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회 茶時와 다방
차가 가진 효능 실용화한 ‘다시’
중국·일본엔 없는 사례로 주목
'용재총화' '제좌청기' 등 기록
고려시대부터 시행된 국가 제도
차 마시는 순서와 절차도 엄격

‘다시’에 대한 상세한 내용이 담겨있는 '용재총화'.

고려 시대에서는 국가의 중요한 일을 처리할 때 차를 마시는 제도가 있었는데, 이것이 ‘다시(茶時)’라는 제도다. 이는 차의 활용 범위를 넓힌 것으로, 특히 차가 머리를 맑게 하고 마음을 안정 시켜 주는 효능을 실용화한 사례이다. 고려 시대와 조선 중기까지도 국가의 중요한 일을 맑고 투명하게 처리하고자 하는 공명심이 큰 사회였던 셈이다. 그런데 이 제도는 차문화가 발달했던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그 사례를 찾기 어렵다는 점에서 당시 차 활용이 매우 긍정적이었다고 생각한다.

‘다시’란 어느 시기부터 국가 제도에 활용했던 것일까. 이를 규명할 만한 고려 시대 문헌은 드물다. 다만 ‘다시’의 절차나 규모 등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로는 조선 시대의 서거정(1420~1488)의 〈제좌청기(齊坐廳記)〉와 성현(1439~1504)의 〈용재총화(市齋叢話)〉, 이기(1522~1600)의 〈송와잡설(松窩雜說)〉 등이 있다. 조선 후기에도 ‘다시’에 대한 언급이 산발적으로 보이는데, 앞에 언급한 정보의 범주를 넘어서는 자료는 드물다. 그러므로 ‘다시’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용재총화〉에 상세하게 서술해 두었다. 서거정의 〈제좌청기(齊坐廳記)〉는 ‘다시’가 고려 때부터 있었다는 사실을 언급한 유일한 자료이다. 먼저 ‘다시’의 절차를 언급한 〈용재총화(市齋叢話)〉를 살펴보니 ‘다시’는 다시청과 제좌청에서 시행되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 내용 중에서 중요한 부분만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대관(臺官)과 간관(諫官)이 같다고는 하나 실은 같지 않으니 대관은 풍교(風敎)를 규찰(糾察)하고, 간관은 임금의 과실을 바로잡는다. 대관은 지위마다 예의가 엄중하여 지평(持平)이 섬돌 밑에서 장령(掌令)을 맞아들이고, 장령은 집의(執義)를 맞으며, 집의 이하는 대사헌(大司憲)을 맞는 것이 상례이다. 평상시에는 다시청(茶時廳)에 앉고 제좌(齊坐) 날에는 제좌청(齊坐廳)에 앉는다.(臺官諫官。雖云一體。其實不同。臺官糾察風敎。諫官正君過失。臺官一位嚴於一位。持平下階迎掌令。掌令迎執義。執義以下迎大憲例也。常時坐茶時廳。齊坐之日。坐齊坐廳)’

윗글에 따르면 대관은 풍습을 살펴 바로 잡는 일을 맡았고 간관은 임금의 과실을 바로 잡는 임무를 맡은 관직이라 하였다. 그런데 대관의 예의는 엄중하며 품계에 따라 대사헌을 맞는 상례를 언급하여 품계의 질서가 엄정했음을 드러냈다. 그뿐 아니라 대사헌 이하 관료들은 평상시에는 다시청에 머물면서 국사를 논의하는 제좌가 있는 날엔 제좌청에 머물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헌이 관청으로 들어오면 그를 맞이하는 절차를 상세히 서술하였는데, 그 내용이 방대하므로 국가의 중요한 일을 처리할 때 차를 마시는 절차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대사헌은 의자에 앉고 나머지는 모두 승상(繩床)에 앉는다. 아전 여섯 사람이 각각 탕약(湯藥) 그릇을 들고 여러 사람 앞에 무릎을 꿇으면 한 아전이 “약을 받들고 잔을 잡으라(奉藥執鍾)”고 외치고, 또 “바로 마셔라(正飮)”고 외치면 이를 마시고 “약을 내려 놓으라(放藥)”고 외치면 그릇을 물리친다. 또 한 명의 아전이 “바르게 앉아 공사를 바르게 하라(正坐正公事 )” 하면 여러 사람이 일어나 허리를 굽혀 예를 표하고(揖) 다시 자리에 돌아가, 이윽고 둥근 의석(議席)을 당상에 깔고 모두 자리에 앉는다. 관직에 제수할 사람이 있으면 서명하고 탄핵할 일이 있으면 이를 논박한다.(大憲奇倚。其餘皆繩床。有吏六人。各執湯藥鍾就뱌諸位前。一吏唱曰奉藥執鍾。唱曰正飮則飮之。唱曰放藥則去鍾。又一吏唱曰正坐正公事。諸位起揖還坐。遂鋪圓議席於堂上。皆下坐有拜職者。則署而經之。有彈?之事。論駁之)’

