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깨달음과 닦음 ②

길상사 창건 9주년 법회 후 대중들과 함께 하는 법정 스님의 생전 모습. 법정 스님은 우리 사회와 이웃들과 함께 나누고 자비를 실천하는 것이 불교의 수행이라고 강조했다. 

“원각도량하처(圓覺道場何處) 현금생사즉시(現今生死卽是)”

해인사 법보전 기둥에 걸려 있는 법문이다. 석두 스님이 깨닫고 나서 지었다고 알려진 글로 스승인 남전 스님이 나무에 새겨 걸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흔히 ‘원각’을 깨달음이라 풀어 “깨달음은 어디 있는가? 나고 죽는 이곳이 바로 그 자리”라거나 “깨닫는 도량은 어디 있는가? 나고 죽는 이곳이 바로 그곳”이라고 푼다. 그러나 이 말씀을 볼 때마다 전율이 흘렀다는 법정 스님은 ‘종교 본질이 무엇이고 그 설 자리가 어디인가?’라고 받아들여 “부처님 계신 곳이 어디인가. 지금 그대가 서 있는 바로 그 자리!”라고 풀었다. 거슬러 올라가면 “한 생각 맑게 일으킨 마음이 곧 도량”이라는 보조 지눌 스님이 남긴 말씀 줄기에 가닿는다.

‘원각’에 대한 스승 가르침
‘나’와 ‘너’ 구분없음서 시작
참회서 시작하는 ‘돈오점수’
평등사회 구축의 밀알되길

“부처님 계신 곳이 지금 그대가 서 있는 바로 그 자리”라는 말씀을 “하느님이 늘 나와 함께 하신다”란 다른 종교 말씀처럼, 부처님이 늘 나와 함께 하신다는 말로 받아들이고 말면, “참다움을 드러내 스스로 빛내라”하는 부처님 뜻에서 십만팔천리 벗어난다. 스승이 세운 절 길상사 일주문에 “신광불매 만고휘유(神光不昧 萬古徽猷) 입차문래 막존지해(入此門來 莫存知解) 어디에도 견줄 수 없이 거룩한 빛이 어둠을 헤치고 오래도록 빛나니, 이 문에 들어서면서 알음알이를 두지 말라”는 말씀이 적바림 되어있는 까닭이다.

증오란 무엇인가?

우리는 깨닫는다고 하면 흔히 형이상, 경험을 뛰어넘어 그 무엇인가에 가닿아야 하는 것으로 오해하곤 한다. 그러나 세종은 불경을 우리말로 풀면서 ‘깨달을 각(覺)’을 ‘알음’으로, ‘헷갈릴 미(迷)’를 ‘모름’으로 옮겼다. 쉽다. 너무 쉬워서 왠지 싱겁다고 여기는 분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아는 것’이란 무엇일까? 머리로 헤아리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헤엄칠 줄 안다는 말과 운전할 줄 안다는 말을 떠올려보면 금세 와 닿을 것이다. 박태환 선수가 헤엄치는 것을 분석해 학위를 딴 사람이 있다고 하면, 그 사람은 박태환 선수처럼 헤엄을 잘 칠 수 있을까?

성철 스님이 증오와 해오를 가르면서 “밥 이야기를 아무리 해봤자 배가 부르지 않고 밥을 먹어야 하듯이, 스스로 마음을 닦아서 자성을 깨쳐야 성불할 수 있지 언어와 문자로는 성불하지 못한다”라고 말씀한 까닭이다.

점수란 무엇인가?

스승이 꼽은 점수(漸修), 거듭해야 하는 수행은 ‘닦을 수(修)’와 ‘할 행(行)’이 모여 빚은 낱말이다. 무엇을 닦아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씀인가? 마음을 닦아 이웃을 보살피며 사랑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마음은 어떻게 닦아야 할까?

