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無字 화두를 참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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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제종 양기파 법맥 계승해
‘홍인의 후신’으로 숭앙받아
‘주조 무자’ 수행 근본 여겨
삶의 지침 ‘법연사계’ 유명

오조 법연의 진영. 오조 법연은 ‘조주 무자’를 선 수행의 근간으로 삼았으며, 높은 덕망으로 ‘홍인의 후신’으로 숭앙받았다.

“세력을 다 부리지 말라. 복을 지나치게 추구하지 말라. 좋은 말도 다하지 말라. 규율을 다 지키지 말라.(勢不可使盡 福不可受盡 好語不可說盡 規矩不可行盡)” 
 
위의 내용은 송나라 때, 오조 법연(五祖法演, 1024~1104)선사의 말씀이다. ‘법연사계(法演四戒)’라고 하여 오래전부터 많은 이들로부터 애용되는 글이다. 어느 해, 법연이 다른 사찰의 조실로 초대되어 도량을 떠나게 되었다. 제자들이 법연을 찾아와 “스님께서 이번에 떠나시면 언제 또 뵙겠습니까? 저희들이 일상에서 살아갈만한 지침을 내려주십시오”라고 간청하자, 위의 네 가지를 말씀하셨다. 

세력을 지나치게 부리면 후회할 일이 생기고, 복을 과하게 추구하면 재앙으로 변한다. 규율을 다 지키려고 하다보면 집착이 생겨 사람들과 다툼이 생기고, 좋은 말도 넘치면 반드시 허물이 되는 법이다. 

‘권불십년(權不十年)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고 하였다. 꽃은 10일 이상 아름답게 꽃피울 수 없고, 큰 세력을 갖고 있다고 해도 10년을 넘기지 못한다고 했다. 자신이 어느 위치에 있을 때 덕으로 베풀고, 아래 사람들이 스스로 감화되어 자신에게 고개를 숙이도록 해야 한다. 세력 있다고 지나치게 그 세력을 부리면, 언젠가는 보복을 당하게 되어 있다. 또 자신이 복이 많다고 그 복을 함부로 해서는 않될 것이다. 복은 있을 때 아껴두어야 하는 법, 더 많은 복을 지어야지 훗날 대접을 받게 되어 있다. 말이라는 것도 그렇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아랫사람에게 노파심에 말을 하지만, 오히려 역효과가 날 때가 많다. 그래서 흔한 말로 ‘나이 들수록 입은 닫고, 지갑은 열라’고 하지 않던가? 또 마지막으로 규율도 그러하다. 계율을 함부로 어기라는 것이 아니라 법보다 사람을 중시여기고, 융통성을 가져야 한다. 

오조법연의 행적  
오조 법연(五祖法演, 1024~1104)은 사천성(四川省) 면주(綿州) 파서(巴西) 사람으로, 속성은 등(鄧)씨이다. 법연은 소년 시절에 출가해 35세에 수계를 받았다. 성도(成都)에 머물며 〈백법(百法)〉 및 유식을 공부하였다. 이후 십여년간 여러 지역을 유력하며 발초첨풍하였다. 그러다 법연이 백운 수단(白云守端, 1025∼1072)을 만나 수단에게서 마니주 화두로 대오하고, 다음 오도송을 지었다. 

“산기슭 한 뙈기 쓸모없는 밭/ 두 손 모으고 공손히 노인에게 물으니, /몇 번이나 팔았다가 다시 사들인 것은 /송죽의 맑은 바람이 좋아서란다.(山前一片閑田地 叉手땃뇮問祖翁 幾度賣來還自買 爲憐松竹引헌風)” 

법연은 수단에게서 법을 얻어 임제종 양기파 법맥을 이었다. 법연이 수단 문하에 머물렀을 당시 그의 인품과 수행력을 알 수 있는 일화가 있다. 법연이 방앗간 소임을 보았는데, 쌀과 보리를 찧어 팔아 돈이 들어왔다. 법연은 보시금을 자신의 호주머니에 넣고, 대중에 공개하지 않았다. 한 승려가 수단에게 이렇게 말했다. “법연이 돈을 축적해서 매일 술 먹고, 여자까지 숨겨 두었습니다.”

