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는 놈이 글쎄, 이것 따지고 저것 따지고 이러겠습니까!

여러분 앞에 어저께도 얘기했지만 우리는 일거삼득으로서, 예전에 무(無)의 법, 유(有)의 법 이것을 따로따로 배우면서 나중에 무루와 유루를 한데 합쳐서 법화경으로 설했던 부처님의 그 뜻을 가만히 여러분이 생각을 해 보세요. 지금 유의 법과 마음의 무의 법 그걸 합쳐 가지고 지금 여러분이 사용하는 생활이 어떠한 것인가? 그 생활 자체가 바로 법화경이라, 응? 그러니 이거를 공간을 두고, 이게 마디는 있으나 속에 통하는 것은, 각각 이게 막아져 있는 게 아니라 다 똑같이 통해져 있으면서 거죽으로 이름만 마디가 세 매듭이 있는 거나 똑같은 거라.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일심에 들게 한다면” 하는 요것이 마디만 있다 뿐이지 한데 통해서 한 일 자로 본다면 그냥 일심이야, 일심. 모든 것이, 삼계의 뜻이 일심에 들었다 이 소리야.

사람은 죽으나 사나 밀고 나가는 인내가 있어야 하고
믿음이 있어야 하고, 그 사랑과 애절한 그 인간미가 있어야 돼.
정직한 인간미!

거북하게 생각하지 말고 우리가 어저께 얘기한 거와 마찬가지로, 나는 여러분에게 10년 20년 30년이 가깝도록 여러분에게 그렇게 말을 해 줬는데도 불구하고, 생활면이나 몸을 끌고 다니는 건강면이나 또는 가정 문제라든가 사회적인 문제라든가 모든 분야에서 여러분이 활용을 하고 다니는데 그것은 첫째, 참선이 될 것이며 자기를 찾을 것이며 둘째, 그대로 활용이 그대로 여여함이라는 거, 그러면 그대로 공덕이 된다는 거. 이것이 철저하게 그대로 참선이요, 그대로 우리 생활이 여여함인데도 불구하고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어떤 때는 답답하니까 말 자체, 악센트가 곱게 나가지 않고 그럴 때가 많아요.

그런데 어저께 얘기한 것은 이 꼭지가, 이게 문이라고 해요, 사람마다. 항상 이런 말을 하지만, 우리가 저 문을 열고 들어오면 안에도 꼭지가 있고 바깥에도 꼭지가 있는데 이건 한데 통했어, 막히질 않고. 이것이 막히질 않았기 때문에 바깥에서 열어도 안으로 들어올 수 있고 안에서 열어도 바깥으로 나갈 수 있는 거야. 만약에 이게 통과가 안 된다면 열고 나갈 수도 없어, 막혀서.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 현관문을 열어도 그렇고 방문을 열어도 그렇고 양면이 다 통해 있어서 연다. 그래서 안에서 바깥으로 굴리는 거는 안에서 그걸 열어야만 되는 거고, 바깥에서 찰나찰나 보이는 것을, ‘버릴 거는 버린다’ 이러는 것이 뭐냐 하면 찰나찰나 보이는 것에서 내가 쓸 만한 거를 건져서, 예를 들어서 흘려 버릴 건 흘려 버리고 ‘이건 이렇게 옳다’ 할 때는 벌써 여기 문을 누르는 거나 마찬가지야. 안으로 놓는 거야, 이게. 이게 잠재해 있는 내 원자력 발전소에다가 바로 굴리는 법이야.

그러면 물도 우리가 약물이다 한다면 맹물과 어떠한 물건과, 만약에 삼과 대추를 가공해서 졸인다면 이건 삼물이 돼 버려, 응? 그런 거나 마찬가지로 이 물도 곱게 물대로만 있는 게 아니야. 만약에 여기서 가공만 한다면 이것이 삼물이 될 수도 있고 가공을 안 하면 그냥 맹물이라 이거야. 그러니까 우리의 마음이 그 맹물을, 즉 에너지가 있게끔 에너지로 만들어서 우리가 사용하는 거라.

