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안참구 체계를 세우다

저서 '원오심요'서 화두선 강조
대혜종고 ‘간화선’ 정립에 도움
임제종 중흥 위해 선체계 세워
‘다선일미’사상 저변화 이끌어

원오극근 선사의 묘. 쓰촨성 성도 소각사 옆인 동물원 내에 모셔져 있다. 원래 동물원도 소각사 도량이었으나 도량이 축소돼 현재 동물원으로 사용된다.

발밑을 살피라
조계종 총무원 청사 들어가는 계단에 ‘조고각하’가 새겨져 있다. 오를 때마다 그 글귀를 새겨본다. 이 글귀를 처음 언급한 선사는 〈벽암록〉의 저자 원오극근(圓悟克勤, 1063~1135)이다. 극근은 앞의 법연 원고에서 법연의 세 제자인 법연삼걸(法演三傑) 가운데 한 분이다.

오조 법연은 세 제자들과 함께 출타했다가 밤늦게 길을 걷게 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바람이 불어와 초롱불이 꺼져 앞을 전혀 볼 수 없었다. 법연은 제자들에게 물었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 각자 생각나는 대로 말해 보아라.”

스승의 질문에 당황한 두 제자는 어물거리며 답변을 했고, 마지막으로 극근이 대답했다. “조고각하(照顧脚下), 발밑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유교경〉에서 부처님께서는 “인간의 감각기관인 6근(눈·귀·코·혀·몸·생각)을 잘 제어해야 한다”라고 하셨다. 여기서 6근을 조종하는 존재, 마음이란 무엇인가? 인생길에 이것만 잘 다스려도 삶에 고난이 없을 것이다. 

극근 활동하던 당시 상황
원오극근과 대혜종고가 활동하던 국제 정세를 보자. 중국 내륙은 907년에 당나라가 망한 후 960년까지 오대십국이 일어나 50여 년간 혼란이 지속되다 송나라(北宋)가 건국된다. 거란은 907년에 건국되어 947년 요나라로 국호를 개칭했다. 만주에서는 여진족(만주족)이 점차 세력을 키워 나가고 있었다(훗날 금나라). 당연히 11세기 중반~12세기 중반은 거란과 여진족 등 이민족의 침탈과 내정의 실패로 송나라가 위기에 처했다.

왕안석(1021~1086)이 송나라의 위기를 모면코자 신법을 내세웠으나 구당 세력의 반발로 실패하였다. 이후 진전이 없이 신당과 구당 세력의 싸움이 거듭되었다. 이런 때 불교는 국가 권력의 보호 아래 어느 정도 특권을 누리며 보호받을 수 있었다. 

한편 불교는 물론 당대부터 선이 강남에서 발전되어온 데다 점차 이때부터 항저우를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불교 종파는 선·정토·천태가 주된 흐름을 이루었다. 이때 사천 출신 고위 관료(장상영·소식 등)들의 귀의를 받아 극근이 속한 양기파의 선이 강남에서 중심으로 떠오른다.  

극근의 행적     
원오극근은 쓰촨성 성도에서 태어났다. 유학자 집안에서 자랐고, 어린 시절 사찰에 놀러갔다가 불교와 인연되어 묘적원에서 출가하였다. 처음에 〈능엄경〉 등 경론을 공부하다가 중병을 크게 앓은 뒤 해탈이 문자에 있지 않음을 자각하고 사교입선한다.

극근은 여러 선지식을 찾아다녔는데, 옥천승호(1012~1092)·대위모철(?~1095)·황룡조심(1025~1100)·동림상총(1025~1091) 등 여러 선지식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이후 유승 문하를 나와 극근은 태평산(太平山) 오조법연(五祖法演, ?~1104) 문하에 들어갔다. 그런데 법연은 제자에게 공부는 가르치지 않고, 하루 종일 일만 시켰다. 간혹 극근이 법에 대해 물으면, 스승 법연은 몽둥이로 때리기가 일쑤였다. 참다못한 극근은 결국 스승을 하직하고 나와서는 10년 가량 병을 앓으며 고생하였다. 힘들었던 10년간의 병고와 고생이 결국 자신을 위한 방편이었음을 깨닫고, 다시 스승 법연에게 돌아갔다. 그 깨닫게 된 기연이 흥미롭다.  

