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연기적 정치현상

‘대치동은 서울대를 안가요. 의대를 가지’라는 기사가 얼마 전에 언론에 게재됐다. 교육 1번지 대치동은 서울대보다 어느 의대든 전국의 의대를 한 등급 더 높게 보고 있다는 내용이다. ‘교육 문제에 관해선 온 국민이 전문가’라는 우스개소리도 있다. 자녀를 키우다보니 교육 문제에 몰두하지 않을 수 없고 교육 전문가가 된다는 말이다.

대치동 집값은 최근 엄청나게 폭등하여 교육열이 있다고 아무나 진입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대치동 오피스텔은 지방 학생이 대치동 학원 과외를 위해 방학 때 거주하기 위한 장소로 인기가 높다. 이 마저도 소득이 낮은 부모는 꿈도 꿔보지 못할 일이다. 사교육 때문에 대졸 주부가 파출부 부업을 하는 사례도 있다. 흔히 사교육비를 잡아야 한다며 망국적 사교육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리더 만의 책임 지우기
구성원 책임 회피 일환
공동체 함께 만드는 것

사교육비를 잡으면 교육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까? 혹시 사교육비가 교육 문제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가 아닐까? 대학입시제도를 개혁하면 교육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까? 대학입시제도를 개혁하면 사교육비가 잡힐 수 있을까?

자식을 명문대로 보내려면 ‘첫째 할아버지의 재력, 둘째 엄마의 정보력, 셋째 아빠의 무관심’이라는 말이 있다. 대치동에 살 수 있는가 없는가의 문제는 결국 재력의 문제이고 빈부격차의 문제이다. 그렇다면 교육 문제의 원인에 빈부격차도 포함 되어야 한다. 하지만 부자가 사는 동네라고 모두 대치동이 아닌 것을 보면 교육 문제는 부동산 문제이기도 하다. 도대체 무엇이 원인이고 무엇이 결과일까?

사회현상을 과학적으로 연구하자는게 사회과학이다. 과거에 사회과학자들은 아주 단편적이고 단선적인 사고에 젖어 있었다. 예를 들어 ‘A를 하면 B가 된다’ 혹은 ‘A를 고치면 B가 좋아진다’라는 식의 장난감 병정놀이로 세상을 보았다. 세상이 기계처럼 작동한다고 보던 관점이 세상은 생물체와 같다는 유기체적 관점으로 바뀐지도 얼마 되지 않는다. 입시제도만 바꾸면 교육 문제가 해결될 것 같아 입시제도를 이리 저리 고쳐봐도 별 효과가 없다. 교육 문제는 대학서열화 문제라는 진단도 있다. 대학을 평준화하면 교육 문제가 해결될까?

연기법에 의하면 교육 문제는 수많은 원인과 조건이 어우러져 발생하며 그마저도 수시로 바뀌기 때문에 고정된 것이 없다. 교육 문제는 경제 문제와도 관련돼 있으며 무엇이 원인이고 결과라기보다 서로 원인이 되고 결과가 된다. 이러한 사회과학적 관점을 잘 설명하기 위해 물리학의 복잡계 이론이 동원되기도 했지만 최근까지도 복잡계 이론이 사회과학적 분석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지는 않다.

정치현상도 교육 문제처럼 수많은 원인과 조건에 의해 형성되는 일시적 현상이다. 정치현상은 마치 진화하는 생물처럼 끊임없이 성격을 바꾸면서 변화한다. 정치 문제가 경제 문제이기도 하고 경제 문제가 정치 문제이기도 하다. 교육 문제도 정치 문제와 전혀 무관하지는 않다. 우리가 불교적 세계관을 받아들인다면 연기법에 의해 정치현상도 분석하고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부처님은 연기법을 만든게 아니라 이미 존재하고 있던 법칙을 당신이 발견하신 것에 불과하다고 말씀하셨다. 따라서 연기법은 불교의 과학적 법칙이다. 연기법은 세계관이기도 하지만 인간관이기도 하다. 연기법은 인간과 세상에 적용되는 불교의 과학이론이다. 연기법에서 도출되는 불교적 인간관이 최근 자연과학의 연구결과와 부합하고 연기법에서 도출되는 불교적 세계관이 최근 사회과학의 관점과 부합한다.

농경시대에 강수량은 농업을 위한 생명줄이었다. 비가 오지 않을 때 백성은 나랏님을 탓할 때가 많았다. 나랏님이 부덕하고 정치를 잘못하면 비가 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과연 문제가 발생할 때 리더의 책임은 몇 퍼센트가 될까? 조직이 성공할 때 리더의 기여는 몇 퍼센트가 될까? 모든 것이 리더에게 달렸다고 생각하는 관점도 있다.

정치가 잘못되면 우리는 온통 리더를 탓한다. 정치인은 그야말로 동네북이다. 종교인과 정치인은 정반대로 취급 받는듯 하다. 아무리 형편없는 사람도 종교인이 되면 기본적인 존경을 받는다. 아무리 괜찮은 사람도 정치인이 되면 욕을 먹는다. 종교인은 도매금으로 격상되고 정치인은 도매금으로 격하된다.

연기의 세계에서 모든 사물과 현상은 독자적 실체가 없다. 수많은 원인과 조건이 어우러져 임시 화합한 결과일 뿐이므로 고유한 성격을 가진 실체가 있을 수 없다. 정치란 정치인과 국민이 모두 참여하여 만들어내는 일시적 현상의 연속이다. 정치가 잘못되었다면 리더의 탓만은 아니다. 리더와 국민 모두의 책임이고, 리더와 국민 모두의 책임만도 아니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외부 환경, 역사적 맥락 등도 있다. 따라서 정치가 잘못되면 ‘좋은 정치란 정치인과 국민의 공동 생산물’이라는 생각을 먼저 가져야 한다.