이것은 세 가지를 한꺼번에 합해서 내가 활용하는 데에 의의가 있는 거지. 그렇게 활용하면서도 자기가 침착하게 지켜보는, 자기가 해 놓고 자기를 침착하게 보는 그러한 물러서지 않는 믿음, 그거를 갖는다면 우리는 참 빠르게 공부할 수 있다. 빠르게 나를 발견할 수 있고, 발견함으로써 직접 뛸 수가 있는 거예요. 어린애가 태어나면 자라야 하지마는 이것은 발 하나 떼어 놓으면서 벌써 내가 이 포착을 했으니까 아주 용이 됐으면 물 얻기가 십중팔구 좋단 말입니다.

그래서 어저께도 말했듯이, 지능이 발달이 되면 결국은 지능으로 인해서 물리가 터지고, 물리로 인해서 지혜로운 그 일체 만법을 그냥 활용할 수 있다. 이 지혜로운 것은 내 폭이 넓고 그 마음의 지혜가 무기가 돼서 그대로 씀씀이를 쓰는 것이니 찰나찰나 닥치는 거를 마다 않고, 가는 거 잡지 않고 이러면서 내가 유유히 써 나가는 거, 그대로. 그런 것을 가지고서 우리가 여여함이라고 그러고 걸림이 없다고 그러고, 자유인이라고 그러고 부처라 그러고 보살이라고 그러고 이러거든.

그러니까 역대 조사의 그 마음도 역대 부처의, 사대 성인들의 마음도 모든 것이 그 차원에 따라서 차원이 낮고 높고 이것뿐이지 생명은 다 똑같은 거라. 생명은 다 똑같은데 이 도리를 모르기 때문에 차원이 낮은 거라. 낮기 때문에 중생이라고 하는 거지. 생명은 누구나가 다 똑같은 거지.

그래서 불성이 하다못해 개에게도 있다 하는 거는 우리가 생명이 있다는 얘기지. 생명이 존재하기 때문에 성품으로 인해서 육신이 움죽거리고 말도 하고 이렇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요것을 요렇게 놓고서 우리가 이 안팎이 없는 보당이 여기 안에도 있고 바깥에도 보당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바깥에서 오관을 통해서 들어온 것을 여기서 안으로 굴리고, 안에서 바깥으로 내놓을 때는 안의 보당이 눌러지는 거야, 자동적으로, 그건.

그렇게 된다면 이 줄이 벌써 인간의 몸에도 척추에 있는 이쪽으로나 심장 이쪽, 오장육부 이쪽으로는 이 세포가 둥글게, 즉 말하자면 고구마같이 그렇게 된다고나 할까? 그러한 모형으로다가 이것이 법망이 쳐져 있지마는 그런 게 아니라면 딴 데서 들어오는 세균이나 어떠한 그것을 막지 못해요. 그것이 법망이라, 우리한테도.

그러면 다른 세포에 있는 건 엑스로써 삼각형을 이루면서 이것이 세포가 나간 거거든. 그것은 왜 그런가? 모든 면에 있어서 영계라든가 또는 무위에서 안 보이는 문제들, 유전성이나 또는 인과응보라는 거나 이러한 모든 문제를, 이것을 제재할 수 있는 그런 세포라. 여기는 울타리나 똑같아. 그런데 울타리는 그냥 부수면 부서질 텐데 울타리 아닌 울타리라. 즉 말하자면 무의 통신기를 여기에다가 다 접근시켜 놓고 전자력도 여기에 다 있는 거라.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모르지마는 다 막고 있는 거라.

그렇기 때문에 이 공중에 수많은 생명들이, 보이지 않는 생명들이 많아도 그걸 제재하고 나가는 거라. 그런데 우리가 이 도리를 모른다면 딴 데서 어떠한 영계가 들어오든 딴 데서 깨친 사람이 몽둥이를 들고 한번 때려도 그걸 막지를 못하는 거야. 주인이 없기 때문이라. 빈집이 돼서. 그러니까 아무나 들어왔다 나갔다 들어왔다 나갔다 해도 도대체 이거는 감을 잡을 수가 없는 거야.

이것은 본래 있는 것을 말하는 거지 누가 새삼스럽게 말하는 게 아니다 이거야. 안팎이 뚫린 이 빗장은 양면이 다 빗장이 있는 거야, 고리가 있듯이. 그런데 맞뚫렸어, 이게. 그런데 이게 둘이 아닌데 우리가 안에서 열려니 이쪽에도 있어야 하고, 바깥에서 열려니 이쪽에도 있어야 하겠기 때문에 이거는 한쪽은 색이요, 한쪽은 무루의 나, 내놓을 게 없는 ‘참나’라.

