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정견(正見)

누가 물었다.

“어떤 것이 참되고 올바른 견해입니까?”

임제가 말했다.

“그대는 다만 언제 어디서나 범부의 경지에도 들어가고 성인의 경지에도 들어가며, 오염된 데도 들어가며 청정한 데에도 들어가며, 모든 부처님 국토에도 들어가며, 미륵의 누각에도 들어가며, 비로자나의 법계에도 들어가서 어디서나 모두 그 국토를 나타내며, 이루어지고 머물고 부수어져 없어지기도 하느니라.

부처님이 세상에 나와서 큰 법륜을 굴리고 열반에 드셨지만, 가고 오는 모습을 볼 수가 없으며, 그 태어나고 죽는 것을 찾아도 마침내 찾을 수가 없다. 문득 태어남이 없는 법계에 들어가 곳곳에서 국토를 다니다가 화장세계에 들어가서 모든 법이 공한 모습이어서 다 실다운 법이 없는 것을 죄다 보느니라. 오직 법을 듣고 있는 어디에도 의지함이 없는 도인이 바로 부처님을 낳는 어머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는 의지함이 없는 데서 나오는 것이니라. 만약에 의지함이 없는 것을 깨달으면 부처도 또한 얻을 수 없다. 만약 이와 같이 보기만 하면 이것이 바로 참되고 올바른 견해라 할 수 있는 것이니라.”

‘참되고 올바른 견해’가 무엇이냐, 정견(正見)을 묻는 질문이 다시 나왔다. 정견이란 팔정도에 처음 나오는 불교 기본교리 용어에도 있는 말이지만 선에서 말하는 정견은 실참(實參)을 통해 얻어진 정안(正眼)으로 보는 견해다. 정법안장(正法眼藏)이라 하기도 한다. 임제는 정견의 물음에 ‘의지함이 없는 도인’을 들어 답한다. 이른바 무의도인(無依道人)은 임제가 내세우는 무위진인(無位眞人)의 또 다른 이름이다. 주체적으로 완전히 독립된 모든 존재의 근원이요 본질 그 자체로서 어디에나 통할 수 있는 초월적인 것이다. 이것이 시공을 장악하고 있으면서 일체 물리적 현상에 구애를 받지 않는다. 생사(生死)에도 자유롭고 열반(涅槃)에도 자유로운 것이다. 한정 지을 수 없고 특정 지을 수가 없다. 이것을 아는 것이 참되고 올바른 견해라고 답해 준다.

정견을 강조하는 선(禪)에서는 지식으로 아는 것을 금기시킨다. 다시 말해 지해(知解)속에 정견이 있는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 종취(宗趣)를 터득해야 정견이 될 수 있다. 흔히 종통(宗通)이라 하는데 사량분별로 이해하는 차원이 아닌 직관적인 통찰이 단도직입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지해를 부정하는 말을 자주 한다. “이 문으로 들어오면 지해를 두지 말라.(入此門來 莫存知解)”고 하였다. 또 황룡사심(黃龍死心)은 “안다는 한 글자(知)가 온갖 화를 불러오는 문(知之一字 衆禍之門)”이라 하였다. 선을 방해하는 모든 화근이 알음아리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다만 이 장의 임제의 법문에는 〈화엄경〉 용어가 나온다. 미륵누각이나 비로자나법계 그리고 화장세계가 〈화엄경〉 용어다. 법신 비로자나는 깨달음 자체를 의인화하여 나타낸 말이다. 선의 견성(見性)이 비로자나 법신을 보는 것이다.

‘의지함이 없다(無依)’는 것은 마음에 어떤 관념도 만들어지지 않는 무념(無念)의 경지이다. 마치 ‘부처를 부처라 하면 부처가 아니다’는 말처럼 어떤 대상을 의식하면 그것에 의지하는 마음이 되어 머무는 바가 되어버린다. 머무는 마음이 되면 자동적으로 집착이 생기게 된다. 불교 수행에서 집착을 끊으라는 말이 각종 경론이나 어록에 무수히 나온다. 임제는 수행을 할 때도 수행에 집착하면 안 된다고 하였다. 도(道)를 닦는다는 생각을 하면 도는 닦아지지 않고 번뇌만 다투어 일어난다 하였다.(若人修道道不行 萬般邪境競頭生)

‘의지함이 없는 것(無依)’을 깨달으면 부처도 얻을 것이 없다 하였다. 이는 무소득의 경지를 말한 것으로 부처가 되면 부처가 없다는 말로 매우 역설적이면서도 묘한 뉘앙스를 풍기는 말이다. 이것이 바른 견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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