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신념의 연기법적 해석

인류 역사상 누가 가장 천재일까? 물론 정답이 없는 질문이다. 하지만 여론조사를 한다면 아인슈타인이 1위에 선정될 것 같다. 아인슈타인은 석사 학위도 없고 석사 학위가 없으니 물론 박사 학위도 없다. 지금은 세계적인 명문대학으로 유명하지만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취리히 공대에 재수해서 입학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특허청에서 공무원으로 일하면서 틈나는 대로 물리학 연구를 하며 논문을 썼다. 처음에는 논문을 인정받지 못하여 기고조차 어려웠지만 어려움 끝에 겨우 인정받고 급기야 세상을 뒤흔든다.

천재 중의 천재 아인슈타인과 세계적인 명문대학의 물리학과 박사과정 학생 중 누가 물리학 지식이 더 뛰어날까라는 질문이 있다. 답은 뜻밖에도 박사과정 학생이다. 박사과정 학생은 아인슈타인을 포함한 기존 물리학자들의 이론 중 오류인 부분까지 파악하고 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오류를 몰랐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 이후에 양자역학이 발달하면서 아인슈타인의 이론 중 무엇이 오류인가를 밝혔다. 우리는 자연과학의 세계에서는 오류라는 게 없다고 생각한다. ‘아인슈타인의 이론에 오류가 있다니 말이 되는가?’라고 생각한다.

진리 인식된 물리법칙
세대 거듭하며 변화해
신앙 세계도 변화해 가
연기법 속 여실지견을

아인슈타인 이전의 물리학의 세계는 뉴턴의 세계였다. 뉴턴 역시 아인슈타인 못지않게 세계 지성사를 흔든 인물이었다. 뉴턴의 이론은 아인슈타인에 의해 수정될 때까지는 세상을 설명하는 오류 없는 법칙처럼 간주되었다. 뉴턴의 이론에 오류가 있었다고 해도 아인슈타인의 이론에 오류가 있었다고 해도 이들은 역사가 낳은 불세출의 천재들이다. 비록 물리학 박사과정 학생은 뉴턴의 오류와 아인슈타인의 오류를 안다고 하더라도 이들의 천재성에 비교할 수는 없다.

사람들은 자연과학의 세계에서는 절대진리라는 게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흔히 ‘진리를 발견한다’는 표현을 쓴다. 진리라는 게 절대적인 실체로 존재하고 우리가 찾아서 발견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마치 광산에서 광부가 보석을 찾듯이 과학자가 진리를 찾아내서 우리 앞에 드러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물리학의 세계에서조차 절대진리란 없다. 과학철학이 지난 수십 년간의 연구에서 밝혀낸 사실은 절대진리란 없고 ‘항상 수정될 수 있는 이론’만이 존재할 뿐이다. 확률적으로 가설검증을 통과한 이론은 언제든지 다시 수정될 운명을 안고 있다.

수학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다. 평행하는 두 직선은 만나지 않아야 평행하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유클리드 기하학의 한 내용이다. 그러나 우주에 가면 이러한 유클리드 기하학은 틀리다고 하니 절대진리가 있다는 생각은 인간의 착각이다.

파란색 돌은 빛을 받아서 파란색 파장만 반사하고 나머지는 흡수하기 때문에 파란색으로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돌의 고유한 성질이 파란색이라고 생각한다. 돌의 표면에 빨간색 파장만 반사하고 나머지는 흡수하는 액체를 칠하면 빨간색으로 보인다. 인간은 무엇이든 지금 보이는 사물과 현상에 절대적 성격을 부여하고 거기에 매달리며 집착한다.

불과 수십 년 전만 해도 공룡은 커다란 몸집 때문에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도태되었다고 생물학 교과서에 쓰여 있었다. 지금 나이든 세대는 모두 그렇게 배웠고 아직도 그렇게 기억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공룡은 지구에 거대한 운석이 떨어져서 멸종했다는 이론이 가장 최근 이론이다. 운석이 지구에 대재앙을 가져오는 바람에 공룡만이 아니라 거의 대부분의 생명이 멸종했다고 한다. 이러한 이론 역시 언제 수정될지 모른다.

자연과학의 세계에서도 절대적인 진리가 없는데 사회과학의 세계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1929년 세계는 경제대공황이라는 경제대란을 겪는다. 그때 케인즈 학파가 등장하는데 그들의 주장은 정부가 재정지출을 증가하면 경제가 회복된다는 이론이었다. 물론 케인즈 학파에 반대하는 시카고 학파는 케인지 학파가 사용한 동일한 통계자료를 가지고 케인즈 학파의 주장에 반대한다. 그들은 경제대공황은 정부의 재정지출로 벗어난 게 아니라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하여 겨우 벗어났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경제대공황이 지난 지 거의 100년이 되어 가지만 케인즈 학파의 주장을 지지하는 학자와 반대하는 학자로 나뉜다. 동일한 통계자료를 가지고 양쪽의 주장이 엇갈린다.

물리학의 세계에서는 이러한 현상은 없다. 뉴턴의 오류를 수정한 아인슈타인을 틀렸다고 말하는 현대 물리학자는 없다. 아인슈타인의 이론에 오류가 있다고 주장한 양자역학 이론이 틀렸다고 말하는 현대 물리학자는 없다. 그러나 사회과학에서는 100년이 지나도 어떤 주장이 맞는지에 대해서 통일된 의견이 나오지 않는다. 정치현상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정치의 세계에 있어서도 절대진리란 없다.