윗글은 공사(公事)를 처리하기 전에 차를 마시는 절차를 상세히 서술하고 있는데, 차를 마시는 절차, 즉 찻잔을 들고, 마시고, 잔을 내려놓는 순차가 엄정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차를 마시는 절차가 끝난 뒤, 관직에 제수할 사람이 있거나 탄핵을 할 사항 등을 처리했는데, 조선 중기에는 차를 약이라 불렀다는 것이다.

원래 ‘다시’라는 제도는 고려 때부터 시행된 국가 제도였고, 16세기 말까지 이어졌음이 드러난다. 고려 시대에는 차와 약으로 혼용해 불렸다. 그런데 무슨 연유로 조선 시대에는 약이라 분류했던 것일까. 그 해답은 〈조선왕조실록〉 〈태종조〉에서 찾을 수 있다. 바로 태종 때에 예조의 건의로 선왕과 선후의 기신재제(忌晨齋祭)에서 차를 대신하여 술과 감주를 쓰라는 조칙이 내려졌기 때문이다. 이후 왕실의 제사에는 차를 올리지 않았으니 이런 조치는 조선 시대 차문화의 전개를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었던 징표였다. 그러므로 조선 초기 이후 왕실에서 차를 의례에 사용하는 것이 매우 제한적이었고 약을 관리하던 다방(茶房)에서 차를 약재의 일종으로 관리하였던 것이다. 원래 다방(茶房)은 고려에서도 약방문을 수집하는 관청이었다. 고려 시대 차는 정신 음료였고, 왕실 의례에 사용하는 귀중품이었지만 그 범주는 약이라는 이미지가 강했던 듯하다. 이규보는 〈신집어의촬요방서(新集御醫撮要方序)〉에서 다방을 이렇게 서술했다.

‘옛 성현이 〈본초(本草)〉 〈천금(千金)〉 〈두문(斗門)〉 〈성혜(星惠)〉 등 모든 방문을 저술하여서 만백성의 생명을 구제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권질이 너무 호번하여 열람하기에 곤란하다. 만일 시일이 오래 갈 병이면 의원을 찾는 것이 가하고, 모든 서적을 뒤져서 그 방문을 찾는 것도 가하다. 그러나 만약 갑자기 위급한 중병을 얻었다면 어느 겨를에 의원을 찾고 서적을 뒤질 수 있겠는가? 아예 정밀하고 요긴한 것만을 채집하여 위급을 대비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국조(國朝)에 다방(茶房)에서 수집한 약방문 한 질이 있는데, 수집한 지 오래라, 탈루되어 거의 유실될 지경에 이르렀었다. 지금 추밀상공(樞密相公) 최종준(崔宗峻)이 이것을 보고 애석히 여긴 끝에 그것을 인쇄하여 널리 보급할 것을 생각하고 이를 상께 아뢰니 상께서 흔연히 허락하였다.(古聖賢所以著本草,千金,斗門,聖惠諸方。以營救萬生之命者也。然部秩繁浩。難於省閱。其若寢疾彌留。勢可淹延時日。則謁醫可也。搜諸書求其方。亦可也。至如暴得重病。蒼皇危急。則又何暇謁醫搜書之是爲也。不若採菁撮要。以爲備急之具也。國朝有茶房所集藥方一部。文略效神。可濟萬命。以歲久脫漏。幾於廢失矣。今樞密相公崔諱宗峻。見而惜之。思欲摹印以廣其傳。以此聞于上。上遂欣然?可)’

