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과 거짓

11-1 ‘세 살 버릇이 여든 간다’는 속담은 심리학적으로 진리입니다. 어린 시절 형성된 신념의 굴레는 성향으로 굳어져 평생을 좌우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상황에서 맨 처음 반응은 느낌입니다. 느낌과 감정에 뒤이어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생각들이 후속합니다. 자동적 생각들을 찬찬히 보면 어떤 일정한 틀(신념)이 있습니다. 이 신념이 감정도 좌우하고 행동도 지배하게 됩니다. 어린 시절 경험하여 생긴 신념들은 무의식에 뿌리 깊이 자리 잡고 우리를 지배하고 평생을 호령하지요.

판단은 과거경험에 근거
과시욕구가 선입견 잉태
내면의 선한 마음 살려야
감사 통해서 행복 얻는다


눈을 감고 조용히 삶을 돌아보세요.(호흡과 함께 1-2분 숙고해봅니다) 마음 속에서 올라오는 생각들과 에고가 만들어내는 이야기들을 바라보세요.

만들어낸 이야기들에 주목하면, 자동적으로 떠오르는 생각들이 생겨나 배경이 떠오르게 됩니다. 이 배경과 조건을 통찰하기 전에는 세살 버릇은 죽을 때까지 지속됩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거짓말이지요. 자신이 불이익을 당하지 않으려고 사랑 대신 야단 맞을까 봐 두려운 나머지 거짓을 지어내기 시작하였지요. 사랑받지 못할까 봐, 인정받지 못할까 봐, 전전긍긍합니다. 이 두려움이 거짓말을 만듭니다.

11-2 판단은 사실에 입각하지 않으면 아무리 훌륭해도 잘못되기 마련입니다. 어디까지 사실이고 어디부터 나의 주관적 판단일까요? 판단 또한 과거경험과 지식에 근거합니다. 그 가운데 과거경험은 기억에 보존됩니다. 그런데 기억은 사실과 다를 수가 있습니다. 의식의 창고(무의식)에 수록되고 저장된 내용이 회상을 통해 기억되는 과정에서 변형이 일어납니다. 무의식적 조작이 일어나는 것이지요. 조현증의 경우 망상적 변형이 환상적 기대와 함께 비빔밥처럼 버물려지거나 기억 샐러드를 만들어냄을 봅니다. 잠자는 동안 꿈을 만들어내는 과정과 유사합니다. 기억 변형이 일어나는 과정은 상징화, 합리화를 통해 은폐하고 싶은 것들이 의식에 드러나도 괜찮을 정도로 변형되지요. 기억의 편집도 일어납니다. 두 사건의 일부가 서로 혼합되어 기억 회상을 통해 새롭게 기억되기도 하지요. 그런데 이 과정이 무의식적이어서 우리는 그 사실을 자각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거짓말을 하면서도 자신은 태연합니다.

11-3 코로나 사태가 일깨워준 사실은 거짓은 크나큰 재앙이란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종교가 “거짓말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중세의 페스트 때도 그렇고 현대의 코로나 때도 집단감염으로 국가와 세계 전체를 위기로 몰아넣었고 맹목적 신앙으로는 보호도 구원도 없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바른 신앙은 바른 견해에 입각한 신앙입니다. 바른 견해는 과학과 상충되지 않습니다. 막연한 상상과 기대가 모두 거짓은 아닙니다. 사실에 일부 기초하지만 사실을 부풀리거나 덧칠하여 나타납니다. 마치 조그만 눈 주먹이 굴리고 굴리다 보면 눈사람이 되는 것처럼, 교묘한 위장으로 자신과 사람들을 현혹시킵니다. 가짜뉴스는 종교도 예외가 아닙니다. 진리를 빙자하여 권위적 태도를 취하며 하느님을 팔고 부처님을 파는 행위들이 그것입니다. 이는 남의 이야기 남의 종교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자화상입니다.

