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미얀마 지도자들의 불심2
아웅산 수지 국가 고문 등
가택연금 시 위빠사나명상
불자 우 탄트 UN사무총장
매일 경전 독송?명상 수행
삶 자체가 불교사상 기반

우탄트 하우스.

다른 신남방정책 국가들에 비해 유독 미얀마는 한국과 비슷한 역사를 가진 나라이다. 미얀마 역사에서 비슷한 키워드를 찾을 수 있다. 바로 ‘UN’ 과 ‘민주화’라는 두 단어이다. 미얀마는 우리나라보다 일찍 제 3대 'UN 사무총장'을 배출한 나라이다. 미얀마 양곤에 가면 아시아인 최초로 UN 사무총장을 지냈던 우 탄트(U Thant)의 박물관을 발견할 수 있다. 양곤대학교 입학시험을 준비하러 갔을 때, 우 탄트 박물관을 거닐다가 그의 손자인 탄트민-우(Thant Myint-U)를 만나 적이 있다. 오랫동안 만나보고 싶었는데 우연히 만나게 되어 하고 싶은 말을 다 못 한 기억이 있다. 나중에 유학생활 중 그를 만나면 그동안 질문하고 싶었던 부분에 대해 마음껏 물어보고 싶다.

미얀마에서 유학생활을 하면서 놀랐던 점 한가지는, 미얀마의 민주화 운동 속에 한국의 민주화 운동의 숨결이 녹아 있다는 점이었다. 같이 사는 미얀마 룸메이트 언니는 미얀마 민주화 운동을 위해 자신의 젊은 시절을 헌신한 언니다. 어느 날, 언니가 아침에 다리미질을 하면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미얀마어로 불러서 매우 놀랐던 기억이 있다. 그러면서 나에게 ‘이거, 한국의 민주화 운동을 대표하는 노래 맞지? 미얀마에서도 한국의 민주화 운동에 많은 영향을 받았어.’라는 말에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한국에 있는 미얀마 사람들이 불렀을 때는 한국에서 들은 ‘임을 위한 행진곡’을 번역해서 한국에서만 부른 줄 알았다. 알고 보니, 미얀마 현지에서 미얀마 민주화 운동을 위해 부르던 노래였다는 것을 알고 난 후 느꼈던 신선한 충격을 잊을 수가 없다.

우탄트 하우스

우리나라와 비슷한 키워드를 가진 ‘UN’ 과 ‘민주화’에서도 미얀마에서는 ‘불교’를 빼놓고 말할 수가 없다. 미얀마의 ‘UN’과 ‘민주화’의 지도자 역시, 신실한 불자(佛者)였기 때문이다. 아시아인 최초로 UN사무총장을 지냈던 우 탄트와 미얀마 민주화를 이룩한 민주화의 어머니 아웅산 수지(Aung San Suu Kyi)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종교를 통해 오랫동안 구성된 개인과 사회 전체의 세계관은 다른 이유로 구성된 세계관에 비해 쉽게 깨지지 않으며 각기 다른 결정 속에서도 비슷한 성향의 결정을 내린다. ‘우 탄트·아웅산 수지’의 공통적인 특징은 자신들의 상황 속에서 '불교사상을 바탕으로 한 평화'를 추구했다는 점이다.

미얀마 국민들이 자부심을 갖는 미얀마 인물 중 한 사람인 우 탄트는 세계적으로도 매우 유명하다. 그는 개발도상국·아시아인 최초로 UN사무총장을 지냈다. 그 뿐만이 아니라 그의 사무총장의 역할로 인해 세계적으로 큰 전쟁이 일어날 수 있었던 ‘쿠바 미사일 위기’를 평화롭게 해결하면서 ‘세계 평화의 중재자’라는 명성을 얻었다. 그리고 그는 재임기간 중에 네팔의 룸비니 동산을 성역화 하여 불자들만의 성지가 아닌 전 세계인들의 평화의 성지가 되었다. 그와 함께 일했던 많은 동료들은 그와 관련된 수 많은 인터뷰에서 ‘우탄트와 함께 일하면서 종교적인 힘을 느꼈다’라는 대답을 할 정도로, 불자가 아닌 사람이 봐도 그의 생각과 말 그리고 행동 속에서 불교의 힘을 느꼈다.

우탄트 UN전 사무총장.

우탄트 스스로 자신의 UN사무총장직을 회고하면서 쓴 글에 ‘UN사무총장으로서 역할을 했던 나의 생각을 이해하려면, 나의 종교적·문화적 배경의 본질을 이해해야 한다.’라고 서술했다. 그는 매일 명상과 경전 독송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그는 삶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연기(緣起)사상을 바탕으로 이해했다. 그리고 또한 일체만물에 대한 안녕과 평화를 기원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중생들에게 연민과 자비심을 갖는 것도 그의 일상생활 속에서는 매우 중요했다. 하루 하루의 삶 속에서 그의 불교적 수행과 가치관은 그가 수행하는 UN사무총장이 논의하고 결정해야 하는 상황 속에서 그의 언어와 행동으로 자연스럽게 표현되어 주변사람들에게 전해지게 되었다.