그렇다면 ‘참나’로부터 ‘가나[假我]’로다가 이렇게 가르치려고 내보내고 또 ‘가나’가 안으로 ‘참나’에게 들이고 하는 것을 항상 반복한다면 거기에서 진짜 나오는 거라. 그래서 무루에서 유루를 가르치고 유루에서 무루를, 즉 말하자면 섬기면서, 상구보리 하화중생이라는 말이 있듯이 섬기면서 거기서 스승으로 삼고 배우는 거라, 응? 왜 스승으로 삼아야 하느냐 하면 자기의 안에 있는 참자기는 수없는 억겁을 통해서 자기를 이끌어 왔다 이거야. 그리고 보이지 않는 참자기이기 때문에 수많은 참자기와는 항상 한자리를 하고 있는 거기 때문이다 이거야.

그래서 우리가 이런 줄이, 내가 어저께 얘기했듯이 요것을 자세히 파악해야 하는데, 이건 내가 자세히 얘기할 수가 없어. 그러니까 대충 이렇게 얘기를 해도 이 벽을 치면 봇장이 울려야 해. 여기에는 수많은 법 줄이, 이 무전통신 줄이 이렇게 있다 이거야. 무전통신 줄 하나만 있는 게 아니라 여기는 전자력과 무전통신 줄과 천안 줄과 천이 줄과 타심 줄 또는 숙명 줄, 신족 줄 이것이 천판 동시에, 동시에 이렇게 있다 이거야. 뭐를 하나 하려도 내가 보고 듣고 생각해서 내가 이게 가망이 있다 할 때 책정을 하지, 그렇지 않으면 안 하거든. 여러분 다 그렇죠?

그러니까 동시에 눈 나가는 데 귀도 나가고 귀 나가는 데 생각도 나간다 이거야. 그러니까 이게 동시에 오관을 통해서 이 한 모습에 전자력이나 통신력이나 이런 것이 여기에, 또 영사기나 이런 것이 여기 포함해서 한 팀, 팀이 있다 이거야. 그러면 책정기다, ‘내가 정한다’ 이러는 거는, 즉 말하자면 이 원자력 발전소에서 누진으로 이렇게 연결됐다 이거야. 그렇기 때문에 오관을 굴릴 수가 있는 거지.

그래서 이것이 이렇게 다섯, 다섯, 다섯 이렇게 있지마는 책정기에서 부리는, 다섯 개에 종합된 줄은, 왜, 요새 전깃줄 속에 여러 가지 넣고 이렇게 한데 합치지? 그거와 똑같아, 응? 그렇기 때문에 거기에서만이 이게 오르락내리락 오르락내리락 하면 이 많은, 다섯 개씩 줄을 넣은 것도 있고 일곱 개씩 줄을 넣은 것도 있고 이러는데 여기에서 보당이 다 거기에 통하게 돼 있는 거야, 이게, 동시 동시에.

그렇기 때문에 하나만, 만약에 저 달나라로 통신을 했다 한다면, 예를 들어서 일도 없는데 괜히 통신을 하는 건 아니야. 예를 들어서 내가 무뜩 어떠한 생각이 났을 때 그건 상대가 되는 거야. 그럴 때에 이것은 ‘아하, 거기?’ 하면 이 다섯 개의 줄, 하나의 줄 속에 다섯 개씩 여섯 개씩 일곱 개씩, 이 줄이 포함해서 들어가 있는 거라, 응? 포함해서 들어가 있기 때문에 동시에 그 달을 위에서 동시에 보는 거야. 동시에 듣고 동시에 알고, 동시에 보고 동시에 책정을 하고, 거기가 전자에는 어떻고 지금은 어떻고 이런 것을 동시에 보는 거. 다섯 가지 문제를, 동시에!

그것뿐만이 아니라 우리 살아나가는 생활 속에서 항상 안으로 들이고 내고 하는, 안팎에 있는 이 보당만 가지고 씀씀이를 써 본다면, 자기가 하고 지켜보고 그렇게 씀씀이를 쓴다면 이게 유년 가다 보면 이게 참선이요, 나 찾는 길이요, 나를 발견하는 아주 쉬운 길이요, 또 그 대신에 내가 몸을 이끌어 가는 데도 아, 세 치만 알아도 내 몸은 건강하게 끌고 갈 수 있는데, 이거 건강하게 못 끌고 가?

