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더 진실한 믿음과 한번 해 보겠다는 패기로 물러서지 말아야

우리가 말입니다, 그 모든 믿음과 패기가 없고 용맹정진이 없다면 항상 방황하게 됩니다. 한 걸음을 떼도 무겁고 좀 더 인내성 있게 떼어 놔야 할 거고, 생각을 해도 좀 무겁게 하면서 종종걸음을 걷지 않도록 하고, 한 걸음을 떼어 놔도 백 걸음 못지않게 뛸 수 있는 그런 믿음과 패기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전에도 항상 말씀드렸지만 오늘 다시 한번 반복해서 얘기해 드리고 싶은 것은, 우리가 대나무와 같이 마디마디는 있습니다마는 속은 속대로 같이 통해 있고 거죽은 거죽대로 같이 붙어 있습니다. 이런 거나 진배없는 전체 이 한 몸을 우리가 우주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는 마음을 가지십시오. 음과 양을 통해서 한데 합쳐진 우리 이 생명은 각자 각자 이 몸뚱이 하나에 생명들이 수억 마리가 있는데, 그렇게 많은 양을 한데 포섭해서 인연에 따라서 여러 마음들이 종합해서 한데 모인 한 생명입니다.

아무리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나를 이익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은 남을 이익하게 할 수 있고
남을 이익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은 나도 이익하게 할 수 있는 겁니다.

이것을 그냥 넘기려고 하지 마세요. 내가 하지 않으면 내가 받지 않는 겁니다. 내가 한 것만치 받는 겁니다, 죄도 선도. 그러니까 희미하게 넘기지 마시고 좀 더 믿음을 진실하게 가지고 한번 해 보겠다는 패기로 물러서지 않도록 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 많은 생명들이 한데 합쳐진, 그렇게 구성된 인간 하나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살아나가는 데에 어떤 때는 이런 생각이 들고 어떤 때는 저런 생각이 들고, 수만 가지의 생각이 돌게 됩니다. 그것은 자기 하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일으키고 가라앉히고 하는 보당은 바로 자기 선장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의 구성된 선장, 즉 마음에 달려 있다 이겁니다.

그런데 그 마음은 안팎의 보당을…, 즉 말하자면 원자력 발전소가 자기 한 몸뚱이에 구성돼 있다면, 우리가 지금 저 문을 열고 들어오는 데도 저게 맞뚫렸습니다. 바깥으로 열고 나가는 것도 저 문 저걸 붙잡아야 하고 안으로 들어오려도 저걸 붙잡아야 합니다, 문을 열려면. 본래는 문이 없는데도 문이 있다는 겁니다. 문이 있는데도 문이 없다는 것은 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체가 없으면서도 역력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안에서 바깥으로 내보내려도, 상대성 원리기 때문에 안의 보당을 누르는 것도 바로 이 보당이고, 바깥에서 안으로 들이려도 그 보당을 눌러야 됩니다. 그런데 그 보당 하나에, 안팎이 붙어 있는 뚫린 보당 하나에 줄이 만 개가 있다면 만 개가 죄 각각이라는 얘깁니다. 무전통신 줄이, 즉 법망에 그 무전통신 줄이 다 붙어 있어요. 그러면 그 붙어 있는 줄에 이건 우주의 보당을 누르는 우주 줄이고 이거는 삼천대천세계의 줄이고 이것은 또 소천세계 중천세계, 또는 이거는 우리 몸에, 예를 들어 우리 몸을 종합병원이라고 그런다면, 종합 원자력 발전소라면 요 줄은 요 줄대로 여기에 다 붙어 있죠?

