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닦음의 길 7

몇 해 전 불교대학에서 ‘죽음명상’이라는 과목을 설강한 적이 있다. 이 분야를 체계적으로 연구한 전문가를 초빙해서 수업을 진행하였다. 이 과목을 도입한 목적은 분명했다. 모든 사람은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앞으로 남은 삶을 어떻게 가꿀 것인가 진지하게 성찰해보자는 의도였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의 문제는 결국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물음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잘 살기 위해서 죽음이라는 실존을 성찰하는 것이다.

그런데 수업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불편함을 느끼는 학인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죽음’이라는 단어 자체를 찜찜하게 느끼는 이들도 있었고 죽음명상을 체험하는 과정에서 이를 견디지 못하고 중도에 그만두는 경우도 생겼다. 교리적으로 무상과 무아를 이해한다고 해도 죽음이 직접적인 자신의 문제로 다가왔을 때는 쉽게 받아들일 수 없다는 사실을 그때 느꼈다. 앎과 삶, 이론과 실제 사이에 넓은 간극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부처님 당시 이런 간극을 줄이기 위한 수행으로 백골관이 있었다. 죽은 시체가 백골로 변해가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인간의 삶이 무상과 무아라는 사실을 생생하게 체험하는 수행이다. 인도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대개 화장을 하지만, 가난해서 장작을 구할 수 없는 천민들은 시체를 그냥 숲속에 버리곤 하였다. 그러면 산속에 사는 동물이나 새들이 시신의 살을 뜯어먹고 인간의 몸은 자연스럽게 지수화풍(地水火風)으로 돌아가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다 보면 어느 순간 ‘아, 이것이 무상이고 무아구나!’라는 깨달음이 다가온다. 머릿속의 앎과 실제적인 삶의 간극이 좁혀지고 합일(合一)되는 체험인 것이다.

그런데 백골관은 아무나 쉽게 할 수 있는 수행이 아니다. 썩어가는 시체 옆에서 오랫동안 앉아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시체 썩는 냄새도 참기 힘들고 새나 벌레들이 쪼아대는 모습도 편안한 마음으로 볼 수 없는 일이다. 때로는 구역질도 할 것이다. 한밤중에 시체 옆에 있다고 생각해보라. 캄캄할 때는 무덤 옆을 지나가기도 어려운데, 시체 옆에서 홀로 밤을 지세기가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무서움에 벌벌 떨다가 도중에 포기하는 경우도 많았을 것이다.

백골관은 이러한 어려움을 감당해야 하는 수행이다. 수행자의 눈과 코, 입 등 모든 감각기관은 온통 시체만을 향해있다. 대상을 응시하는 과정에서 인간이란 존재는 변하지 않는 실체가 아니라 인연 따라 생멸(生滅)하는 다이내믹한 과정에 있음을 깨치게 된다. 죽음이란 사대(四大)의 인연이 다 해서(因緣滅) 왔던 곳으로 돌아가는 현상일 뿐이다. 이러한 존재의 실상을 백골관을 통해 머리가 아닌 온몸으로 체득하는 것이다. 잠자고 있던 수행자의 삶(生)이 깨어나는(覺) 순간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힘들지만, 태국을 비롯한 남방에서는 지금도 백골관이 실천되고 있다. 혹자의 경험에 의하면, 사찰 안에서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백골을 걸어두거나 절에서 수행하다 죽은 승려의 시신을 마른 상태의 미라로 보존하여 선방에 놓아둔다고 한다. 이것을 본 사람들은 처음에는 깜짝 놀라지만, 시간이 지나고 익숙해지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이다. 삶과 죽음을 미화하거나 왜곡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시청각 교육인 셈이다.

이러한 백골관은 몸에 대한 집착을 떨쳐내는 데 유용한 수행이다. 젊음과 아름다움에 대한 집착은 늙고 병들고 죽는다는 생생한 현실을 마음에서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영원한 것은 없으며, 변하지 않은 실체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는 자각이 근원적인 치유법이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너는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뜻의 라틴어다. 앞으로 우리 삶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 모두는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분명한 사실 앞에서 죽음에 대한 성찰을 머뭇거릴 이유가 없다. 부처님 당시처럼 할 수 없더라도 현대인에게 맞는 백골관이 필요하다. 반복되는 말이지만, 잘 살아야 하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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