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주객미분전(主客未分前)

“여러분! 대장부는 오늘 당장 본래 아무 일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하느니라. 단지 그대들이 제대로 믿지 못해서 생각마다 밖으로 찾아나서 본래 있는 자기 머리는 버리고 다른 데 가서 머리를 찾으려고 헤매는 꼴이 되어 스스로 쉴 줄을 모르고 있을 뿐이니라. 저 원돈보살(圓頓菩薩)마저 법계에 들어가 몸을 나타내어 정토를 향하면서 범부를 싫어하고 성인을 좋아하니 이런 사람들은 취하고 버리는 마음을 쉬지 못하고 더럽다 깨끗하다 하는 분별심이 남아 있는 것이니라. 하지만 선종의 견해는 그렇지 않아 바로 현재 지금뿐이요. 더 이상 다른 시절이 없는 것이다.

산승이 말하는 것은 모두가 그때그때 병을 따라 약을 쓰는 것일 뿐 따로 실다운 법이 있는 것은 아니다. 만약 이렇게만 알면 이것이 참다운 출가며, 하루에 만 량의 황금도 소화할 수 있느니라.”

‘본래 아무 일이 없다’는 말은 〈육조단경〉에서 처음 시작된 말이다. 본래 한 생각 일어나기 이전의 ‘주객미분전(主客未分前)’을 두고 하는 말이다. 한 생각 일어나면 벌써 망념이 되어 생사심(生死心)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때문에 부질없는 망념으로 스스로의 문제를 만들어 거기에 갇히지 말라는 말이다. 중생은 곧잘 미혹한 생각을 일으켜 자신의 감옥을 만들어 그 속에 갇혀버린다. 깨닫는 순간을 “앞생각 뒷생각이 끊어진다(前念後念斷)”고 표현하는 말도 있고 또 생멸이 본래 없다는 뜻을 시간적으로 표현해 “전제(前際)에 생겨난 것이 아니며 후제(後際)에 소멸되는 것이 아니다(非前際生 非後際滅)”는 말도 〈기신론〉 등에 설해져 있다. 과거 어느 때 생긴 것도 아니고 미래 어느 때 없어지는 것도 아니라는 말로 마치 허공처럼 생멸이 없다는 것이다. 생멸을 떠나 불생불멸을 얻는 것이 불법의 핵심이다. 이를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는다고도 한다.

“자기 머리를 버리고 다른 데 가서 머리를 찾는다”는 말은 〈능엄경〉에 나오는 ‘연야달다(演若達多)’ 이야기다. 〈능엄경〉 4권에 나오는 이야기로 실라벌성에 연야달다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아침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고 미목(眉目)의 아름다움을 좋아하다가 머리를 돌리니 보이지 않았다. 갑자기 광기가 발동한 연야달다는 자기의 머리가 없어졌다고 머리를 찾아 거리를 뛰쳐나갔다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자신 안에 본래 가지고 있던 것을 없다고 여겨 밖으로 나가 찾는 어리석음을 비유한 것이다. 경에서는 또 “미친 마음이 쉬면 곧 보리(狂心歇卽菩提)”라는 말도 나온다. 연야달다가 광기가 발동하여 머리가 없어졌다고 찾아 헤맸을 뿐 제 머리는 잃어버리지 않았다는 뜻이다.

돈오를 내세우는 선종에서는 수행의 지위를 두지 않는다. “한 번 뛰어 바로 여래지에 들어간다(一超直入如來地)”하여 찰나에 깨달음을 얻는다 한다. 경절문(徑截門)이라 하여 둘러가는 방편의 길을 모두 버리고 가장 빠른 지름길을 가는 방법을 쓴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간화선(看話禪)에서 화두(話頭)를 드는 것이다. 고려 보조국사 지눌의 〈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에 무자(無字) 화두에 대하여 말하기를 “화두를 공부하여 가장 빠르게 깨닫는 선문(禪門)의 방법에 있어서 화두라는 것은 모두 불법(佛法)을 알음아리(知解)로 이해하려는 병통을 가려내는 수단이다. 그러므로 무자(無字) 화두는 마치 가까이하면 얼굴까지 태워 없애는 한 덩어리 불과 같다. 거기에는 불법에 대한 알음아리가 붙을 여지가 없다. 그러므로 간화선의 완성자인 대혜종고(大慧宗苑) 선사는 이 무자는 악지악해(惡知惡解)를 쳐부수는 무기라고 했다”고 하였다. 수행의 깊은 경지는 체험을 통하여 얻어지므로, 말로 설명하는 것은 수행을 할 수 있도록 이해시키는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 게다가 그 방편도 병에 따라 처방하는 약일 뿐 수행 자체에 어떤 법도 실법(實法)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임제는 이것을 알아야 진정한 출가자가 되며 시은(施恩)을 소화해 낼 수 있는 사람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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