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정신 ‘민중불교운동’으로 본격 태동

신군부 세력 요구 거절해
10.27법난 사태로 이어져
87년 6월 항쟁 적극 참여 ?

1985년 민중불교연합 창립법회 모습. 5.18광주민주화운동과 10.27법난은 불교계의 내부 각성과 사회운동 각성의 계기가 됐다.

불교계는 1980년 5.18광주민주화운동을 후방에서 지원했다. 당시 조계종 총무원장이었던 월주 스님은 중앙 교단 지도자로서는 처음으로 직접 광주에 방문해 천도법회를 봉행하고 성금을 전달했다. 월주 스님은 신군부 세력이 요구했던 자율정화 지침 수용과 전두환 장군 지지 표명 요구를 모두 거절했고, 그해 7월에는 어용불교단체였던 대한불교총연합회와 전한국불교회를 탈퇴했다.

이 같은 조계종의 행보는 신군부에게는 걸림돌로 보였고 10.27법난이라는 초유의 사태로 이어졌다. 1980년 10월 27일 국보위 산하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본부장 노태우) 합동수사단은 새벽 4시를 기해 월주 스님 등 153명의 스님과 신도를 강제 연행하고 고문했다. 10월 30일에는 군경 합동으로 조계종·태고종·천태종 등 18개 종단 소속 사찰과 암자 등 5731개소를 일제 수색하고 1076명을 강제 연행했다. 

5.18광주민주화운동과 10.27법난은 국가권력에 기대왔던 호국불교 담론에 대한 반성과 교단 개혁·불교자주화를 촉구하는 1980년대 ‘민중불교운동’의 계기가 됐다. 1981년 초 진보적 불자들을 중심으로 ‘여래사운동(사원화운동)’이 전개됐으며, 스님과 재가불자들이 모여 ‘청년불교도연합’을 결성하기도 했다. 하지만, ‘여래사운동’은 그 해 10월 불교 사회운동으로 규정돼 150여 명이 연행되고 핵심인물들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실형을 받음으로 좌절하게 됐다. 

하지만, 불교운동은 꾸준히 지속됐다. 1982년 대불련의 ‘한국불교 1600년 대회’가 시작됐으며, 1984년 지선 스님과 광주 불자들이 ‘무등민족문화회’를 창립했다. 

10.27법난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시위를 하고 있는 사부대중의 모습.

특히 1985년 진관 스님, 성연 스님, 여익구, 고은, 최연 등 출·재가자 180여 명이 발기인으로 참여해 창립된 ‘민중불교연합(이하 민불련)’은 불교사회운동사의 한획을 그었다. 민불련은 창립총회부터 당국에게 불순단체로 지목돼 105명이 연행되며 출범했지만, 기관지 <민중불교>·회지 <민중법당>을 발행하며 불교계 민주화운동을 주도했다. 그러나 민불련 핵심인물들이 1986년 5월 인천사태 주모자로 주목돼 구속·수배되면서 민불련은 퇴조하게 된다. 

민불련의 민중불교운동은 1986년 6월 스님 221명이 참여해 창립한 ‘정토구현전국승가회’로 맥이 계승됐다. 이는 그해 9월 7일 해인사에 열린 전국승려대회로 이어졌다. 2000여 명의 스님이 참여한 승려대회에서 스님들은 10.27법난 진상규명과 불교재산관리법 철폐, 부천서성고문사건 진상규명 등을 촉구했다. 

故박종철 열사의 죽음으로 시작된 1987년, 불교는 거리로 나섰다. 1월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 이후 ‘박종철을 살려내라’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는 국민들과 함께 최루가스 자욱한 거리에서 잿빛 승복 휘날리며 불퇴전의 기개로 시위를 벌이는 스님들이 등장했다. 이는 한국사회의 새로운 충격으로 다가왔다. 6월항쟁에서도 불교계는 ‘민주화는 정토의 구현’을 외치며 항쟁에 적극 참여했다. 

이처럼 5.18광주민주화운동과 10.27법난 이후 각성하기 시작한 스님과 불자들은 교단 개혁과 사회민주화운동을 시작으로 통일·평화·환경운동으로 영역을 넓혔다. ‘깨달음의 사회화’라는 시대적 과제를 인식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결국 1980년 5월 광주가 불교계에 남긴 것은 ‘자리이타(自利利他)’라는 대승의 정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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