그러니까 예를 들어서 지능 줄이라든가, 지능이 발달되지 않은 사람에게는 지능 줄이 거기 있으니까 그 보당을 눌러서 하는 것은…, 요걸 요렇게 얘기해야 좋겠군요. 여러분의 마음이, 이렇게 몸에 닿고 상대성에서 오는, ‘이게 까다롭게 넘어가겠구나.’ 또는 ‘나는 왜 머리가 이렇게 안 돌까.’ 또 ‘나는 생활하는 데에 왜 이렇게 잘못될까.’ 그 다양하게 수많은 가지가 다 이 원자력 발전소의 보당에 달려 있다는 겁니다. 보당 줄에 있어요, 전부. 가설이 돼 있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 가설된 거기에 내가 ‘아, 이게 왜 이렇게 까다롭게 안 넘어갈까? 왜 머리가 안 돌까?’ 할 때는, 지능 발달이 덜 됐기 때문에 그렇다고도 생각이 될 때는 그것이 바로 지능 줄인 겁니다. 내가 그렇게 생각을 했을 때는 지능 줄의 보당을 누르는데 안으로 ‘아, 이건 여기서밖에는 할 수가 없다.’ 하는 그런 생각을 할 때 바로 지능에 관한 줄에 의해서 이 대나무 속이 뚫려서 가듯이, 그렇게 해서 이게 다 돌아가게 돼 있습니다, 대뇌를 통해서.

그러니까 지능이 만약에 발달이 되지 않았다면 거기 물리가 터지질 않습니다. 물리가 터지지 않음으로써 지혜가 생기질 않거든요. 그래서 그 이름은 ‘지능이다’ 또는 ‘물리가 터져야 한다’ 또 ‘지혜가 생겨야 한다’ 하는 것이 그게 마디만 있다 뿐이지 한 줄입니다. 이름만 각각이지. 그런데 우리가 생활에서 지능과 물리가 터져야 하고 지혜가 생겨야 지혜가 모든 만법을 응용하는 데 무기가 되는 거죠.

그럼으로써 만 가지 법망의 그 무전통신 줄이, 세포 줄이 전부 이렇게 돼 있는데, 우리가 처음에는 한 가닥으로써 한 보당을 누르는데 지금 까다롭게 넘어가지 못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내 몸 안의 생명들과 나와 더불어 둘이 아니지만 한 마디가 있기 때문에 엑스 자로 넘어갑니다, 엑스로. 이게 둘이 한꺼번에 체인지가 돼 가지고 넘어가서 하나로 책정이 된다는 얘깁니다. 그러니 이 안이나 바깥 일이나 전부 그렇게 돌아가는 거죠.

이것을 어떻게 똑똑히 얘기를 해 드릴지 모르겠지마는 이렇게 얘기를 해 드리면 안으로 항상 그렇게 실험을 통해서 지켜보고 자기가 해 보고, 남에게서 알려고 하지 말고, 책을 보고 그거를 알려고 하지 말고, 안에서 그것을 굴리면서 자꾸 실험을 해 보면서 자기가 터득을 하는 거죠. 그것이 일거삼득이 될 겁니다. 그것이 행선이며 참선입니다. 그러면서도 자기를 발견할 수 있는 동시에 용(用)도 같이 할 수 있다는 얘깁니다.

그러니까 예전에 석존께서 유(有)의 법의 모든 문제를 가르쳤고 그다음에 무(無)의 법을, 무루의 법을 가르쳤고 그다음에 유루와 무루를 한데 합쳐서 법화경을 설했습니다. 그러면 시일이 얼마나 걸립니까. 마디 하나하나, 요 세 계단이 마디가 있을 뿐이지 다 통해 있는데 통해 있는 마디 마디를 한데 합쳐서 여러분이 지금 이렇게 바쁜 시기에 그대로 일거삼득이 되게끔 일심으로 들게 했으면 좋지 않은가 해서 이렇게 가르치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지금 그렇게 있는데 이 생각이라는 건 체가 없습니다. 체가 없죠? 여러분이 큰 바다라고 생각을 할 때는 바다입니다. 요만한 물방울 하나라고 생각할 땐 물방울 하납니다. 이건 체가 없기 때문에 크게 이룰 수도 있고 쪼끄맣게 이룰 수도 있는 겁니다. 이것을 깊이 생각하셔야 됩니다. 물질을 생각해 가지고 이건 크다 이건 작다 이렇게 걸려서는 아니 됩니다. 이건 육안으로 보는 우리 습에 의해서 보는 눈이고, 이건 습이 아닌 체가 없는 내 한 눈에서, 속에서 그대로 생각해서 만약에 크게 내가 봤다 하면 큰 거고 작게 봤다 하면 작은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이 체가 없는 그 마음은 항상 수만 가지의 보당을 자기가 가지고 있습니다, 자기가. 선장이 보당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여러 가지의 보당은 다 자기가 스스로 자동적으로, 자꾸 이렇게 와서 닿는 대로 그것이 쪼끄만 거냐 큰 거냐에 따라서 자기가 그 큰 원자력 보당에다가 한번 굴려서 누르면서 이렇게 문을 여는 겁니다. 문이 따로 없지만 이거는 이름입니다. 그러니까 ‘아, 저이가 뭐 저렇게 말을 해? 이름도 없고 본래 아무것도 없는 건데.’ 이렇게 하지 마시고 아무것도 없는 그 자체 내에서 무르익는 보리 이삭도 있듯이, 예?

