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혜고도 수놓은 아름다운 ‘신심’?
칭장열차 타고 칭하이성에 입성해
겔룩파의 6대 사원인 ‘塔콱寺’ 참배
기도와 오체투지 티베트人에 ‘감동’

타얼스 입구의 탑조들 모습.

우리는 티베트 라싸를 떠나 칭장열차(靑藏線)를 타고 칭하이성(靑海省)의 성도인 시닝(西寧)으로 향한다. 최대 해발고도 5072m에 평균 4500m로 세계에서 가장 고도가 높아 하늘길이란 의미의 ‘티엔루(天路)’로도 불린다.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했으나 지난 2006년 개통되어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라싸에서 시닝까지 칭장열차로 꼬박 24시간이나 소요된다. 가는 길에 설산의 풍광과 야크, 양떼들, 나무초(納木措)호수, 황하와 장강의 발원지인 곤륜산, 해발 5,020m의 당고라 고개, 천산산맥과 청해호의 장관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순례 대중은 티베트의 추억을 도란도란 이야기하며 모두들 행복한 모습들이다. 

옛날에는 꺼얼무에서 자동차를 전세를 내어 여행허가서 없이 2박 3일에 걸쳐 모험과 도전을 해야만 겨우 라싸에 갈 수가 있었다. 필자는 그 험난한 길을 26시간 만에 주파한 적도 있었다. 그 때에 비하면 칭장열차의 운행은 그야말로 천지개벽이자 상전벽해가 아닐 수 없다. 

시닝역에 내려 곧바로 타얼스(塔콱寺)로 향했다. 티베트 불교 겔룩파의 6대 사원 중의 하나로 명대 1560년에 창건 되었다고 한다. 대전(大殿) 앞에는 쫑카파(宗喀巴)가 탄생한 것을 기념해 세운 12m 높이의 다인탑(大銀塔)이 있다. 전설에 의하면 쫑카파를 낳은 어머니가 태반을 묻은 곳에 보리수가 자랐단다. 보리수에는 10만 장의 잎이 자랐고, 그 잎마다 사자후불상 10만 존(尊)이 나타났다고 한다.

또한 불경을 짊어지고 온 백마가 숨을 거둔 것을 기념한 유적이 인상적이었다. 아울러 현 14대 달라이라마가 청해성 출신인지라 환생이 확인되어 라싸로 가기 전에 잠시 이곳에 머물렀다고 전해진다.

대전에서 순례를 마치는 회향식과 함께 천축구법승과 대당유학승, 그리고 서역개척자인 고선지와 흑치상지 장군을 기리는 추모제를 함께 봉행하였다. 사원 앞의 백탑군을 돌며 대중 스님들이 탑돌이를 하는데, 오체투지하는 티베트 인들과 소대 앞에서 간절히 기도하는 여인네의 염원이 눈물겹도록 아름답다.

타얼스 참배 후 시닝에서 비행기를 이용해 충칭(重慶)으로 돌아왔다. 모처럼 쾌적한 호텔에서 목욕과 함께 공양을 하고나니 티베트에서의 고난과 피로가 일시에 풀리는 느낌이다. 새로운 마음으로 근교의 명승인 대족석굴로 향했다.

다쭈(大足)석굴은 쓰촨성(泗川省) 대족현에 40여 개소로 골고루 분포되어 있는데, 이 중에 북산과 바오딩산(寶頂山)의 마애조상들이 가장 유명하다. 예로부터 중국에는 ‘북쪽에는 둔황, 남쪽에는 다쭈(北燉煌 南大足)’라는 말이 생겨났을 정도로 석각예술의 정수로 일컬어진다. 그런 까닭에 하나하나 사람의 손으로 만들었다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방대한 규모에 정교하면서도 섬세한 새김, 불교 예술사적인 가치로 인해 다쭈석각군은 199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세계불교 문화재의 보고라 할 수 있다.

대족암각은 바오딩산 인근에 9세기부터 13세기에 걸쳐 만들어진 불교 암각군이다. 당대 758년 건립된 이 석각은 당말부터 청대에 이르기까지 조성된 6만여 기의 불상이 100여 곳의 석각군에 흩어져 있다. 말 그대로 도시 전체가 석각에 둘러싸인 석각의 고장인 셈이다. 특히 바오딩산(寶頂山) 석각은 남송의 승려 조지봉(趙智鳳) 스님이 불교를 통해 만인이 고통없이 행복하게 사는 불국정토를 만들고자 1179년부터 1249년까지 70여 년에 걸쳐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한 스님의 신심과 원력이 얼마나 위대한 작품과 변화를 이끌어 내는가를 보여주는 실례라 할 것이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70평생을 오직 부처님을 조성하며 진력할 수 있다는 것은 실로 불가사의하고 희유한 공덕이 아닐 수 없다. 스님의 동상에 참배하고 찬탄과 경외의 마음을 담아 향 한 자루 사르고는 우러러 그 자비덕화를 찬탄한다. 

우리라면 정녕 그렇게 할 수가 있는지, 도무지 알 수도 자신할 수도 없다. 그러나 이른 새벽  어둠을 뚫고 첫 새벽을 열며 길을 나서는 사람이 있다. 그렇듯이 누군가는 그 불가능한 일들을 마침내 성취하고, 새로운 길과 희망, 그리고 깨달음의 역사를 창조하는 법이다. 우리 자신이 마땅히 그래야만 한다.

중국의 대문호인 루쉰(魯迅)은 그의 소설 〈고향〉에서 “희망이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태초에 땅위에는 길이 없었다. 한 사람이 먼저 가고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도 그와 같이 최초(最初)이자 최고(最高)가 될 수 있기를 매 순간 서원하고 실천해야만 할 것이다. 

거대한 부처님 열반상 조각아래 아난이 눈물 짓고 있는 모습을 바라본다. 지금, 이 순간에도 불보살님께서는 하염없이 자비와 연민의 눈물을 흘리고 계시리라. 하나는 이를 조성한 지봉(智鳳)스님의 신심과 원력에 감격해 흐르는 눈물이고, 다른 하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 것도 안하는 지금의 스님들이 안타까워 흐르는 눈물일 것이다. 

우리 순례 대중은 불보살들의 그 눈물의 의미에 대해 과연 어떤 원력과 실천으로 답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각자의 삶과 수행에서 혹은 저마다의 수행자다운 위의(威儀)와 행해(行解)로써 지금 걸어가는 자신의 발자국이 뒤에 오는 이의 사표(師表)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고 한다. 무릇 수행자는 그 뜻이 넓고 굳세야 하나니, 그 임무는 무겁고 가야할 길이 멀기(任重道遠) 때문이다. 부디 능히 만 권의 책을 읽고(讀萬卷書), 만리의 길을 감으로써(破萬里程) 그대만의 새로운 길과 희망, 그리고 깨달음과 함께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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