법연의 옛 친구 진 씨가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인 쓰촨성으로 가는 도중 태평산에 들렀다. 법연은 친구에게 다음의 소염시(小艶詩)를 들려주었다.

한 폭의 아리따운 모습 그려내지 못하는데/ 골방 깊은 곳에서 사모의 정에 애가 타네./ 소옥을 자주 부르지만, 소옥에게는 일이 없네./ 단지 낭군에게 제 목소리 알리기 위한 소리일 뿐. (一段風光畵不成  洞房深處陳愁情  頻呼小玉元無事  只要檀郞認得聲)

이 시는 당나라 현종이 총애하던 애첩 양귀비를 소재로 한다. 양귀비는 안녹산과 정을 나누는 사이였다. 안녹산이 그리워도 불러올 상황이 아닌지라, 몸종 소옥이를 불러 담 밖에 있는 안녹산에게 자기 목소리를 들려줌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자 함이다. 여기서 ‘소옥아! 소옥아’하고 부를 때, 낭군이 알아듣는 것은 ‘소옥’이라는 관념이 아니라,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라는 것이다. 즉 말을 듣고 그 말의 의미관념을 따르지 말고, 말의 근원을 파악하라는 법연의 가르침이다. 그런데 이 시를 들은 진씨는 깨닫지 못했으나 옆에서 듣고 있던 극근이 듣고 깨달았던 것이다. 진 씨가 물러나고 극근이 법연에게 물었다.  

“스님께서 소염의 시를 들려줄 때, 친구 분께서 선의 참뜻을 알았을까요?” 
“그 사람은 다만 소리만 들었을 뿐이다.” 
“그러면 그가 낭군 부르는 소리를 들었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왜 안 하셨습니까?” 
법연은 갑자기 소리를 높여 이렇게 자문자답했다. “어떤 것이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인가? 뜰 앞의 잣나무니라.”

극근이 스승의 말을 듣고 문 밖으로 나왔는데, 마침 난간에 수탉 한 마리가 날개를 치며 길게 우는 소리를 내었다. 극근은 이 소리를 듣고 깨달았다. 

40세인 1102년, 극근은 자신의 고향인 쓰촨성 성도 소각사(昭覺寺)에 머물렀다. 당시 정치인 장상영(1043~1122)과 장준(1086~1154)의 귀의를 받았다. 

62세, 1124년에 극근은 하남성 개봉 천녕 만수사(萬壽寺)에 주석하였다. 이후 호남성 협산사 영천선원과 도림사 등지에 머물렀다. 영천선원에서 극근은 제자를 지도하면서 〈벽암록〉을 완성하였다(1125년). 극근이 머물던 당우 ‘벽암(碧巖)’이라는 편액을 따서 〈벽암록〉이라고 하였다. 만년에 극근은 자신의 고향인 성도 소각사에 머물다 세수 73세, 법랍 55세로 입적하였다. 남송의 고종이 진각선사(眞覺禪師)라는 호를 내렸다. 저서에 〈원오심요(圓悟心要)〉가 있다.

극근이 머무는 곳에는 늘 1천여 명의 제자와 재가자들이 있었는데, 대표 제자로는 대혜종고(1089~1163)와 호구소융(1077~1136)이 있다.  

〈원오심요〉의 사상과 특징
〈원오심요〉의 원명은 〈불과원오진각선사심요〉로서 상·하권 합쳐 143편의 글이 실려 있다. 법을 묻는 제자들과 사대부들과의 편지글 서간문이다. 당시 재가자들의 선이 유행하여 이 가운데 사대부들과 나눈 편지가 42편이다. 극근은 선자의 본분 자세나 선지식으로서 갖춰야할 자세 등을 편지 받는 사람의 근기에 맞춰 자세하게 제시해주고 있다.

특히 이 심요에서 재가자나 출가자 모두에게 화두 참선을 권하고 있으며, 여러 개의 공안들을 제시하는 가운데 무자 참구를 강조하고 있다. 이 책에서 극근은 조사들의 공안과 기연 언구들을 제시해주고, 이를 지표 삼아 구경(究竟)을 직하(直下)에 깨닫도록 강조하였다. 이 책은 대혜가 간화선이 성립할 수 있도록 교량역할을 해주었다. 극근이 이 책자를 통해 임제종의 중흥을 위해 노력하면서 동시에 공안참구에 조직적인 체계를 세우는 작업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몇 편의 서간문을 소개하기로 한다. 