아무것도 없는 그런 데서 우리는 역력하게 배가 고픈 건 고픈 겁니다. 아무것도 없으면서도, 뜬구름 같으면서도 배가 고픈 건 배가 고픈 거지 어떡합니까. 그리고 가난한 건 가난한 거고 아픈 건 아픈 겁니다. 이것을 어떻게 다 처리를 하겠습니까. 이것이 여러분의 생각, 지혜에 달렸습니다.

아까 얘기한 지능, 즉 말하자면 지능이 제대로 돌아가고 믿음과 패기와 모든 것이 한데 합쳐지기 이전에도 그렇게 돼 있었지마는 이걸 사용을 못 한다면, 용을 못 한다면 이거는 천만금을 두고도 내가 쓰지 못하는, 못 쓰는 기계밖에 될 수 없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그렇게 해서 지능이 발달이 되지 못했으면 지능을 발달을 시킨다. 거기에 지능이 발달이 된다면 그냥 거기에 마디 하나가 있어서 그렇지, 그리로 통과가 된다. 즉 모든 만 가지의 물리가 터진다. 물리가 터지면 지혜가 터진다. 지혜가 나온다면 만 가지 법을 그대로 응용할 수 있다. 요거 재차 말한 겁니다. 그러니 똑똑히 들으십시오.

그래서 여기가 원자력이라면 체가 없는 마음은 수없이 다가옵니다. 우리가 테레비를 보고도 세계적으로 어떠한 문제가 있을 때 여기 직속 들어오지 않습니까. 상대성에서 자성으로 그냥 들어옵니다. 또 들어오고 또 들어오고, 가정에서도 무슨 말을 하다가도 딱 들어옵니다. 들어옵니다. 들어오고 들어오고 들어오고, 수만 가지 천차만별로 작은 거 큰 거, 작은 거 큰 거 할 거 없이, 중간 거 소소한 거 뭐, 전부 들어옵니다. 들어오는 대로 자기가 한 보당에다, 즉 말하자면 다 거기에다가 보당을 누르는 겁니다.

보당을 누른다 하니까 또 눌러서 누르는 게 아니라 내가 알아지는 게 보당이요, 안에다가 놓는 게 보당이다 이겁니다. 그래서 바깥 보당하고 안 보당하고 둘이 아니게 저렇게 맞뚫렸다는 얘깁니다. 그러니까 가고 옴이 없이 마음이 오고 간다. 둘이 얘기를 하는 데도, 이 말을 하는데 말을 준 게 아닌데도 그 사람은 벌써 듣고 있지 않습니까. 듣고 있는데 그 듣는 것만이 아니라 그 말하는 데 원리가, 뜻이 어디에 속해 있는가를 벌써 알고 있다는 얘깁니다, 그 말의 뜻을.

그러니 이게 참 놀라운 일입니다. 말로만 알아서 의식만 이렇게 하는 게 아니라 말을 들어 가지고 잠재해서 이렇게 한번 굴리면서 뜻이 거기서 ‘아, 저 사람이 저래서 저 말을 하는구나!’ 하는 거를 벌써 알기 때문에 벽을 탁 쳤는데 봇장이 울리게 되죠.