점차 절 안에 나뿐 소문이 퍼졌다. 법연은 일부러 조심하기는커녕 보란 듯이 돈을 감추고, 여자를 희롱했다. 이에 스승이 법연을 불러 놓고, ‘산을 떠나라’고 했다. 그러자 법연은 ‘소임을 인계해야 하니, 2∼3일 말미를 달라’고 했다. 며칠이 지나 법연이 산을 떠나며 스승에게 자신이 소임을 살며 모은 돈 3000냥을 내놓으며, 훗날 불사에 쓰라고 하였다. 당시 3000냥이면, 매우 큰 돈이었다. 시기 질투한 이들의 소행임이 밝혀져 법연은 누명을 벗었다.(〈宗門武庫〉下)

법연은 스승 곁을 떠나 여러 곳을 다니며 선지식을 찾았다. 법연은 당시 임제종 선사인 부산 법원(浮山法遠, ?∼?) 문하에 머물며 공부하였다. 이후 법연은 안휘성(安徽省) 서주(舒州) 백운산(白云山)에 머물다 호북성(湖北省) 기춘(?春) 오조사(五祖寺)로 옮겨 갔다. 법연이 오조산에 처음 들어서며 5조 홍인(601∼675)의 조탑(祖塔, 大滿寶塔)을 찾았다. 법연은 5조 홍인의 조탑에 예를 올리며, 이런 시게를 읊었다.  

“옛날 이렇게 온몸으로 갔다가/ 오늘에 다시 오니, 기억하는가!/ 무엇으로 증거를 삼으랴! 이로써 증거 삼노라.”

곧 500년 전에 열반한 홍인이 다시 돌아왔음을 의미한다. 이런 시게 이후로 선종사에서 법연을 ‘홍인의 후신’이라고 한다. 법연은 이곳에 오래 머물며 선풍을 진작해 선종사에서 그를 ‘오조 법연’이라 한다. 법연 문하에 훌륭한 세 제자가 나왔는데, 불과 극근(佛果克勤)·불감 혜근(佛鑒慧懃)·불안 청원(佛眼헌遠)으로 이들을 ‘3불’ 혹은 ‘법연삼걸(法演三傑)’이라고 칭했다. 그의 저서로 〈오조법연선사어록〉이 있다. 

無字화두 효시 오조법연
선종사에서는 무자 화두를 법연이 주목하였고, 법연에게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다음 〈법연어록〉을 보자.

“여러분, 그대들은 도대체 평소에 어떻게 공부를 해나가고 있는가? 언제나 오직 무자를 생각해야 한다. 그런데 그대들 가운데 그것을 일삼아 공부하는 이가 몇이나 되는가? 있다면 누구 하나 여기 나와서 대답해보라. 나는 그대들이 ‘있다(有)’고 말하는 것도, ‘없다(無)’고 말하는 것도 바라지 않는다. 또한 그대들이 ‘있는 것도 아니요(非有)’, ‘없는 것도 아니다(非無)’고 말하는 것도 바라지 않는다. 그대들은 무어라고 대답할 것인가? 자! 이것뿐이다.”

