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 차문화 주도한 현장
수행승들, 차 문화는 물론
이론에도 밝은 전문가집단
당시 승려들이 남긴 詩文서
전반적인 고려 차문화 확인

대각국사 진영, 선암사 소장

고려시대 사찰은 차 문화를 주도했던 문화 현장이었다. 수행승들은 차에 알맞은 물을 선택하는 안목뿐 아니라 차 이론에도 밝은 전문가 집단이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승원(僧院)은 문화의 공간으로써, 수행승과 가깝게 교유했던 문인들이 모여든 문화 공간이며 명전(茗戰)이 자주 펼쳐진 차 문화의 현장이었다. 따라서 고려 시대 차 문화를 주도했던 승려들의 음다의 흔적은 이 시대의 차 문화를 살펴볼 수 있는 원천 자료인 것이다. 더구나 고려 시대에는 불교계의 영향력이 정치, 경제, 문화, 사회 전반에 미쳤으니 가히 왕실의 권위에 짝할 만하였다. 그러므로 고려 시대 차 문화사는 수행승들이 차를 즐긴 흔적이나 영향력을 주도했다기에  그들이 남긴 시문은 차의 가치, 응용 등, 전반적인 고려 시대 차 문화의 흐름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게 다룰 주제라고 생각한다.

특히 왕족인 대각국사 의천(1055~1101)은 차뿐 아니라 화엄종의 종주로, 불교계의 영향력을 전반적으로 확대했으며, 불경 간경에도 많은 공적을 남긴 인물이었다. 동시에 차를 즐긴 수행승이기도 했다는 점에서, 그가 〈대각국사문집〉에 남긴 다시(茶詩) 3수와 1편의 표(表)를 통해 11세기 차 문화의 흐름을 살펴볼 수 있다. 특히 그가 남긴 1편의 표(表)는 11세기 송 황제 철종(哲宗, 재위1085~1099)과의 후한 환대 속에 나눈 교유는 물론 황제가 그에 보인 호의와 그가 차를 즐겼던 정황을 살필 수 있고, 아울러 차가 수행승에게 얼마나 중요한 물품이었던 지를 가늠할 사료이다. 따라서 대각국사 의천의 생애를 대략 살펴보는 것은 참으로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그가 영통사 경덕국사 난원(爛圓, 999~1066)에 출가한 것은 11세 때의 일이다. 학계에서는 교학 연구에 치중했던 학승 의천에 대해 불교 전반에 높은 식견을 갖췄다고 평가한다. 특히 노장(老莊)이나 유가에도 깊이 참학(參學)했고, 교학의 중심을 화엄에 두었으며, 신라 화엄종의 전통을 재인식했던 것도 그였다. 〈고려사〉에서는 그가 송으로 구법을 떠난 사연을 소상하게 서술하고 있는데, 부왕은 송으로 구법을 떠나고자 했던 그의 뜻을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그의 형제인 선종(宣宗, 재위 1083~1094)이 왕에 오른 후에도 도당구법에 뜻을 재차 천명했지만 자기 뜻이 이뤄지지 않자 문도 두 명과 함께 몰래 송(宋) 상인 임녕(林寧)의 배를 타고 송에 입성하는 결기를 보인다.

당시 송 황제 철종은 입송(入宋)한 그를 극진하게 환대했고, 고려 왕 또한 환국하는 그를 극진한 의례로 모셨다. 1086년에 귀국하는 그를 맞았던 고려 왕의 정성은 〈고려사〉에 자세히 서술돼 있는데, 바로 “왕이 태후를 모시고 봉은사(奉恩寺)로 나아가 기다렸다. (그를)맞이하여 인도하는 의례의 성대함은 이전과 비교할만한 것이 없었다.(王奉太后 出奉恩寺以待 其迎敭導儀之盛 前古無比)”라고 밝혔다는 점이다. 이는 대각국사 의천의 정치, 종교적 위상과 권위를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다른 일면도 그의 위상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으로, 송 황제가 수행하는 관리까지 동행 시켜 구법 여정에 불편함을 풀어 주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오(吳) 지방의 여러 절을 순방할 때, 가는 곳마다 극진한 예를 표한 것은 황제의 배려 덕분이었다. 이후에도 송 황제는 고려에 사신을 보낼 때, 특별히 의천을 위해 차와 약을 보냈는데, 이런 사실은 의천이 답례로 쓴 〈사사다약표(謝賜茶藥表)〉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금월 13일 중국 사신이 와서 칙지를 전달할 때, 삼가 자상하신 성은을 입어 특별히 어차 12각과 약 1 은합을 하사받았습니다. 황송하게도 몸소 특별히 보살핌을 내리시어 고급 차와 약으로 총애를 보이셨습니다.(臣僧某言 今月 13日 中使至 奉傳勅旨 伏蒙聖慈 特賜御茶二十角 藥一銀合者 無晃凝旒 特紆於睿眷 嫩芽靈藥 優示於寵賜)’
 
윗글에서 짐작하듯이 송 황제가 보낸 차는 용봉단차(團茶)라 생각한다. 11세기 무렵 송나라에서는 정위(丁謂966~1037)에 의해 대용봉단이 생산되어 황제에게 상공(上貢)되었으며, 이어 채양(蔡襄1012~1067)이 소용봉단을 만들어 어공(御供)했다. 그러므로 송 황제는 의천을 위해 극품의 차를 하사했던 것이니 이를 통해서도 그의 위상을 충분히 짐작하게 한다.