11-4 코로나는 인간에게 자신을 돌아보고 깨우칠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 깨우침 가운데 하나가 세상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지요. 한 사람의 안전은 모든 사람의 안전과 직결되어 있음을 봅니다. 지구촌 어느 한 곳의 문제가 세계 곳곳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공간적 격리로 끝나는가 싶었는데 경제적 봉쇄까지 일어나 세계 경제가 위기에 처해버렸습니다. 대신 사람들 활동이 줄고 소비가 주니까 경제는 침체되었지만 대기질이 좋아지고 환경은 정화되고 생태계가 복원되는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모든 게 그물망처럼 연결되어 있다는 붓다의 가르침(연기법)이 피부에 와닿는 시점입니다.

11-5 우리는 서로 의존되어 있습니다. 그 의존을 거부하면 오만해지고 혼자 잘남에 빠지기 쉽지요. 의존은 단순한 의지가 아니라 서로 의존하는 것, 곧 평등한 관계 맺기입니다. 관계가 원활한 경우를 보면 상호 존중하고 서로 돕고 배려하지만, 관계가 단절되면 고립이고 대화 단절이고 감정 차단이며 자신만을 생각합니다. 자신만을 내세우고 종교를 방어 수단으로 삼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신의 문제를 종교로 일시에 해결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결국 실패합니다. 종교적 신념으로 자신을 가두어 관계 회복의 길을 막아버리고 있지는 않는지요?

“나는 손 안 씻어도 되고 마스크 쓰지 않아도 괜찮아. 안전거리 지키지 않아도 감염 안 되고 밀집 예배도 괜찮아. 모두 신앙이 없거나 우상 숭배하는 사람들의 일이지 우리는 괜찮을거야. 우리가 믿는 신은 전능하거든.”

이렇게 믿고 그 믿음을 주위에 전파합니다. 진실인가요? 오만임이 밝혀졌습니다. 신앙 만능주의입니다. 이런 모습은 불교에도 팽배합니다. 깨달으면 환골탈태하고 전지전능하여 하늘을 날고 모르는 게 없는 도인이 된다는 환상을 갖습니다. 이 환상의 그늘에서 이단 종파들의 교주들이 신격화되어 활개 칩니다. 코로나 사태 초기에 유럽이나 미국에서 동양인을 보면 ‘코로나 아시아’라고 손가락질하며 혐오하였지요. 사실인가요? 참된 마음이 아니고 거짓된 마음입니다. 한 번의 거짓된 마음은 자신의 결함이나 치부를 숨기는 방어에서 나왔지만 그 폐해는 일파만파임을 코로나는 보여줍니다. 그런가 하면 감염 상황을 숨기거나 은폐하지 않고 투명하게 보도한 결과 한국의 방역이 세계의 교과서가 되고 국격을 한껏 드높이고 있습니다. 진실과 거짓의 차이가 이렇게 극명합니다.

11-6 이처럼 사실을 사실대로 본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요. 우리는 선입견이나 여러 신념들로 채색 가공하여 그럴싸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포장하기를 좋아합니다. 좀 더 잘 보여 인정받으려는 욕망과 과시하고자 하는 욕구가 작용하여 오만과 편견을 만들고 있군요. 우리의 내면을 살펴보고 마음속에서 이야기하는 내용들에 귀 기울이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코로나는 가르쳐줍니다. 바이러스도 의식이 있어서 생존을 위해 유전자를 변형시킵니다. 그들에겐 남녀노소 그리고 종교나 인종 차별이 없습니다. 그들 앞에서 뽐냄이나 만용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들이 무차별 공격자가 되게 하지 않으려면 겸허히 자연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보이거나 보이지 않은 미생물일지라도 행복하기를 빌라는 부처님의 자비관이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중국 무협을 보면 의발전인들이 있습니다. 붓다는 의발을 전수하신 적이 없습니다. 교단 승계를 요구한 데바닷따에게도, 상수제자인 사리불이나 목건련 존자에게도, 임종 후 뒤늦게 온 가섭 존자에게도, 부처님은 금란가사를 두르고 주장자로 설법하시지 않으셨을뿐 아니라 당신을 신격화하여 믿지 말라 하셨으니 모두 후대에 만들어진 것이지요. 부처님은 의발전인 한사람이 아닌 인류 모두에게 ‘오직 괴로움에서 벗어날 방법’인 가르침을 전하셨지요. 전염병이 돌자 청소와 위생을 강조하셨고 전생과 내생을 훤히 보는 신통력을 경계하셨습니다. 여섯 신통(육신통) 가운데 고통을 일으키는 탐진치(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 세 가지 독한 마음, 삼독심)를 소멸시키는 신통 외에 다른 신통들은 환상에 가깝다고 말씀하십니다. 평범한 가운데 합리적인 깨우침을 강조하시지요.

