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생 아픔 함께 한 불자들 연대하고 나누며 항쟁하다

김동수 열사- 도청서 시민군 참여하다 ‘산화’
진각 스님- 구호활동 중 총상… 하반신 마비
성연 스님 -시민군 지원… 불교운동에 투신
박행삼 교사- 해남서 차량 지휘하며 광주로

5.18광주화민주화운동 당시 항쟁에 참여했던 사부대중들. 사진 왼쪽부터 故김동수 열사, 진각 스님(現 이광영), 성연 스님, 박행삼 교사. 사진제공=5.18기념재단

 1980년 5월 광주는 한국현대사에서 가장 아픈 기억 중 하나다. 군부독재 타도와 민주화를 요구한 시민들의 봉기를 계엄군이 무자비하게 탄압했기 때문이다. 특히 1980년 부처님오신날이었던 5월 21일은 계엄군의 집단발포로 많은 시민들이 스러져가 아픔을 더 했다. 이 같은 신군부의 폭압과 폭력의 현장에서 지역 스님과 불자들은 중생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항쟁에 적극 가담했다. 

5.18광주민주화운동에서 희생된 불자 중 가장 대표적 인물은 故 지광 김동수 열사(당시 22세)이다. 그는 1980년 당시 조선대 공과대학 3학년 학생으로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이하 대불련) 전남지부장이었다. 

실제로 김동수 열사는 신심 높은 불자였다. 향림사와 관음사 고등부 불교학생회 출신으로 항쟁 직전 광주지역 부처님오신날 봉축위원회 진행부위원장으로서 도청 앞 광장 점등식을 진행했다. 5월 17일에는 봉축행사 일환으로 광주시민회관서 열린 법정 스님·이항녕 박사 강연회도 관여했다. 

하지만 모교인 조선대를 계엄군이 강제 점령하고 학생들을 예비 검속하자 5월 19일 목포로 피신했다. 하지만 부처님오신날인 5월 21일 광주에서 내려온 차량 시위대로부터 계엄군 학살 만행 소식을 듣고 그 길로 광주로 돌아와 시민들과 함께 했다. 평소 “작고 하찮은 일이라도 남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자신의 몸을 나누는 것이 보살의 삶”이라고 강조해 온 그에게 시민들을 향한 계엄군의 폭압은 외면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김동수 열사는 전남도청항쟁본부에 들어가 희생자들의 시신을 안치하는 일을 도맡아서 했다. 이에 대해 김동수 열사의 동생인 김동채 씨는 “평소에 신심있는 불자였던 만큼 시신에 대한 염과 염불을 하면서 정성껏 모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구술하기도 했다. 

시민과 함께하던 김동수 열사는 탱크를 앞세운 계엄군이 도청을 포위한 5월 27일 새벽 4시 30분경 계엄군에 의해 목에 총탄을 맞고 숨졌다. 그의 주머니에는 단주 하나와 대불련 뱃지만이 남아있었다. 

항쟁에는 승속이 따로 없었다. 심지어 계엄군의 총탄에 반신불수가 돼 속인이 될 수 밖에 없었던 스님도 있다. 바로 진각 스님(현재 이광영, 당시 27세)이다. 진각 스님은 화엄사 스님으로 1980년 당시에는 나주 다보사에서 수행하고 있었다. 스님은 도반인 성연 스님이 부처님오신날 행사를 준비하는 것을 돕기 위해 광주 증심사에 왔다가 항쟁에 참여하게 됐다.

5월 19일 성연 스님과 함께 봉축행사를 준비하기 위해 시장을 보러 나온 진각 스님은 계엄군의 잔혹한 시위 진압을 목격하게 되고 수행자로서 외면할 수 없어 금남로에서 시위에 앞장섰다. 그러다가 계엄군에게 잡혀 무자비한 폭행을 당했으나 경찰과 공무원들의 도움으로 탈출해 나주 다보사로 몸을 피했다.

진각 스님은 5월 20일 성연 스님과 연락해 다시 시위에 참여하기로 하고 걸어서 광주로 올라왔다. 5월 21일은 부처님오신날이었지만, 스님은 시위대에 합류해 차량과 현수막에 구호를 쓰는 일을 주도했다. 스님이 쓴 구호들은 시위대가 통일된 목소리를 내며 항쟁에 목표를 공유하는 데 큰 도움을 줬다. 

이후 헬리콥터 기총사격으로 쓰러진 여학생을 적십자병원에 후송한 것이 계기가 돼 적십자 대원으로 합류하게 된다. 스님은 다른 대원들과 함께 약국과 개인병원에 약품을 조달하고 시내 병원에 시민들이 헌혈한 혈액을 보급했으며, 부상자들을 후송했다.

그러던 중 계엄군의 총격으로 부상당한 시민을 구하려다 척추에 총을 맞고 쓰러졌다. 계엄군은 적십자 깃발을 꽂은 차량에게까지 무자비하게 총격을 가했으며, 스님과 다른 대원은 총상을 입었고 다른 대원 2명은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다. 