금강경장지12폭중(1)12-65

그의 〈농서학사이억임천사시견증 인차운화수(?西學士以憶臨川寺詩見贈 因次韻和酬)〉는 송나라에 갔을 때 임천사를 찾았고, 그때 만난 농서학사에게 화답하여 창수(唱酬)한 시이다. 그가 임천사에서 차를 마시고 시를 짓기에 골몰했던 정황은 한 폭의 그림처럼 묘사하였다.

‘향사 한 구역을 원람이라 부르니(一區香社號鴛藍)
맑고 고요한 산문으로 가는 길, 푸른 산과 마주했네(門徑淸虛對碧岡)
구름서린 울창한 숲 전각을 둘러싸고(密樹貯雲籠象殿)
달빛 어린 얇은 장막, 불좌를 호위하네(薄聖和月護猊床)
소나무 난간에서 강경 마친 뒤 시 읊느라 고심하고(講廻松檻吟魂苦)
다원에서 차 덖기 마치자 타던 속이 시원해지네(焙了茶園渴肺凉)
불법 배우려던 소원 이뤄 산승이 되었지만(掛錫已酬爲學志)
꿈속에선 고향으로 돌아가 옛집을 서성이네(故山還夢舊棲堂)’

원래 향사(香社)란 백거이(白居易 772~846)가 향산의 승려 여만(如滿)과 함께 결성한 시회(詩會)인 향화사(香火社)를 부른 것인데, 약칭하여 향사라고도 한다. 그런데 의천이 말한 향사는 “향사 한 구역을 원람이라 부르니”라고 하였으니 승원을 말하는 것으로, 당시 승원의 배치나 가람의 명칭을 드러낸 대목이라 하겠다. 한편 향사는 향을 올리는 곳이라는 의미로도 쓰이니 사찰을 향사라 부른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임천사는 산간에 위치한 절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의천은 “맑고 고요한 산문으로 가는 길, 푸른 산과 마주했네”라고 했으리라. 더구나 임천사는 다원이 있어 차를 만들던 절이었다. 여기에서 만든 차를 마시자 “타던 속이 시원해진다”고 했다. 그가 속을 태웠던 연유는 바로 시를 짓는 것에 골몰했기 때문이다. 구법을 떠난 수행승, 의천은 그의 소원대로 불법을 배우는 산승이 되어 법을 구하기 위해 송나라의 산하를 떠돌지만 꿈속에도 그린 건 바로 고려의 옛집이었다.

윗글에서 눈에 띄는 대목은 바로 그가 차를 덖는 현장에 있었다는 점이다. 당시 송나라 승방의 새로운 제다 기술과 정보는 이렇게 고려에 흘러들어 고려와 송은 통시적인 차 문화를 향유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의 〈화인이차증승(和人以茶贈僧)〉에는 북원에서 보낸 차를 다리는 즐거움을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북원에서 새로 덖은 차를(北苑移新焙)
동림의 스님께서 보내왔네(東林贈送僧)
차 달일 날, 미리 알았기에(預知閑煮日)
맑은 물줄기를 따라 얼음을 깨노라.(泉脈冷敲氷)’

북원은 어원(御苑)으로, 황제에 공납하는 제다소이다. 차나무와 찻잎의 관리도 관원이 파견되어 관리했다. 그런데 동림사 스님이 이런 귀한 차를 의천에게 보내주었다고 하니 동림의 스님은 의천과 뜻이 통하는 수행자였던가 보다. 더구나 햇차를 보냈다니 그 감동은 말로 드러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런 차를 마시는 날은 한가하여 일이 없는 날이 제격이다. 그래야 차를 다리는데 집중하여 차의 건령을 짐작할 수 있을 터다. 물론 물을 끓이는 일은 차를 다리는데 우선해야할 일이다. 물이 차를 드러내는 근본이란 말은 물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셈이다. 초의선사가 〈동다송(東茶頌)〉에서 “차는 물의 신이요, 물은 차의 체라. 좋은 물이 아니면 차의 신묘함이 드러나지 않고 좋은 차가 아니면 차의 근본을 엿볼 수 없다(茶者水之神 水者茶之體 非眞水 莫顯其神 非眞茶 莫窺其體)”라고 한 것 역시 물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바로 의천 또한 물과 차의 원리를 환하게 알았던 수행자이다. 그러므로 “알맞은 물줄기를 따라 어름을 깬”다 하였다. 또 다른 그의 다시(茶詩) 〈화인사차(和人謝茶)〉에서 “이슬 내린 봄 동산에 무얼 할까나(露苑春峰底事求)/ 차 다려 세상 시름 씻어 낸다(煮花烹月洗塵愁)”라고 했다. 팽화(烹花)는 차를 다린다는 말로, 화(花)는 곧 차 거품을 말한다. 그리고 팽월(烹月)도 둥근 단차를 끓인다는 것이니 이런 차를 마신 의천의 몸은 “몸이 가뿐해 삼통(三洞)에 노니는 것보다 낫다(身輕不後遊三洞)”고 했던 것이다. 삼통(三洞)은 신선세계를 비유하는 말이다.
차와 관련해 “신선의 다품이라 산사에 더욱 잘 어울린다(仙品更宜鐘梵上)”는 표현이야말로 의천의 차에 대한 견해를 확실하게 드러낸 대목이다. 그는 차의 맑은 향기는 술이나 시를 짓는 풍류만을 허락한다고 하였다. 수행자는 성불(成佛)이 목표이기에 단약(丹藥)을 먹고 장생(長生)을 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의천이 수행자로서 차를 즐긴 입장이며, 차를 즐기는 이유였음을 밝힌 것이라 하겠다. <(사)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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