이렇게 사람은 능수능란하게 첨단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부처님이 될 수 있는 그런, 고도로 발달이 된 인간이란 말입니다. 그렇게 고도로 발달이 된 인간으로서 자기가 그 무한의 능력을 그렇게 가지고 있으면서도 쓸 수 없는 것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쓸 줄을 몰라요. 자기가 형성해 놨는데, 자기가 형성해 놓은 거를 자기가 쓸 줄은 아는데 지금 이 거죽에서 문 여는 보당, 즉 바깥에서 문 열고 들어오는 보당, 안에서 문 여는 보당, 이것을 쓸 줄 모르는 겁니다, 지금. (중략)

우리가 이것을 이 말 저 말 안 하고 넘어가면 그 뜻을 모르실까 의려하여 이러한 얘기를 합니다마는 임신을 해서 어린애를 뱄어도 탯줄을 잡지 못하면 전체 부위에서 나오는 액체의 그, 자기의 젖을 먹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탯줄을 언제나 자동적으로 잡고 있는 겁니다. 탯줄을 놓친다면 그 어린애는 떨어집니다. 살 수가 없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여러분 한 분 한 분이 그 탯줄을 잡지 않는다면 고아입니다, 고아. 어디서라도 도와서 한마음 한뜻으로 돌아가야 될 텐데 돌아갈 수가 없고 자꾸 걸려요.

그와 마찬가지로 그 보당은 안팎으로 맞뚫린 하나인데 수없이 우주 줄이 있고, 세계 줄이 있고 또 국가 줄이 있고, 또 사회 줄이 있고 또 우리 가정 줄이 있고, 내 몸의 줄이 있고 몸의 세포의 모든 기능의 줄이 있단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하나하나 나한테 닥치는 대로, 예를 들어서 몸으로부터 얘기를 하자면 사무실에 나가서 일을 하는데 아, 상대를 만나야 할 텐데 참 까다롭다 할 때 바로 안에, 내가 벌써 그런 생각이 들었다면 거기에, 내 이 바깥의 보당에 벌써 신호가 온 겁니다, 안에서. 그러면 안으로 다시 보당을 누릅니다. ‘이거는 여기에서 해 줄 수밖에 없다, 무전통신으로써.’ 그럼으로써 이걸 안으로 누른다면 바로 안에서 직접 그쪽 안으로 들어갑니다. 안으로 들어간 뒤에 바깥 보당에서 바로 바깥 보당을 또 누릅니다. 그럼 만나는 거죠.

이렇게 세밀하게 얘기해도 여러분이 이해가 안 간다면 난 어떻게 할 수 없는 거니까요. 그래서 안 보당을 반드시 누름으로써, 내가 전화통에다가 먼저 전화를 해서 알려 놓고 바깥으로 가서 만나는 것처럼, 이렇게 해서 만나게 되면 아주 유유히 돌아갑니다. 그러면 바깥에서도 나를 그렇게, 상대방에서 깔보지 못하게 됨으로써 아주 융화성이 유유하게 조화가 이루어지고 안으로 그렇게 마음이 따뜻하게 되자 서로가 서로를 양보할 수도 있고 서로 도와줄 수도 있고 이런 문제가 생기지만, 만약에 이 안으로 통과가 안 되고, 마음으로 통과가 안 되고 거죽으로 말을 해 봤자야 그건 백문선이 헛문선이야. 걸리고만 넘어가.

그러니 안팎을 다 응용하고 활용하려면 이 50% 50%가 맞먹어 들어가야 된다. 그런데 이 줄이 수만 가지로 이렇게 연결이 돼 있는데 그건 내가 지혜가 있다면 자기의 환경에 따라서 큰 것도 생각해 볼 수 있고 작은 것도 생각이 되면 스스로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어저께도 테레비에서 뭐, 이것저것 이것저것 나오던데 그것을 나오는 대로 보지 마세요. 그거는 거짓도 있고 거짓 아닌 것도 있거든요.

그걸 그대로 곧이곧대로 생각해서 하는 게 아니라, 때에 따라서는 이런 것도 있죠. 공치기를 하는데 이것이 벌써 며칠 전에 한 거를 재방송하는 게 있죠. 만약에 재방송하는 데다가 재방송을 하는 줄 모르고 내 마음을 아무리 내 봤던들 이미 벌써 지나간 거란 말입니다. 이렇게 어리석게 논다면 그건 핀트가 맞질 않습니다. 직접 생방송을 할 때 마음도 내야 그것이 전반적으로 돌아가는 거죠.