그래서 나를 갖다가 ‘아이 참, 귀찮다. 좀 편안하게 조용히 있어야겠다.’ 하면 아무 생각 없이 몸이 어르르르르 하면서 아주 딱 그냥 노그라지는 그런 편안한…, 왜, 마취하지? 그러면 편안하게 그냥 있듯이 좀 저거 하면 그렇게도 편안히 좀 있다가 또 저거 하면 ‘아, 나 일어나야지.’ 그러면 그대로 생기가 날 수 있고 이렇게 자유자재할 수 있게끔도 되는 것이 바로 여기의 문제다 이거야. 그 문제도 되지마는 자기의 모든 것이 일어나고 가라앉고 하는 거를 자기가 조절할 수 있는 자유권을 가진 거야, 이게, 응?

여러분이 자식들을 기르고 남편을 섬기고 또 사회에 나가서 일을 하고 그러는데…, 우리 스님네들도 그렇고 다 그래요. 이 도리를 모르면 항상 배가 고프고 항상, 허허, 본래 자기가 가지고 있는 거를 못 쓰기 때문에 배가 고픈 거지. 그러니까 항상 배가 고프고 항상 거리로 다니게 되고. 뭐, 집에 들어가 자질 못해서 거리로 다닌다는 게 아니야. 집이 있어도 그건 거리 노중에서 돌아다니는 거나 마찬가지야. 내 집이 없고 내 주인이 없고 그렇게 해 가지고는 만날 얻으러 다니지 않으면 안 되고, 노예 문서를 항상 짊어지지 않으면 안 돼. 노예 문서를 태워 버려야 되지.

그리고 자기가 주인 노릇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야만이 그것은 중이라고 해. 중! 검지도 않고 희지도 않은 그 심월, 심월봉에서 불이 그냥 번쩍 나면, 그냥 번개같이 번쩍 나면 모든 것이 거기에 따라서 붙는 대로 타 버리는 거라. “붙는 대로 타 버리니 무엇이 붙을 게 있고 뗄 게 있으랴! 그러면서도 여여함이 있으니 어찌 좋지 않으랴!” 이런 거라.

여러분이 “왜 그러면 스님은 깨달아지게끔 빨리 말씀을 해 주시지 그러느냐?” 그러지마는, 하하, 그건 그렇게 되는 게 아니야. 자기가 밥을 먹어 보고, 한 숟가락 먹어 보고 두 숟가락 먹어 보고 세 숟가락 먹어 보고, 이것도 먹어 보고 저것도 먹어 보고 그럴 때에 맛이 다 달라. 어떻게 한 가지 맛만 보고서 그것을 다 알았다고 볼 수 있겠느냐 이거야, 수천수만 가지인데.

그러면 한 가지 먹어 보고 ‘아, 이건 쓰더라.’ 쓴 것도 그놈이 하는 거고 단 것도 그놈이 하는 거고 그렇게 하다 보면 어느 땐가 세 가지가 포함해서 그냥 몰락 그게 되는 거지. 된다 할지라도 알았다는 그 생각의 자존심과 또는 아만, 아상, 욕심, 착 이런 거를 다 떼고 겸손하게, 생활을 하면서 자기는 언제나 겸손하게 하면서 번연히 떡그릇인 줄 알면서도 엎드러져 봐라 이거야. 그럼 거기서 진의가 나온다 이거야. 내가 높다고만 세워 놓으면 아무리 배우려도 높게 있기 때문에 얕은 데를 뛰어들어 갈 수가 없어.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런 생각을 해요. 그거 말하고 나서 얘기해야겠군. 그래서 여기는 지능 줄이라든가, 어저께도 얘기했듯이 여기는 우주 줄도 있고 지능 줄도 있고 지혜 줄도 있고 참 그, 물리가 터지는 줄도 있고 뭐, 상상도 할 수 없이 많아. 우리가 가난하면 가난한 줄도 있고 또 용궁 줄도 있고 또 관세음보살 줄도 있고 지장보살 줄도 있고 다 있어. 여기는 뭐, 없는 게 없이 있어, 이 줄이! 여기 이 보당에 전부 달렸다 이거야, 안팎 보당에. 안으로는 안으로대로 쓰면서 바깥으론 바깥에대로 여여하게 쓴다 이거야. 안팎을 쓰지 못하는 사람에 한해서는 중이라고 할 수 없어. 옷을 입어서 중이 아니야. 머릴 깎아서 중이 아니고.

