 세계 전체에 물결처럼 퍼져나감을 봅니다. 이를 잘 보고 잘 알지 못하면 인간의 고통은 끊임없이 형태를 달리하여 지속될 것입니다. 이기적 욕망이 오만과 편견으로 각종 차별과 폭력으로 나타나 인간의 존엄을 파괴하고 자연을 파괴하고 있군요.

13-3 ‘잘 보고 있는 그대로 알아야 된다(여실지견·如實知見)’는 붓다의 가르침은 삶을 떠나면 무의미합니다. 일상 속에서 적용되고 일상 안에서 살아 숨 쉬어야 합니다. ‘일상선’ 곧 일상 명상입니다. 마음이라는 공간에 원치 않는 생각이나 감정의 구름에 휩싸일 때가 많습니다. 부정적인 생각은 없애려 하거나 억누르려 해봐도 잘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욱 힘이 세집니다. 긍정적인 생각으로 대치하려 해도 잘 안되고 의지로 해결할 수 없군요. 일시적으로 생각을 없애기는 오히려 쉽습니다. 그러나 부정적인 생각의 굴레에서 벗어나기는 어렵습니다. 감정과 연결된 무의식에서 올라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분석적 심리치료가 등장하였지요. 명상에서 해결책을 찾아보겠습니다.

생각을 비우려 하기보다 생각을 바라보라.

번뇌를 없애려 하지 말고 번뇌를 바라보라.

물동이를 가만히 놔두면 흙탕물이 가라앉듯이 생각을 바라보면 저절로 그 생각의 혼탁함이 맑아진다는 것입니다. 한 번 시험해볼까요? 차별하는 마음(편견과 혐오감)도 사라지나요?(웃음)

13-4 명상을 무념무상으로 여기거나 생각 없애기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반은 맞고 반은 잘못된 견해입니다. 명상은 크게 두 날개로 이루어집니다. 집중과 관찰이 그것이지요. 집중의 측면을 강조하면 맞는 이야기이나 관찰의 측면에선 잘못된 것이지요. 생각을 잘 보는 것도 명상의 기능입니다. 잘 보려면 집중력이 밑받침되어야 하지요. 그래서 집중과 관찰이 균등하게 이루어져야 명상이란 새가 잘 날 수 있습니다. 명상은 상상력을 이용하고 창의력을 키웁니다. 즉 좋지 않은 생각에서는 벗어나게 하고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생각은 활발해지지요. 상상력도 풍부해집니다. 집중과 관찰이 잘 되면 통찰(깨달음)이 일어나는데 이것은 지식이 아닌 지혜입니다. 숨은 욕망과 분노를 자각하는 통찰에 스스로 이르게 됨을 말합니다. 결국 명상을 하는 목적은 지혜롭고 자비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입니다.

13-5 부부 갈등으로 상담실을 찾아 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인관계에서 많은 갈등들이 있지만 배우자와의 갈등은 모든 갈등의 표본이 됩니다.

독실한 종교인인 중년 여성이 배우자와의 심한 불화로 이혼을 결심하고 형제들과 모여 상의합니다. 오랫만에 형제 간에 대화를 나누던 중 ‘내가 사랑을 많이 받지 못했다. 다른 형제에 비해 물질적으로도 차별 받았다’는 생각이 떠오르자 내면에서 엄청난 분노가 솟구치더라는 거였습니다. 급기야 고성이 오가고 상황은 급반전하여 전쟁터가 되고 말았답니다. 게다가 상대를 죽여버리고 싶은 적개심으로 살인도 이렇게 해서 일어나겠구나 하였답니다. 그래서 상담자가 물었습니다. 그러한 비슷한 상황이 또 언제 일어났는지 떠올려보라 하였지요. 그러자 내담자는 눈물을 흘리며 그 분노가 배우자에게 느낀 감정과 그 과정이 너무 동일하다는 거지요. 무엇이 그렇게 만들었을까요? 기성 종교의 가르침대로라면 신이나 사탄 둘 중의 한 쪽 작품이겠군요. 그녀는 수십 년 신앙생활도 분노 앞에서 속수무책임을 한탄하였습니다.