신 시자에게 주는 글
움직임과 고요함, 가고 옴이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니, 자유자재하도록 놓아 버려라. 법에 매일 것도 없고 법을 벗어나려 할 것도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한 덩어리를 이루었는데, 어느 곳에 불법을 떠난 밖에 따로 세간법이 있으며, 세간법을 떠난 밖에 별도의 불법이 있겠는가? 이에 조사께서 곧바로 사람의 마음을 가리켰던 것이다. 

인 선인에게 주는 글
병고가 몸에 있으면 마음을 잘 거두고 바깥의 경계에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마음속에서도 생각을 일으키지 말고, 생사의 일은 크며 죽음은 신속하다[無常]는 것을 항시 염두에 두어 잠시도 게으름을 피워서는 안 된다. 화[嗔心] 한 번 내더라도 삼업에서는 큰 허물이니, 혹시 좋거나 싫음이 있더라도 절대로 마음을 내지 말아야 한다. 항상 자기를 비우고 마음을 바르게 해서 밖에서 와서 부딪치는 것을 마치 빈 배나 뒹구는 기왓장처럼 보면, 바깥 물건과 내가 모두 고요하여 마음이 요동하지 않는 경지에 도달할 것이다. 

〈벽암록〉의 특징 및 사상 
〈벽암록〉의 나오면서 수행자들을 지도하는 이른바 평창(評唱, 해석)이라는 강의 형태가 생겼다. 설두중현이 〈경덕전등록〉에서 뽑은 공안 〈송고 100칙〉을 극근이 매우 높이 평가하며, 제자들에게 강의했던 강의록이 〈벽암록〉이다. 이 〈벽암록〉이 선종사에 끼친 영향을 살펴보자.

〈벽암록〉은 극근의 제자에 의해 편찬되었는데, 세상에 나오자마자 널리 알려졌다. 간화선의 선구자인 대혜는 참선자들과 대화를 하는 도중, 그 수행자가 유창하게 말을 잘 해서 정말로 깨달은 줄 알고 시험해보면 그것이 실제 참선해서 깨달은 것이 아니라 〈벽암록〉 내용을 반복 암기한 것임을 알고 탄식하였다. 

그래서 대혜는 ‘이렇게 〈벽암록〉의 글귀만을 외우고 암기한다면 공안선이 아니라 구두선(口頭禪, 입으로만 선을 아는 것)에 떨어지고 말겠구나’라고 탄식하고 〈벽암록〉 판목을 모아 불태웠다고 한다. 그러나 〈벽암록〉이 결코 과소평가되는 선종서가 아니다. 〈벽암록〉 이후 조동종계에서 〈종용록〉 〈공곡집〉 〈허당집〉 등 비슷한 공안집이 출현했다. 또한 송대 이후 근자에 이르기까지 동아시아 선자들의 ‘종문(宗門) 제일서(第一書)’로 불린다.    

다선일미 
극근이 남긴 또 하나의 사상이 ‘다선일미(茶禪一味)’이다. 육우(727~808?)는 〈다경(茶經)〉에서 “덕이 있는 사람이 마시기에 가장 적당한 것이 차”라고 할 정도로 차 마시는 것 자체를 수행과 결부시켰다. 귀로 찻물 끓이는 소리를 듣고, 코로 향기를 맡으며, 눈으로 다구와 차를 보고, 입으로 차를 맛보며, 손으로 찻잔의 감촉을 즐기기 때문이다.

다선일미(茶禪一味)는 찻물을 끓이고 차를 마시는 모든 행동 하나하나가 마치 참선하는 마음상태와 같다는 데서 유래되었다. 물론 극근 이전부터 차와 관련된 공안(茶飯事·喫茶去)이 많았지만 차를 마시는 행위와 수행(禪)을 하나라고 보면서 다선일미가 저변화되었는데, 이는 극근에 의해서 시도되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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