영국인과 결혼한 아웅산 수지가 불자였어?

아웅산 수지.

아웅산 수지 국가고문은 미얀마 민주화 운동을 이끈 ‘미얀마 민주화 운동의 어머니’이다. 아웅산 수지가 미얀마 대통령이 되지 못 하고, 대통령 위의 권력인 국가고문으로 존재하는 것은 군부들이 만든 ‘외국인과 결혼해 미얀마 국적이 아닌 자녀를 둔 미얀마 사람은 대통령 총선 출마자격이 없다’라는 헌법 때문이다. 아웅산 수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종종 나에게 어떤 사람들은 ‘영국인과 결혼한 거 보면 불자가 아니지 않아?’ 혹은 ‘영국 생활 오래 해서 불자라고 할 수 있어?’라며 말도 안 되는 말을 한다. 미얀마 사람들의 불심이 오죽했으면, 영국인들이 ‘미얀마인이 된다는 것은 곧 불자가 된다는 것이다.’라는 말을 했을까? 아웅산 수지는 미얀마 사람으로 정체성이 매우 강했다. 영국에서 생활할 동안 그녀는 미얀마 론지(미얀마 여성 전통 복장)을 매일 입었으며, 고국의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아주 높았다.

미얀마 민주화운동 동안 그녀는 군부로부터 수 많은 가택연금을 당했는데, 그 때 그녀를 정신적으로 지켜준 것은 다름이 아니라 위빠사나 명상이었다. 그녀는 가택연금을 당하기 하루 전, 우빤디타 큰 스님을 친견(親見)하였고 스님은 그녀에게 가택연금을 당할 동안 '위빠사나'를 할 것을 당부했다. 또한 아웅산 수지는 이 만남을 통해 부처님의 가르침인 팔정도인 정어(正語)와 정념(正念)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정어를 통하여 진실의 중요성을, 정념을 통해서는 모든 일에 있어 중도를 지켜야 한다는 점을 자신의 정치사상으로 삼았다. 아웅산 수지의 가택연금 이후에도 그녀가 이끄는 NLD 정당의 당원들도 감옥에 투옥되었는데, 그들도 아웅산 수지와 함께 감옥에서 위빠사나 명상을 했다. 이러한 위빠사나 명상은 곧 미얀마 민주화 운동 인사들 사이에서 정치적인 제도와 같이 정신적인 제도화가 되었다.

아웅산수지

가택연금 시기에 매일 명상을 한 것은 그녀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아웅산 수지는 명상을 통하여 정신적인 힘을 얻고 마음을 다스리는 법을 배웠다. 가택연금 전후의 연설을 비교하여 확인 할 수 있다. 수지는 명상을 수행하기 전 1989년 6월 연설에서 격양된 어조로 네윈을 비판했다. 수지는 가택연금 동안 명상을 통해 자신의 변화를 이끌어 냈다. 가택 연금 후 네윈을 규탄할 때 사용하던 격렬한 어조는 다시 나오지 않았다. 만약 네윈을 거칠게 비판했던 연설 전에 우 빤디따 스님의 가르침을 들었다면 네윈을 향한 거친 언사는 없었고 그녀는 가택연금이 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아웅산 수지는 또한 민주화 운동 기간동안 자신을 인터뷰하러 온 사람들에게 ‘미얀마 민주화 운동’은 불교적 사상에 기반한 ‘정신혁명(아웅산 수지는 서양 사람들에게 팔정도의 정념과 정견에 도달하는 것을 정신혁명(revolution of spirit)이라는 단어로 치환하여 사용)’과 ‘자비에 바탕을 둔 비폭력운동’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녀가 이끈 민주화 운동이 군부의 폭력에 맞서 싸운 또 다른 폭력운동으로 변질되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자비’에 있다. 그리고 그녀는 수많은 인터뷰에서 '폭력으로 민주화를 성취하면 민주화를 원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폭력으로 또 다시 민주화세력을 무너뜨리고 우리가 권력을 성취 할 수 있다.' 라는 생각을 심어줄 수 있기 때문에 폭력으로 맞서 싸우지 않는다고 언급했다. 아웅산 수지는 '자비'를 말하는 것이 정치인으로서 추상적이지 않느냐는 질문에는 정치에서 자비란 '실천적인 선의(善意)' 라고 대답했다.

우 탄트와 아웅산 수치가 자신의 분야에서 '평화'를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은 미얀마의 오래된 전통이자 사상과 문화의 근원인 '불교'의 힘에 있다. 그들은 매일 명상을 하며, 부처님께서 설하신 자비에 관한 이야기를 생활 속에서 상기시키고자 한다. 미얀마 민주화의 시간은 다소 느리게 그들에게 찾아갔지만, 그 속에는 부처님의 사상이 현대적 상황에 맞춰 담겨져 있다. 미얀마에 갈 일이 있다면, 미얀마 사람들에게 ‘메타 뽓뻬매(자비를 보낼께요)’라며 빙긋 웃으며 작별인사를 고해보라, 10명 중의 10명은 당신에게 합장을 하며 그들이 가진 가장 아름다운 미소를 그대에게 보여줄 것이다. <양곤대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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