11-7 로힛사라는 선인은 빠르게 걷기 신통(신족통) 제일이었습니다. 하루 천리씩 달려 세계의 끝을 보리라 결심하고 죽을 때까지 힘껏 쉬지 않고 달렸습니다. 잠깐 먹고 마시는 것과 잠자는 시간을 빼고는 열심히 달렸지요. 세계의 끝에 도달했을까요? 부처님은 아무리 빠른 수단을 이용해도 세계의 끝에 도달할 수 없다고 하시면서도 세계를 통달할 수 있다고 하십니다. 바로 눈과 귀, 코와 혀, 몸을 통하여 인식되는 세계와 마음으로 짓는 세계는 투철하게 알 수 있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일체지자(인식된 세계를 모두 아는 자)’라고 표현합니다. 마음에서 일으킨 번뇌의 구름들을 잘 보고 제거하는 작업이야말로 가장 수승한 신통력이라는 것이지요.

괴로움에 신음할 때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려 발버둥 치는 대신, 내면으로 눈을 돌려 어떻게 이 괴로움이 발생하였고 어떻게 괴로움을 소멸할 수 있는가를 명료하게 알면 깨달음이라 하셨습니다. 깨달으면 몸의 고통마저 없어질 것으로 기대하는 환상은 붓다를 신격화하는 잘못입니다. 타종교와 달리 붓다는 불치의 병을 낫게 하거나 죽은 자를 살리는 기사 이적을 보이지 않으셨습니다.

“나의 가르침을 들은 제자들은 고통을 당하더라도 슬퍼하거나 근심하거나 가슴을 치면서까지 힘들어하지는 않는다. 그런 때에 오직 한 가지 느낌만 일으키나니 몸의 느낌만 있고 마음의 느낌은 없다. 비유하면 하나의 독화살만 맞고 두 번째 독화살은 맞지 않는 것처럼, 몸의 느낌으로는 괴로울지언정 마음으로 괴로움을 만들지 않는다.”라고 역경과 재난을 만났을 때 2차적으로 자신이 만든 불안과 절망을 다스리라 하셨지요. 행복은 초월적 권능자가(신불)가 베푸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얻는다는 게 붓다의 성찰입니다.

11-8 종교와 상관없이 우리들 마음의 바탕에 선한 마음과 타인을 위하고 사회에 헌신하는 마음이 본래 있습니다. 이것은 배워서 얻는 게 아니고 노력하여 이루는 것도 아닙니다. 맹자는 이를 배우지 않고도 알고(양지:良知) 습득하지 않고도 행동하는 능력(양능:良能)이라고 말합니다. 한마디로 (양심:良心) 참된 마음이라는 거지요. 신성이나 불성도 같은 맥락의 표현들입니다. 마음의 본성입니다. 이 본성을 발현시키고 깨워내 쓰는 게 중요하군요. 허공처럼 쓰면 허공같은 마음이 되고 좁게 쓰면 편협한 마음이 되지요. 마음은 무한 가변성이 있어서 그 사용은 전적으로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메시아나 미륵을 기대하는 것 또한 욕심임을 성찰해보아야 합니다. 더 갖지 못한 것에 대한 불만과 분노를 자각하고 이미 가진 것에 대한 감사를 통해 행복하라는 붓다의 가르침이 소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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