연기법의 세계에서는 당연히 절대진리란 없다. 수많은 요인과 조건이 어우러져 임시 결과를 만들어냈을 뿐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고정되지 않고 덧없다. 따라서 무상하다. 정치의 세계에서도 우리가 목을 매고 매달려야 하는 절대진리란 없다. 항상 변하는 임시적인 결과라는 사실을 알고 우리는 다른 사람과 대화하고 토론하고 합의에 도달해야 한다.

부처님은 잘못된 계에 집착하는 것과 잘못된 견해에 집착하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셨다. 경전에 보면 이러한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수없이 반복해서 강조하신다. 절대진리가 있다는 생각도 잘못된 견해이지만 상대적인 가치를 가진 정책에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하는 것도 잘못된 견해이다. 정치의 세계에서는 절대진리가 없기 때문에 정답은 없으며 나의 주장과 다른 사람의 주장 모두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 받아서는 안 된다. 히틀러는 유대인이 세상의 악을 초래하는 원흉이라고 확신했기에 엄청난 범죄를 저지른 것이다.

정책의 세계에서는 항상 정답이 없다는 생각을 잊지 말아야 한다. 어느 시대 어느 상황에서는 맞았던 해법이 다른 시대 다른 상황에서는 그저 참고만 될 뿐인데 절대 절명의 해법으로 생각하고 매달린다면 재앙이 올 수도 있다. 복지예산을 증액할 것인지 산업단지 개발예산을 증액할 것인지는 주관적 판단이 적용되는 영역이다. 사회과학적 방법을 적용하여 분석을 해도 어떤 학자는 복지예산을 증액해야 경제가 활성화된다는 결론을 도출하고 어떤 학자는 산업단지 개발예산을 증액해야 경제가 활성화된다는 결론을 도출한다. 누가 맞고 틀리다고 판단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사람도 없고 그러한 능력을 가진 학자도 없다. 두 편으로 나뉘어서 논쟁하다가 많은 사람을 설득시킨 측이 국민의 지지를 받는 게 민주국가이다. 독재국가에서는 독재자가 선택하는 정책이 절대진리이다.

경제대공황이 끝난 지 거의 100년이 되어 가지만 아직도 경제대공황을 종료시킨 게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학자들이 두 그룹으로 첨예하게 나뉜다. 복지예산과 산업단지 개발예산을 둘러싼 논쟁도 마찬가지다. 복지예산을 증액하기로 결정했다고 해도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만약 복지예산을 증액한 뒤에 GDP가 증가했다고 하자. 복지예산 증액을 주장한 측은 복지예산의 증액이 효과를 보았다고 말할 것이다. 산업단지 개발예산의 증액을 주장한 측은 복지예산의 증액이 아닌 다른 요인을 지목할 것이다.

우리는 가끔 신념을 가지고 목표에 매진하는 사람을 칭송한다. 하지만 불교교리에 비추어보면 이러한 사람은 아주 골치아프고 문제가 많은 사람이다. 자칫하면 신념을 신주처럼 받들고 목표에 목을 매기에 다른 사람의 의견은 들으려고도 하지 않고 심지어 다른 의견에 적대적이 되기도 한다. 상황이 변하면 정책도 변해야 하는데 처음의 고집을 꺾지 않으면 불굴의 의지를 가진 신념의 화신으로 착각할 일이 아니라 어리석은 거다.

절대진리가 없는 연기법의 세계에서도 우리가 끝내 버리지 않고 지켜야할 소중한 규칙들이 있다. 나와 너가 다르지 않고 나에게 너의 요소가 있고 너에게 나의 요소가 있다면 우리가 타인에 대해 선을 긋고 분리하여 생각해서는 안 된다. 나에게 세상의 요소가 있고 세상에는 나의 요소가 있다. 나에겐 한국이라는 세상이 들어와 있고 대한민국에는 한민족이라는 요소, 그리고 나와 너라는 요소가 있다. 우리가 남과 분리되고 세상과 분리되어 존재하는 독립적 실체가 아니라면 우리가 지켜야 할 소중한 법칙은 저절로 도출된다.

부처님의 계율은 모두 우리가 다른 사람과 세상 속에서 살아가며 지켜야 할 소중한 법칙이다. 다른 사람을 죽이지 않고 도둑질하지 않고 거짓말하지 않는다는 것은 절대진리와는 차원이 다른 윤리 규범이다. 따라서 정치의 영역에 있어서도 독재권력이 인권을 침해하고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함부로 훼손할 때 우리는 분연히 항거해야 한다.

절대진리가 없다고 해서 모든 게 부질 없다는 허무주의에 빠지는 것도 불교의 관점에서 보면 바람직하지 않다. 절대진리가 없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반대의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절대진리가 없기 때문에 우리는 수시로 변하는 요인과 조건에 대한 정보와 자료의 수집에 노력해야 한다. 절대진리가 없기 때문에 요인, 조건, 정보, 자료를 있는 그대로 알고, 있는 그대로 보는 여실지견이 필요하다.

해탈하면 어떤 징표를 볼 수 있을까? 경전을 보면 있는 그대로 알고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다고 했다. 불교 수행자가 정치현상을 있는 그대로 알고,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한다면 깨달음에서 한참 멀리 있는 것이다. 정치현상을 여실지견할 수 있어야 불교의 지혜가 세상을 비로소 비춰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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