대수술 끝에 목숨은 건졌지만 하반신이 마비가 된 진각 스님을 계엄 당국은 ‘폭도’로 분류해 1981년 1월 강제 퇴원시켰다. 반신불수가 된 진각 스님은 사찰로 돌아가지 못했다. 결국 속퇴하고 결혼을 하고 속인 이광영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게 됐다. 

하지만 스님의 투쟁은 끝나지 않았다. 반신불수의 고통과 경찰의 탄압에도 진각 스님은 1982년 8월 5.18부상자회를 결성하고 총무를 맡아 5.18 진상규명과 부상자 치료·보상, 군부독재 타도를 외쳤다. 1988년 5.18부상자회 부회장으로 활동하던 진각 스님은 민주화합추진위원회의 광주 청문회 당시 참고인으로 출석해 계엄군을 폭로하고 전두환·노태우의 처벌을 강력히 요구하기도 했다. 

5.18 항쟁 당시 계엄군이 젊은 시민의 머리를 곤봉으로 내려치고 있다. 사진제공=5.18 기념재단

진각 스님의 도반 성연 스님(당시 28세)에게 5.18광주민주화운동은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 당시 광주 증심사 총무 소임을 맡고 있던 성연 스님은 5월 19일 진각 스님과 함께 봉축행사 준비를 위해 시내에 나갔다가 계엄군의 폭압을 보고 시위에 가담하게 된다. 

계엄군의 탄압으로 부처님오신날 법요식을 정상적으로 봉행할 수 없게 되자 성연 스님은 5월 21일 증심사 신도회장단과 함께 법요식에서 나눠주려 했던 밥과 떡, 과일들을 리어카에 싣고 전남도청 옆 노동청 사거리에서 시위대에게 보시했다.

보시를 마치고 난 직후 계엄군은 금남로에 운집한 시민들에게 집단발포를 했으며, 성연 스님과 신도들은 전남대 병원으로 이동했다. 계엄군의 총격으로 부상자가 속출하는 상황에서 병원 간호사들은 헌혈을 호소했고, 그 자리에서 성연 스님과 신도들은 팔을 걷어붙이고 헌혈에 동참했다.  

시위대의 상황이 어려워져 가던 5월 26일 시민궐기대회에 참여한 성연 스님은 가사 장삼을 갖추고 도청 앞 광장 분수대에 올라 “우리 모두 힘을 모아 끝까지 싸워 이겨내자”고 연설했다. 당시엔 계엄군 첩자가 암약하고 ‘독침사건’으로 흉흉한 분위기에서 종교인이 연단에 올라가지 않았지만, 성연 스님은 죽음을 무릅쓰고 투쟁을 외친 것이다. 

성연 스님은 항쟁을 위한 불교 조직을 구성하려고 했으나 5월 27일 계엄군이 도청을 침탈하면서 할 수 없이 광주를 떠나 부산으로 몸을 피신하게 됐다. 하지만 스님은 10.27법난이 발발하고 봉선사에서 군인들에게 포승에 묶여 끌려가다가 현 봉선사 조실 월운 스님의 도움으로 풀려날 수 있었다. 

이후 성연 스님은 불교계 민주화운동에 투신하게 된다. 성연 스님은 여익구, 서동석 등과 함께 1985년 민중불교연합(이하 민불련)을 창립하고 이념교육분과위원장을 맡아 활동을 하며,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에도 참여했다. 1986년 정토구현전국승가회가 창립되자 초대 사무국장을 맡아 활발하게 활동했다.

불자 교사와 학생들의 참여도 주목해야 한다. 광주 대동고 교사였던 박행삼 씨(당시 43세)
는 원각사 불일학생회 지도교사로 항쟁 이전부터 학생들에게 민주주의와 민족의식을 함양하는 데 많은 노력을 했다. 

5월 19일 대동고 학생들이 시위에 가담하고자 교문을 나서려고 하자 학생들의 생명이 걱정됐던 박행삼 교사는 교문 앞에 누워 막았다. 이후 고향 해남으로 피신했던 박행삼 교사는 5월 21일 해남군청 앞에서 광주서 내려온 시위대 차량 위에 올라가 주민들에게 “광주에서 우리 형제, 아들, 딸들이 계엄군들에게 죽어가고 있는데 여기서 우리는 가만히 주저앉아 있을 수 없습니다. 모두 힘을 합쳐 광주로 갑시다”라고 호소했다. 

그는 무장한 해남 시민군과 함께 트럭을 타고 광주로 향했고, 나주에 이르렀을 때 시민군의 트럭은 73대나 됐다. 시민군의 추대에 의해 차량을 지휘하게 된 박행삼 교사는 광주로 진격했으나 계엄군과 맞닥뜨려 협상 끝에 무장을 해제당했다. 

이후 박행삼 교사는 광주로 끌려와 보안대와 서부경찰서의 혹독한 취조를 겪고 결국 교직에서 쫓겨났다. 훗날 교사에 복직하게 됐으며, 민주교사실천협의회 공동의장을 역임했다.

이밖에도 관음사·증심사의 불자들과 원각사 불일학생회, 덕일사 고등학생 불자들도 5.18민중항쟁에 적극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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