법연은 화두 가운데 조주 무자를 수행의 근본으로 삼았다. 무자 화두는 개에게 불성이 있느냐 없느냐를 떠나 불성의 유무(有無)에 집착하는 마음을 없애고, 자신의 본래면목을 깨닫는데 중점을 둔 화두이다. 실은 무자에 관해서는 당대에도 선사들의 어록에 나오는 예가 있다. 마조의 제자 흥선 유관(755∼817)이 개의 불성에 대해서 문답한 예가 있는데, 흥선은 ‘개에게 불성이 있느냐?’는 질문에 ‘있다’라고 답했다. 조주는 스스로 ‘없다’고 답했는데, “그에게는 업에 의한 분별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하지만, 무자 화두를 주장하며, 공안으로서 체계를 세운 이는 법연이다. 이후 법연의 손자인 대혜 종고(1089~1163)도 주목하였다. 또한 종고 이후 100년이 지나 활동한 무문 혜개(無門慧開, 1183~1260)도 주목하였다. 혜개는 저서 〈무문관〉 1칙으로 무자를 제시했는데, 선사는 “3백 6십 골절 8만 4천 털구멍 온몸이 의단(疑團)이 되어 무자 공안을 참구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몽산 덕이(1231~1308)도 “조주의 무자 한 마디가 종문(宗門)의 한 문이니, 유심(有心)으로 뚫을 수 없고, 무심(無心)으로도 뚫을 수 없다.(只者箇無字 是宗門一關 有心透不得 無心透不得)”고 하였다. 어찌되었든 법연이 화두로 삼은 이래 무자는 근자에 이르기까지 선객들이 가장 많이 들고 있는 독보적인 화두이다. 

禪, 이성적 논리로 판단 못해
제자들이 법연에게 수행하는 방법을 자주 물었다. 이에 대해 어느 날, 법연이 상당설법을 하였는데, 다음 내용이다. 

나의 선이 어떤 것인지, 비유를 들어 이야기 하겠다. 밤도둑인 아버지가 점점 나이 들어가자, 아들이 아버지에게 가업을 이을 수 있도록 기술을 전수해달라고 부탁하였다. 아버지는 ‘도둑질도 타고 나는 법이다. 가르칠 것은 없지만, 배워보도록 해라. 오늘밤에 나를 따르라.’ 
그날 밤, 아버지는 아들을 데리고 부잣집에 물건을 훔치러 갔다. 아버지가 옷장 안에 옷을 담으라고 하면서 옷장 안으로 들어가라고 한다. 아들이 무심결에 옷장 안에 들어가자, 아버지는 옷장 문을 걸어 잠그고 ‘도둑이야’ 라고 외치더니, 도망을 가버렸다. 마침 그 집의 식구들이 몰려와 집안을 둘러보았다. 아들은 옷장 안에서 빠져 나가기 위해 쥐가 상자를 갉아먹는 소리를 내었다. 
그러자 주인이 하인을 불러 옷장 문을 열어보라고 하였다. 하인이 옷장을 열고 등불을 들이대자, 아들은 하인이 들고 있는 등불을 순식간에 끄고 밖으로 도망쳤다. 사람들이 뒤쫓아 오자, 아들은 도망치면서 우물에 돌을 던졌다. 사람들은 도둑이 우물에 빠졌다고 생각하고 우물 안을 들여다보았다. 아들은 이 틈을 타 집으로 도망쳐왔다. 
아들이 집에 돌아와 아버지에게 투덜거리자, 아버지는 태연스럽게 말했다. ‘너의 기지를 훈련시킨 것이다. 물건 훔치는 재주는 스스로 터득해야 하는 법이지, 배워서 되는 것이 아니다. 또한 다른 사람이 대신해줄 수도 없는 법이다.’     

도둑질은 로고스(logos)나 이성적인 판단에 의해 배울 수 없다. 부친은 아들에게 의도적으로 자식을 사지로 내몰아 스스로 방법을 터득토록 한 것이다. 법연이 말하는 선도 이와 같음을 시사한다. 

솔직히 원고를 작성하면서 부끄러운 생각이 든다. 석가모니 부처님 이래 수많은 조사들이 배출되어 얼마나 많은 해탈 수행법을 제시했던가? 그렇게 제시된 길을 토대로 자신의 본각에 입각해 직관으로 나아가야 하리라. 밥상 차려놓았으면, 숟가락을 잡고 스스로 먹어야지, 너무 많은 것을 타인에게 요구하는 것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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