윗글은 새로 편집한 〈어의촬요방(御醫撮要方)〉에 쓴 서문인데, “국조(國朝)에 다방(茶房)에서 수집한 약방문 한 질이 있는데, 수집한 지 오래라, 탈루되어 거의 유실될 지경에 이르렀었다”라고 하였다. 따라서 다방은 고려 시대에도 약을 관리하는 부서로, 차를 함께 관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용재총화

한편 조선 시대에도 국가의 중요한 일을 처리할 때 차를 마셨던 ‘다시’제도가 상당 기간 시행된 듯하다. ‘다시’가 고려에서 시행된 제도였음은 서거정(徐居正1420~1488)의 〈제좌청기(齊坐廳記)〉에서 드러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헌부의 일은 두 가지가 있는데, 다시와 제좌이다. 다시는 다례의 뜻에서 따온 것이다. 고려와 국초(조선 초)에 대관(臺官)은 언책(言責)만을 담당하고 서무를 처리하지 않았지만, 하루에 한 번 모여 차를 마시고 (모임을) 파하였다.(府之廳事有二 曰茶時曰齊坐 茶時者取茶禮之義 高麗及國初 臺官但任言責 不治庶務 日一會設茶而罷 國家制度漸備 臺官亦兼聽斷 履事惟繁 遂爲常仕之所 然非正衙也)’

윗글에서 서거정은 ‘다시’가 사헌부에서 행해졌던 일로, 다시는 차를 내는 절차임을 밝혔다. 그리고 ‘다시’가 고려 때부터 실행되어 조선 초기까지도 대관에서 차를 마시는 제도였음을 밝혔다. ‘다시’가 사헌부에서 대관이 국사를 처리하기 전에 차를 마셨다는 사실은 〈제좌청기〉와 〈용재총화〉의 내용이 거의 비슷하게 서술했다.
이기(1522~1600)의 〈송와잡설(松窩雜說)〉에도 ‘다시’를 언급한 기록이 있는데, 앞에 언급한 문헌과는 조금 다른 내용이 눈에 띈다.
 
‘옛말에 실상은 없으면서 그 말만 전해 오는 것이 있으니, 야다시(夜茶時) 같은 것이 이것이다. 전중(殿中: 옛날 전중어사(殿中御史)로 감찰(監察)을 뜻함) 관원도 모두가 대관(臺官)인데, 본부(本府)에 출사(出仕)하지 않는 날에는, 대장(臺長)으로서, 성상소(城上所)를 맡은 자가 여러 전중을 모처에 모아서 대관을 분간만 하고 파하는 것을 다시(茶時)라 한다. 차를 마시고 그만 파한다는 말이다.(古語之無其實。而只傳其語者。如夜茶時之類是也。殿中之員。俱是臺官。本府不坐之日。臺長之爲城上所者。會諸殿中於某處。只分臺而罷。謂之茶時。言其黍茶而罷也)’

원래 〈송와잡설(松窩雜說)〉은 기자조선에서 선조 연간까지 이기(1522~1600)가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한 책으로, 명현(名賢)들의 일화(逸話)나 시화 등을 수집해 묶었다. 그런데 이 문헌에 “옛말에 실상은 없으면서 그 말만 전해 오는 것이 있으니, 야다시(夜茶時)같은 것이 이것이다.”고 하였으니 ‘다시’는 이미 사라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국가 제도의 가감은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법이다. 그러나 ‘다시’라는 국가 제도가 차를 마신 후 맑은 정신으로 국사를 처리하고자 했던 선인들의 충심(衷心)에서 나온 것이라는 점에서 이런 제도는 현대에도 활용해 봄직한 제도가 아닐까.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장>

'송와잡설'은 기자조선에서 선조 연간까지 이기(1522~1600)가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한 책이다. ‘다시’제도가 조선시대에는 사라졌음을 드러내는 드러내는 기록이 있어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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