우리는 한 사람 한 사람 건지고자 해서 이 도량을 만들어 놓은 게 아니야. 이것은 어디까지나 방편이야. 만약에 중이 돼 가지고 한 도량에서 요 절간을 마련해 가지고 만약에 이걸 운영하고 먹고살기 위함이요, 남한테 절이나 받기 위함이요, 목탁이나 치기 위함이라면, 허허, 차라리 이런 노릇을 하지 않는 것이 당당할 거야.

그래서 나는 항상 이렇게 생각을 해. 여기 그렇게 성스러운 석가모니 부처가 계신다 해도 난 어쩐지 말이야, 바람과 같이 스쳐 가는 그 한때, 바람과 같이 스쳐 도는데, 훌떡 스쳐 돌면 또 딴 것이 되고 훌쩍 스쳐 돌면 딴 게 되고 하는데 뭐를 부처라고 세우고 뭐를 눈 밝은 사자라고 치고 또 눈먼 개라고 치느냐 이거야. 도대체 나는 그것이…. 그러니까 그렇게 하면서도 눈먼 개는 개고, 눈 밝은 사자는 사자야.

그런데 나는 때에 따라서 어느 누구든지 예를 들어서 “육조를 쳐라, 신수 치듯이.” 그러면 그것은 서로 간에 말동무라도 좀, 이쪽에도 그렇고 이쪽에도 그렇고 이렇게 이렇게 해 보는 것도 재미있는 이치가 있다고. 없는 건 아니야. 곧바로 탁 해 버리면 말이 없어지거든. 안 그래? 그럼 서로 놀기 위해서도 그것을 비스듬하게 돌리고 이렇게 돌리고 그런다고. 그것도 재밌는 거라고. 또 그렇게 해 놓고는 빙긋이 웃고…. 그럭하다 보면 이 봉오라지에다 딱, 그냥 그쪽에다 탁 해 버리면 그때에 가서야 ‘아이고, 참!’ 하고서 그때는 인제 없어지는 거지.

하지만 사람사람이 그것부터 알아야 돼. 눈 뜬 사자라 할지라도 눈 뜬 사자 노릇을 해서는 안 돼. 왜? 눈 뜬 사자라도 허점이 있을 때가 있어. 그렇기 때문에 항상 허점을 노리는 그 왜, 쪼끔 저거 해 가지고 괜히 몽둥이나 들고 돌아다니는 이런 사람도 있거든. 그렇다고 몽둥이 맞을까 봐 그러는 건 아니야. 그런 걸 다…. 예를 들어서 본래에 이 달은, 본래 달은 있되 달은 없는 거야. 본래 없는 달인데 어떻게 몽둥이가 거기 있겠어? 붙을 게 뭐 있겠어? 본래 없기 때문에 그 또한 본래 없는 거다 이거야.

그러니 우리 자체가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 참선이라는 거, 즉 행선이라는 거, 이름 붙이기에 달린 거지 그게 다 이름이라고. 여러분도 내가 말하는 거를 천차만별로 아마 받아들일 겁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하고 어떤 사람은 저렇게 말할 테죠. 그런데 그것이 깨달았든 깨닫지 않았든 요렇게 빠르게 해서 이것을 이렇게 활용해 가면서 참선이고, 자기를 발견하는 데에 요렇게 요소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게 그렇게 더디다는 거라, 응?

이것도 더딘데 야, 줄줄이 줄줄이 이 바깥에 있는 세포의 모든 것까지 다 배우려면 일생을 통해도 다 못 배워. 이 바깥에 있는 학의 문제라든가 경전이라든가 이런 거 모든 걸 배우려면, 여기 걸 다 배우고 나서 보면 벌써 이 몸은 없어져 버려, 응? 그래서 나는 죽어서 천당에 가려고 이거 하지 않아. 난 내가 지금 알고 지금 하기 위해서지 내일 생각 안 해. 난 본래 그런 사람이야.