스승은 2006년 겨울 안거를 푸는 법석에서 “우리는 흔히 마음을 닦는다고 하는데 마음은 무엇으로 닦는가? 마음이 눈에 보이면 손으로 문지르거나 걸레로 훔칠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기 때문에 닦는다는 말은 관념에 빠진, 모호한 표현이다. 제대로 표현한다면 ‘마음을 쓰는 일’이다. 순간순간 마음 쓰는 일이 곧 수행이다. 마음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삶이 꽃처럼 피어날 수 있고, 꽉 막힌 벽을 이룰 수도 있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없이 사람을 만나고 어떤 일을 겪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내가 마음을 옹글게 쓰고 있는지 잘못 쓰고 있는지 바라봐야 한다. 바르게 써야 바르게 닦인다. 미운 사람을 부처나 보살처럼 맞이해야 쌓인 업이 녹는다”라고 말씀했다.

스승은 1998년 〈보왕삼매론〉을 강론하면서 “신앙생활에 예습은 없다. 하루하루 정진하고 익히는 복습이다. 종교 체험이라는 것은 하루하루 비슷하게 되풀이되는 복습으로 얻어진다.

복습은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다. 어제까지 익혔던 정진은 어제로써 끝난 거다. 오늘부터 새로운 시작”이라고 말씀했다.

스승은 또 “깨달음을 얻으려고 수행한다고 생각하지 말라. 깨달음은, 굳이 얘기하자면 보름달처럼 떠오르는 것이고 꽃향기처럼 풍겨 나오는 것. 수행하는 것은 그 깨달음을 드러내기 위해서다. 종교여행은 시작은 있고 끝은 없다. 늘 새롭게 출발할 뿐이다. 그 새로운 출발 속에서 향기로운 연꽃이 피어난다”라고 말씀했다.

어제 밥을 먹었다고 해서 오늘 밥을 먹지 않을 수 없듯이 어제 그 사랑은 어제로 끝났으니 오늘은 또 새롭게 사랑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날마다 새롭게 피어나”는 것이 바로 점수다.

스승이 이토록 돈오점수 사상을 깊이 가지게 된 계기가 어디 있을까? 〈영혼의 모음〉 〈그 여름에 읽은 책(1972)〉이란 꼭지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8, 9년 전이던가, 해인사 소소산방에서 〈화엄경〉 ‘십회향품’을 독송하면서 한여름 무더위를 잊은 채 지낸 적이 있다. 그해 운허 노사에게서 〈화엄경〉 강의를 듣다가 ‘십회향품’에 이르러 보살의 지극한 구도 정신에 감읍한 바 있었다. 언젠가 틈을 내어 ‘십회향품’만을 따로 정독하리라 마음먹었더니 그 여름에 시절 인연이 도래했다.”

스승은 그해 여름 더러는 목청을 돋우어 읽기도 하고 한 자 한 자 짚어가며 묵독하기도 하면서 20여 차례나 독송했다고 한다.

스승이 풀어낸 〈화엄경〉 ‘십회향품’ 제8회향에는 ‘사랑’이란 낱말이 모두 열일곱 번 나오고 ‘회향’은 열여덟 번, ‘평등’도 열세 차례나 나온다. 제가 쌓은 공덕을 세상에 풀어 돌린다는 회향은 그대로 사랑을 일컫는 것이니 두 낱말이 많이 나올 수 있다. 그런데 평등은 어째서 거듭나올까? 오른손이 왼손에 난 상처에 약을 발라 주고도 생색내지 않듯이, 중생과 부처가 평등하니 얻은 사랑을 돌리는 ‘나’나 그 사랑을 받는 ‘그대’나 다 한 가지에서 나온 잎새이기 때문이다.

이웃 사랑이 ‘점수(漸修)’

이처럼 스승은 ‘돈오’, ‘네가 바로 나로구나.’ 하는 바탕에서 ‘점수’, ‘너를 살릴 때 비로소 내가 살 수 있다’라고 여겨 한 가지에서 나온 잎새인 이웃을 거듭 사랑하는 것이라고 풀어냈다고 새긴다.