불교의 인간관을 보면 인간은 해탈하지 않는 한 비이성적 비합리적이며 충동적이고 일관성이 없다. 이러한 인간이 선출한 정치인은 한심할 수밖에 없다. 정치인은 귀신처럼 인간의 불완전성을 파악하고 교묘하게 유권자를 조종하려고 한다. 정치인은 국민의 거울이지만 정치인이 평균적으로 국민보다 수준이 낮은 이유는 그들의 조종술과 왜곡 기술이 국민의 불완전성 보다 더 뛰어나기 때문이 아닐까? 정치인도 좋은 정치인이 되어야 하는 것처럼 국민도 좋은 유권자가 되어야 한다.

“내가 젊고 자유로워서 상상력의 한계가 없을 때 나는 세상을 변화시키겠다는 꿈을 가졌었다. 그러나 좀 더 나이가 들고 지혜를 얻었을 때 나는 세상이 변하지 않으리란 것을 알았다. 그래서 시야를 좀 더 좁혀 내가 살고 있는 나라를 변화시키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그것 역시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알았다. 나는 마지막 시도로 나와 가장 가까운 내 가족을 변화시키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아무도 달라지지 않았다. 이제 죽음을 맞기 위해 자리에 누워 문득 깨닫는다. 만약 내가 나 자신을 먼저 변화시켰더라면 그것을 보고 가족들이 변화되었을 것을…. 또한 그것에 용기를 내어 내 나라를 더 좋은 곳으로 바꿀 수도 있었을 것을…. 그리고 누가 아는가? 이 세상까지도 변화시켰을지. 모든 것은 나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모든 것은 내 안의 문제다.”

웨스트민스터 지하에 있는 어느 주교의 묘지 비석에 있는 글이라고 한다. 나는 처음 이 글을 접하고 크게 감동했다. 아름답고 감동적인 글 중엔 전혀 도움이 안되는 글이 있는데 이 글도 그 중 하나다. 나는 더 이상 이 글에 감동을 받지 않는다. 과연 우리가 세상의 문제와 불공정에 대해서 이런 식의 사고방식을 가질 필요가 있을까? 억울하게 쫓겨난 직장인이, 대학을 졸업하고 10년이 넘도록 계약직으로 사는 비정규직이, 그리고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 3포 세대가 ‘모든 것은 나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모든 것은 내 안의 문제다’라고 스스로 자책해야한단 말인가?

세상을 바꾸기 전에 나부터 변해야 한다는 말은 맞는 말 같지만 불교가 배격하는 이분법적 흑백논리에 빠져 있는 말이다. 나와 세상은 분리되어 있지 않고 상호의존적이다. 세상과 나라는 이분법을 떠나 연기의 실상을 깨닫는 것이 불교의 지혜다. <잡아함경>에는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기므로 저것이 생긴다.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고,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도 사라진다’라고 연기법이 설해져 있다. 세상이 있으므로 내가 있고 내가 있으므로 세상이 있으며 세상이 없으면 나도 없고 내가 없으면 세상도 없다.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선 내가 먼저 바뀌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세상이 먼저 바뀌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나도 바뀌고 세상도 바뀌어야 한다. 세상은 바뀌지 않으니 나부터 변해야 한다고 자기 삶 속에 둥지를 틀면 세상의 기존 구조는 더욱 견고하게 변화한다. 불교를 세상으로부터의 도피로 오해한다면 부처님의 연기법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세상이 악화 될수록 사람들은 좌절하고 세상의 변화보다는 자기 속으로 더욱 움추려 든다. ‘모든 것은 나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모든 것은 내 안의 문제다’라는 말은 세상의 강자가 약자에게 건네주는 마약이다. ‘너희들 세상을 바꾸려고 노력하지 마. 아무 소용없거든. 모든 것은 네 탓이야. 너부터 변해. 노…오…력이 부족해’라고 속삭인다. 그말은 ‘너희들은 세상을 바꿀 수 없어. 그러니 집에서 자기 탓이나 해’라는 말이다.

부자 중에 최고의 부자를 지칭하여 ‘수퍼리치’라고 한다. 자가용 비행기와 요트가 있어야 수퍼리치로 대우해준다. 이들은 전세계 여기 저기에 재산을 분산시켜 놓고 어떤 세상이 오더라도 살아갈 수 있게 준비 해 놓고 산다. 국적도 여러 개 가질 수 있기 때문에 자가용 비행기와 요트를 타고 전세계를 누비면서 산다. 이들의 투표율은 90%가 넘는다고 한다. 이들은 단 한표의 행사를 위해 귀찮음을 무릎쓰고 투표장을 방문한다. 수퍼리치의 이러한 정치적 적극성은 우리에게 많은 생각이 들게 만든다.

정치무관심과 정치혐오증이라는 자해 행위에서 벗어나 정치에 적극 참여하여 정치의 긍정적인 에너지를 이용해야 한다. 2010년을 기준으로 볼 때 자식이 부모에게 주는 용돈보다 국가에서 주는 돈이 2배 이상이라고 전승훈과 박승준은 논문에서 분석하고 있다. 국가에서 주는 돈은 공적연금, 기초노령연금, 기초생활보장급여에 근거하는데 모두 정부가 정책으로 채택한 결과이다. 정치가 밥 먹여준다. 모든 것이 변하는 연기의 세계에서 정치도 바뀌어야 한다. 다만 좋은 방향으로 바뀌어야 한다. 불교의 지혜는 정치에 관해 과연 무엇이라고 말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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