13-6 이렇게 우리 마음은 잔잔한 파도에서 광풍 노도로 변하게 되곤 하는데 여러 차별과 학대의 경험과 기억 회상과 비교하고 평가하는 마음들이 복잡하게 얽혀 분노로 나타납니다. 그러니 분노는 이름이 분노이지 마음의 일련의 연쇄 작용임을 알 수 있군요. 상대방이 만들어 준 게 아니라는 거지요. 분노 조절은 종교의 유무에 있지 않음을 이 사례에서 봅니다. 오직 내면의 농사를 얼마나 잘 지었는지로 판가름 나는 것이지요. 잘 가꾸어진 마음 밭이라면 돌멩이 하나 던져졌다고 온 밭이 쑥대밭이 될 리가 없지요. 마음 밭 관리를 평소에 하지 않고 바깥만 치장하면 온갖 잡초와 돌, 자갈들로 무성하게 되어버려 자제 불능이 되는 거지요.

문제 상황마다 외부에 책임을 묻고 외부에서 해결책이 주어진다고 생각하고, 종교생활도 외부에서 구원이 온다고 믿고 있는 한, 감정 조절의 책임도 외부에 의존적인 삶이 되고 맙니다. 평소 지붕과 창을 잘 관리하면 장마를 걱정할 필요 없고 천둥번개 칠 때마다 두려움에 떨 필요가 없듯이, 내면의 욕망과 분노를 잘 성찰하고 자각하는 깨어있는 명상을 실천하는 사람에겐 내면의 풍파에도 크게 흔들리지 않는 평정심이 있습니다.

13-7 어떻게 해야 관계에서 갈등을 극복할 수 있을까요?

상대와 대화를 할 때 어떤 언행에서 기분이 상했을 때 어떻게 반응해야 바람직할까요?

상대를 자극하지 않고 나의 불편함을 억압하거나 숨기지 않고 이야기할 수 있어야겠군요.

지금껏 사용한 자신의 대화 방식이 2인칭 주어방식이었음을 확인해보세요.

“네가 나를 무시했어. 너는 나를 비난했어.”라고 말하곤 하지요.

해법은 1인칭 주어를 사용해보는 것입니다.

“나는 방금 그 말(행동)에 비난 받는 느낌이 들고 마음이 상했어.”

“나는 그 말에 거절(무시)당한 기분이야.”

상대를 직접 비난하지 않고 내가 속상함을 느낀 그대로 말해줌으로써 상대가 내 마음 상했음을 알게 하고 스스로 자신의 언행을 돌아볼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지요. 비난 없이 스스로 반성하고 사과하게 한다면 우리가 원하는 목표에 도달하게 됨을 확인해보세요. 머리가 아닌 가슴에 호소하는 것이지요. 생각을 피력하면 주장이 되지만 아픔을 이야기하면 상대의 가슴도 울리게 되는 것이지요. 이렇게 되면 상대의 눈치를 보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상대의 입장을 공감하고 이해하려는 태도가 열립니다. 상호 이해 상호 존중이 가능해지는 거지요. 평행선을 긋던 상호 비난과 자기 정당화의 지루한 언쟁에서 화해가 일어나고 관계의 회복과 의식의 상승이 일어납니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태도도 바람직하지 않고 ‘너만 문제야’라는 태도는 더욱 아니지요. 남을 보는 게 아니라 나를 먼저 보는 것이 해답입니다. 스승께서도 밖을 보지 말고 안을 먼저 보라 하셨지요. 내 안에서 올라오는 감정과 생각을 보고 알아주는 것이지요. 어떤 느낌이 들고 어떤 생각이 나는가를 바라보노라면 삶은 투쟁 모드에서 벗어나 즐기는 모드가 되는군요.

13-8 명상은 긍정적 상상력을 최대한 활용합니다.

푸른 하늘을 떠올려 보세요.

하늘에 한가로이 구름이 떠가고

새들도 자유로이 날고 있군요.

비록 집안에 있어도 산을 떠올리고

계곡물이 시원하게 맑은 소리로 흐르는 장면도 떠올리고

한가로이 풀밭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거나

백사장 모래밭에 몸을 푹 담그고 하늘을 바라보아도 되고

이렇게 자연과 함께 하는 시간을 잠시 갖습니다.

자연은 스승입니다.

돌멩이 하나

풀 한포기

꽃 한 송이

바람 한줄기

구름 한조각

지나가는 강아지

새들의 지저귐

빗물 떨어지는 소리

포근히 내려앉는 눈송이

하나에도 자연의 신비와

아름다움이 느껴집니다

자연은 나와 남을 구분하지 않으니

분리감도 차별감도 느끼지 않습니다.

몸도 마음도

모두 자연으로 내려놓고

한 발 물러서서 바라보면

자연은 내가 되고 나는 자연이 되어

모두 하나인 생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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