성철 스님은 1982년 스승과 대담에서 “흔히 ‘용서를 하자’고 하는데, 불교 근본 사상에는 용서란 없습니다. 용서란 내가 잘하고 남이 잘못됐다는 것인데, 모든 책임은 나한테 있는 것이며, 남을 용서한다는 것은 남의 인격을 근본적으로 모욕하는 것이 됩니다. 설사 어떤 사람이 칼로 나를 찌른다고 할지라도 찌르게 한 근본 책임은 나한테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내가 ‘참회’를 해야지 저 사람을 ‘용서’하다니요(설전)”라고 말씀한다. 이 또한 평등에서 나온 말씀이다. 이로 보아 옹근 깨달음에 방점을 둔 성철 스님은 돈오돈수를, 본디 오롯한 깨달음을 거듭 펼쳐 사랑하기에 초점을 둔 법정 스님은 돈오점수를 이야기하지 않으셨을까 하고 조심스레 짚는다.

성철 스님이 열반에 드시고 나서 스승(법정 스님)이 쓴 추모사에는 1960년 성철 스님을 찾아 뵈었을 때 받은 인상이 고스란하다.

“불교사전 편찬 일로 자문을 구하려고 운허 스님을 모시고 찾아갔다. 그때 스님이 살던 방에 산비둘기 한 마리가 살고 있었는데, 스님께 인사를 드리고 나자 비둘기가 날아와 내 어깨에 앉았다. 무섭고 엄하다고 알려진 스님이 한 방에 비둘기를 거느리고 계시는 걸 보고 친화력이 내 마음에 전해왔다.”

여기서 성철 스님에게 〈선문정로〉를 펴낸 까닭(1982년 스승과 대담)을 듣는다.

“불교란 것의 근본은 깨달음에 있고, 깨달음은 선에, 선은 견성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깨달음과 견성 자체에 대한 표준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누구든지 참선을 시작하고는 한 사흘도 못 돼 다 견성해 버리고 성불해 버려요. 불교 하는 사람 중에 견성 안 한 사람이 없어요. 이처럼 불교의 근본이 흔들리면서 종단에 큰 혼란이 오고 있습니다. 아니, 혼란이 와 있습니다.…그래서 내가 아무리 없는 사람이지만 여러 가지를 생각한 끝에 불교의 장래를 위해서 어떤 ‘표준’을 세워야 하겠다 싶었어요. 내 개인 생각보다는 고불고조들은 어떻게 견성했는가, 어떻게 공부를 해서 어떻게 말씀을 했는가, 그 법문들을 여기저기서 수집해 모으고 구체적인 내용을 들어 ‘견성이란 이런 것이지 그냥 견성이 아니다(설전)’라고 책을 낸 겁니다.”

스승은 다음과 같은 말씀을 했다. “나는 종교 종파주의에 관심이 없다. 또는 어느 한쪽 주장만을 가지고 전체인 것처럼 내세우는 분파주의 불교에도 관심 두고 싶지 않다. 나는 깨달음과 닦음에 대해서 누가 무슨 말을 하고 어떤 주장을 했는지에 별로 관심이 없다. 그보다는 순간순간 내 삶 안에서 그 깨달음과 닦음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겪고 몸소 지어 가느냐에 마음을 기울이고 싶다(1990).”

우리는 모두 달라서, 같은 말씀을 놓고도 다르게 느낀다. 우리는 서로 달라서, 같은 자리에 있더라도 다르게 받아들인다. 우리는 참으로 달라서, 같은 일을 맞닥뜨리더라도 다르게 헤아리며 풀어간다. 그래서 현대를 다중이 이끄는 시대라고 한다. 군중은 ‘대한민국 국민’이라고 하면 개개인 특징이 없어지듯이 저마다 개성이 사라진 사람들을 가리킨다. 그러나 다중은 제 생각이 뚜렷한 개개인이 그때그때 떠오르는 사안마다 자유롭게 뭉치고 흩어지며 뜻을 펼치는 사람들을 일컫는다.

안팎, 앞뒤, 위아래, 빛과 어둠, 있음과 없음이 서로 받쳐주듯이 서로 다름이 어우렁더우렁 빚어가는 바로 그 자리에 부처님이 오신다. 다중이 이끄는 민주주의 시대, 내남직없이 두루 아우를 수 있는 품만이 누리 결을 곱게 빚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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