그리고 우리가 살림하는 데도 그렇죠. 지나간 거는 자꾸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얘깁니다, 이미 지나간 거니까. 앞으로 다가오는 거, 다가오는 거를 생각하면서 잘 조절해 가면서 안팎이 없이 그렇게 여는 문도 바로 그 안에서 보당을 눌러야 하고, 안으로 드는 문도 바깥에서 안으로 보당을 눌러야 하는 것이 맞뚫렸다는 걸 아신다면 이게 공한 자기의 원자력 발전소의 보당이라는 얘깁니다.

그러면 그 보당…, 또 자꾸 지금 되풀이합니다. 여러분, 잘 이걸 포착하셔야 됩니다. 돌아갔다가 지금 다시 되돌아왔다 이럽니다. 그런데 그 줄이 그렇게 많은데 사람이라는 게 조끄만 생각만 나는 게 아닙니다. 사람은 큰 지혜로운 생각이 났다가도 아주 옹졸한 생각도 납니다. 옹졸한 건 옹졸한 것대로 쓰이고 큰 거는 큰 것대로 쓰일 때 자기를 언제나 더 잘 압니다, 여러분은. 자기 환경을 너무 잘 압니다. 자기의 마음 씀씀이도 더 잘 알고 지금 자기 앞에 처해 있는 환경도 너무 잘 알기 때문에 너무 큰 거를, 자기한테 오지 않을 것을 크게 생각을 해서 욕심내지 않아도 내 지혜가 자꾸 넓어지면 넓어지는 대로 지능이 발달되고 활용을 하게 되자 이건 점점점점 자기도 모르게 넓어져. 넓어지게 돼서 우주도 삼킬 수 있는 그런 넓은 지혜가 생길 때 비로소 스스로, 남이 벌써 나에게 큰 그릇이라고 담깁니다. 내가 담으려고 하기 이전에 벌써 담깁니다.

그러니까 남이 내 이름을 남겨 주는 거지 내가 이름을 남기려고 해서 남겨지는 게 아닙니다. 그럼으로써 그 이름을 남겨 주는 것은 마음이 한마음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그 한마음이, 이름이 빛이 난 거지, 그 이름이 이름이 아니라는 얘깁니다. 여러분 이름이 다 각자 있으시겠죠? 이름이 여러분입니까? 여러분을 규명 지어서 부르기 위해서, 똑같은 사람들이기에 어떻게 규명을 지을 수가 없으니까 이름을 만들어서 붙여 놓은 겁니다. 상품에 이름을 붙여서 팔듯이. 그러면 그 이름이 여러분이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가 살아나가는 데 질서를 지키기 위하고 어떠한 규명을 짓기 위해서 이름을 붙여 놓은 거지, 이름이 이름이 아니고 부처님이라는 이름도 이름이 이름이 아닙니다. 삼천대천세계라고 하는 것도 이름이 이름이 아니고 지금 내가 “원자력 발전소의 문이, 쌍방으로다가 보당이 붙어 있으니” 이러는 것도 이름입니다. 그러나 이 이름도, 즉 말하자면 여러분이 깨달으면 이름을 불러도 이름이 아닌 거고 깨닫지 못한다면 이름으로 그냥 돌아갈 겁니다.

그러니 그 보당에는 수많은 줄이 하나하나 연결돼 있으니, 여러분이 작다 크다 없이 닥치는 대로 자기가 그 안으로 굴려서 안으로 보당을 누르고서 하고, 또 바깥으로 나갈 때는 이 안에서 보당을 누르고, 이렇게만 항상 할 수 있다면, 이것이 끊임없이 돌아간다면 여러분은 정말이지 이 세상에서 둘째가라면 참 억울하다는 걸로 한자리에 할 겁니다. 즉 말하자면 상품 자리, 중품 자리, 하품 자리가 한데 합쳐진, 즉 자유인이 된다는 애깁니다. 이 자유인이 된다면 얼마나 다양하게, 우주적으로도 그렇지마는 우리 생활적으로도 그렇고 이것이 말을 한다면 내 몸으로 얘기를 하려도 천만 가지가 돼요. 몸만 가지고 얘기한대도.

