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8일 별세한 선진규 법사
마지막까지 현장 떠나지 않은
재가불자 선생님이자 선배님

생전 조성한 ‘호미 든 관음상’
‘시대 변화’ 요구 원력 담겨져?

“베풀며 욕먹을 언행 말라”는?
선진규 법사 수행수칙 되새겨야

늘 옆에 계셨고, 그래서 내일도 우리 곁에 여전히 서 계실 줄 알았다. 멀리 살지도 않으면서, 한번 뵈러 가야지 하는 생각만 가끔씩 떠올렸다. 그러다 여러 불사(佛事)의 현장에서 뵙게 되면, “자주 가서 뵙지 못해 죄송합니다”는 소리로 얼버무리곤 했다. 그럴 때면 “내 찾아올 시간 있으면, 게을리 사는 게지”라고 했던 눈에 선한 그 모습!


오랜만에 연구실을 찾아온 선진규 법사의 외손주 병주 군과 함께한 자리서 법사님 타계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 아차 하는 생각이 먼저 앞섰다. 근현대 한국불교의 역사는 어찌 보면 고난과 역경의 세월이었지만, 또 어찌 보면 출재가를 막론하고 수많은 선지식을 가질 수 있어서 행복했던 역사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김해 봉화산 정토원 선진규 법사! 현장에서 활동하면서, 그 현장을 우리에게 전하기 위해 애썼던 재가의 선생님이자 아득한 선배님! 이것이 동국대 불교학과에서 배웠던 후배들이 가지고 있는 법사님의 이미지이다. 일반인들에게는 불교계의 재가 사회운동가보다는 故 노무현 대통령의 정신적 후원자라는 이미지가 더 많이 알려져 있다. 하지만 당신 스스로는 86살이셨던 바로 작년까지도 불교사회운동의 일선 현장을 떠나지 않으셨던 사회 최일선의 젊은 실천가이셨던 분이다.

故 노무현 대통령의 생가마을로 잘 알려진 김해 봉하마을 옆 나지막한 봉화산 산봉우리에는 특이한 모습의 관세음보살상 한 분이 봉하마을을 내려다보고 계신다. 관세음보살은 정병을 들고 있거나 버드나무 가지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되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 산의 관세음보살상은 왼손에는 정병을 오른손에는 호미를 들고 있다. 1959년 4월 5일, 법사님의 제안과 당시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선후배들의 동참으로 모셔진 보살님이다. 이름도 ‘호미 든 관음성상’이다. 

관세음보살님은 왜 호미를 들었을까? 호미 든 관음성상을 모신 지 50여 년째에 쓴 선진규 법사님의 자작시 〈울음〉에서 그 심정을 “배고파 보릿고개 넘지 못하는 헐벗은 산야에/ 할 수 없이 우리는 부처님 손에 호미를 들게 하고 울었습니다”라고 토로하신 바 있다. 한국전쟁의 직후, 정치도 사회도 혼란스러웠고, 우리 사회의 마지막 안전망이 되어야 할 불교계마저도 정화불사로 한 치 앞을 헤아리기 힘들었던 시절, 청년 불자의 심정은 ‘울음’ 아니 ‘웃음을 주고 싶었던 간절한 울음’ 그것에 다름 아니었을 것이다. 

‘호미 든 관음성상’은 그 혼란스러웠던 시대의 고통의 바다 보릿고개를 숨차게 넘어갈 수밖에 없었던 대한민국 중생들의 삶을 바꾸어야 한다는, 시대를 앞섰던 젊은 불자가 호기롭게 내보인 원력의 표현이었다. 벌써 60여 년, 그 젊은 불자는 여전히 젊은 불자로 우리 머리에 남겨져 있는데, 속절없이 우리네 곁을 떠났다. 하지만 우리네 곁을 떠나는 지금에도 그를 여전히 시대에 앞서 있는 선지식으로 우리 곁에 남겨두고 싶다면 지나친 기대일까. 

60여 년을 불국토의 꿈을 내려놓지 못하고 청년으로만 살아야 했던 그 간절한 원력의 실천자이자 동행자였던 그 분이 우리에게 짤막한 회향사를 남겼다. 정토원 사부대중의 수행수칙과 수행목표라는 이름으로. 그가 평생의 서원으로 삼았던 현생국토의 꿈을 담은 수행수칙을 함께 공유하는 것으로, 지면으로나마 청년 선진규 법사의 정신을 기린다. 정토원 사부대중에 남기신 수행수칙이지만, 우리 한국의 청년이어야 할 불자들에게 새기고 싶은 말이기도 하다.  

1. 내 자신이 나에게 미안한 짓 하지 말자.
2. 남에게 욕먹을 언행 하지 말자.
3. 한없이 능력껏 베풀되 돌아보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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