그래서 이걸 제껴 놓고 봐도 제껴 놓을 게 없고, 바로 봐도 바로 놓은 게 없어. 야, 어떻게 보면 거꾸로 섰고 어떻게 보면 바로 섰고, 그러니까 바로 선 것도 없고 거꾸로 선 것도 없어. 그러니 우리가 무루의, 무(無)의 법을 그대로 활용할 수 있는 거지. 어저께 저녁에도 미국에서 “스님, 이 머리가 이렇게 정상이 아닌데 이걸 좀 돌봐 주세요.” 하고 전화가 왔지만, 만약에 인간으로서의 사랑, 의리와 그 참다운 둘이 아님을 내가 몰랐다면 어찌 그런 사랑과 의리가 있으며 내 몸과 같이, 내 아픔과 같이 생각이 될 수 있었을까? 그리고 거기서 요구하는 대로 내가 어떠한 병이라면 의사가 돼 주고 가난하다면 관세음이 돼 주고 어떠한 판결의 문제가 있다면 판사가 돼 주고 이럴 수 있었을까?

그러니 “당신은 밀이면 밀, 보리면 보리라 이렇게 가려서 말을 해라.” 할 때 나는 “한 찰나에 찰나 고개에서 보리 맛도 좋고 밀 맛도 좋은 것을, 이 둘을 어떻게 가려서 말을 할 수 있겠느냐? 이것도 좋고 이것도 좋더라.” 그럼 두루뭉수리가 아니냐? 그런데 이거 밀 맛 보고 난 뒤에는 벌써 이건 없어진 거고 이건 보리 맛 그냥…. (녹음 안됨) … 돌아가는데 어떤 거를 겨냥해서 이게 맛이 좋다 할까? (중략)

사람은 죽으나 사나 밀고 나가는 인내가 있어야 하고 믿음이 있어야 하고 그 사랑과 애절한 그 인간미가 있어야 돼. 정직한 인간미! 난 솔직한 얘기지 사람사람이 다 그렇다고는 볼 수 없겠지마는 다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봅니다. 누구나가 자기 마음이 부처님 마음이요, 자기 마음이 아는 것을 우주간 법계에서 아는 거라. 진실되고 진실치 않고는 자기가 너무 잘 알기 때문에 우주간에도 알고 남들도 알아요. 속이려야 속일 수가 없어! 여러분이 그 도리를 안다면 속이려야 속일 수가 없다니까!

그러니 너무나 멋진 이 우주 삼천대천세계의 법망으로 인해서 우리가 그 법망에, 수없는 그, 갈갈이 헤어날 수도 없는 법망에 우리의 근원이 거기에 다 연결이 됐다는 그 사실을 아신다면 참 너무도 묘법이요, 그렇게 광대무변한 법이 없는 거예요. (중략)

언젠가 한번 사월 팔일이 돼서 “이건 촛불이 하나도 없구먼!” 했더니 촛불이 왜 없느냐는 거야. 허허허. 그런데 촛불 켠 사람은 하나밖에 없는 거야, 천 명 이상이 켰는데. 이거 되겠어요? 그런데 올해 촛불 켠 걸 보니까 아, 많더군그래. 응? 허허허…. 참 기분 좋았어요. 저 산을 바라보니까, 등을 내려다본 게 아니라 저 산을 바라보니까 그 산봉우리에 화광이 비추더구먼그래. 마음들이 한데 모아져서 봉화불이 켜지듯이 이렇게 켜지니 얼마나 좋을까? 넋을 잃고 바라본 것도 바로 내 거울이라. 여러분의 마음의 거울과 내 마음의 거울과 같이 동시에 반사가 되기 때문이라.

그리고 여기 이렇게 모두 있지만 모든 사람들이 일일이 따져. 비구니 비구, 무슨 중생 부처, 보살 법신 뭐, 요런 걸 따지기 때문에 그게 막혀서 공부를 못해. 그 일일이 막히는데 어떻게 공부를 하누. 이것이 색과 이름에 자꾸 끄달리기 때문이라. 그걸, 죽어야 되는데 안 죽어. 죽으라고 죽으라고 그래도 안 죽어. 죽는 놈이 글쎄, 이것 따지고 저것 따지고, 여자 따지고 남자 따지고 이러겠어? 죽은 놈이!

그러면 오늘 이걸로써 마치겠습니다.

※위 법문은 대행 스님께서 1986년 6월 2일 일반법회에서 설법하신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한마음선원 홈페이지(www.hanmaum.org)에서도 같은 내용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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