그러면 몸으로부터, 가정으로부터, 사회로부터 진출해 나가는 이 활용이 어디서부터 어떻게…, 이것이 천만 가지가 뭐, 가짓수를 헤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럼 우선 내 몸을 이끌어 가지고 다니는 것은 내가 이 세상에서 탄생만 해도, 아니 그 줄만 잡아도, 그 줄을 잡고 보당만 누를 줄 알아도 내 몸뚱이는 잘 끌고 다닌다는 얘깁니다. 이 병고도 그렇고 모든 것이. (중략)

당장 여러분 간이 파괴가 되고 이랬다고 합시다. 지금 여기 앉아 있지도 못해요, 예? 그럼 여러분이 여러분입니까. 여러분 속의 그 생명들이 살아 주기 때문에 여러분이 있는 겁니다. 오늘은 몸에 대해서만 요 얘기를 하겠습니다. 몸의 부위에 양면의 보당이 있다는 것은 나중에 하죠. 여기 근거지가, 바로 태양의 근거지도 여기요, 우주의 근거지도 여기요, 세계의 근거지도 여기요, 국가의 근거지도 여기요, 뭐, 전체가 다 여기니까. 줄줄이 여기입니다, 줄줄이. 줄줄이 사탕이죠. 줄줄이 사탕이에요, 뭐, 아주 그냥. 그러니 여러분한테 닥치는 대로 겁내지 말고, 이건 패기가 있어야 하고 긍지가 있어야 하고 믿음이 있어야 하고 물러서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 지난번에도 얘기했듯이 단군은, 즉 말하자면 거울과 칼과 방울을 가지고 나왔다 했는데 이 이름을 붙여서 그렇지, 요 마디만 있다 뿐이지, 요거는 다 일심에 들어 있는 거라. 거울은 태양과 같이, 크고 작고 한 게 없이 맑고 깨끗하고도, 청정하고도 자유스럽게 할 수 있는 그 거울을 말하는 거죠. 칼이라는 것은 선하게든 악하게든 하는 게 아니라 선한 거 악한 거를 한데 합친 비호같은 칼이라 이 얘깁니다. 자비의 칼. 이것은 칼이 칼이 아니라 이거야. 마음의 주장자의 그 비호같은 활용을 말하는 거죠.

그럼으로써 그렇게 활용을 달랑거리고 해도 둥글기만 하더라. 어떻습니까? 둥글기만 하더라. 건드리기만 해도, 달랑달랑해도 여여하고 둥글기만 하더라 이거야, 응? 그러니 바깥으로 소리가 많이 나도 둥글게만 돌아가니 이것은 이익만 주고 충성이나 효도나 모든 사람 사는 방도, 의리와 도의, 사랑, 조화를 이루면서, 사람이라면 이렇게 살아야만이 사람이라는 것을 가르쳐 줬던 겁니다. 이것이 모두가 우리 인간에게 천부적인 그 능력이 주어져 있다는 겁니다. ‘야, 이거 깨달으려면 어려울 텐데 이걸 어떡하지?’ 하지 마시고, 깨닫는다고 생각도 하지 마세요. ‘난 깨달아야겠다.’ 하는 마음이 있다면 깨닫지 못합니다.

여러분이 깨달아서 무엇을 하시려고 그러십니까. 부처가 되시려고요? 천만의 말씀이에요. 인간이 되고자 하는 것도 없습니다, 인간이기에. 본래 인간 아닙니까. 그러니까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만이 나와 남을 통해서 둥글게…. 아무리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나를 이익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은 남도 이익하게 하고, 남을 이익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은 나도 이익하게 할 수 있는 겁니다. 남을 이익하게 한다면 남이 나를 이익하게 하고, 나를 이익하게 한다면 또 내가 남을 이익하게 하는 바로 동심으로서, 동체로서 공용을 하게 되죠. 그러니 이것이 바로 사람 사는 의리와 도의, 사랑, 자비이며 이것이 바로 진(眞) 생활의 활용이 아닐까 이렇게 보고, 부처님 법이 아닐까 이렇게 봅니다.

※위 법문은 대행 스님께서 1986년 6월 1일 일반법회 법문 중 일부의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한마음선원 홈페이지(www.hanmaum.org)에서도 같은 내용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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