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무분별지(無分別智)

어떤 스님이 임제에게 물었다.

“부처와 마군이 어떤 것입니까?”

“그대가 한 생각 마음에 의심을 일으키는 것이 마군이며, 그대가 만약 모든 법이 생겨남이 없고, 마음은 허깨비 같아서, 더 이상 하나의 티끌도 하나의 법도 없어서 곳곳이 청정하다는 것을 통달하면 이것이 부처이다. 그러나 부처와 마군은 더럽고 깨끗한 상대적인 두 경계에 지나지 않는다. 산승의 관점에서는 부처도 없고 중생도 없다. 옛날도 없고 지금도 없다. 이것을 알면 그만이다. 오랜 세월 수행할 것도 없고, 닦을 것도 없고 깨달을 것도 없다. 얻을 것도 없고 잃을 것도 없어서 언제나 특별한 법이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설사 어떤 법이 이보다 나은 것이 있다 하더라도 나는 꿈과 같고 허깨비와 같다고 말한다’ 했으니 산승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이 대목에서 한 말을 굳이 보충 설명한다면 깨달음을 얻은 경계는 무(無)의 경계다. 유(有)의 경계가 아니라는 뜻이다. 이 말도 설명을 위한 표현일 뿐 깨달으면 사실 아무 경계가 없는 것이다. 자다가 꿈을 꿀 때는 몽경(夢境)이 있지만 깨고 보면 몽경은 모두 사라져 아무 것도 없는 것과 같다. 이래서 ‘본래 아무 것도 없다[本來無一物]’는 말이 나온 것이다.

임제가 어느 스님으로부터 “어떤 것이 부처와 마군인가?”라고 질문을 받고 답해 주면서 “부처도 없고 중생도 없다”고 말한다. 교에서 말하는 아공(我空), 법공(法空)을 증득한 절대무의 경지를 나타내는 말이 부처도 없고 중생도 없다는 말이다. 부처는 깨달은 성인이고 마군은 수행을 방해하는 무리다. 깨달음을 증득한 분상에서는 수행할 것이 없다. 수행할 것이 없을 때는 수행을 방해할 것도 없는 것이다. 임제는 또 다른 장(章)에서 “도(道)도 닦을 것이 없다고 하면서 도를 닦는다고 하면 온갖 그릇된 소견만 다투어 일어날 뿐(若人修道道不行 萬般邪見競頭生)”이라고 했다. 이는 곧 분별하는 생각이 붙으면 도를 등지게 된다는 말인데 이 장에서도 법이란 법이 특별히 있을 수가 없다고 한 것이 바로 그것을 뜻한다. 〈금강경〉의 ‘정해진 법이 없다(無有定法)’는 말과 같다.

또 법은 본래 없던 데서 생기는 것이 아니고 있던 법이 어느 때에 가서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어느 때고 그대로이고, 있고 없고를 떠나 아무 일이 없는 것이다.

흔히 쓰는 말에 ‘능소(能所)가 끊어진다’는 말이 있다. 능(能)은 인식하는 주체이고 소(所)는 인식 되어지는 대상이다. 다시 말해 주관과 객관의 상대적인 관계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 능소(能所)가 끊어진 주객(主客)이 없는 상태에서 나타난 지혜를 무분별지(無分別智)라 한다. 깨닫게 되면 이 무분별지를 얻게 된다고 한다. 분별이 없는 경지이므로 가타부타할 것이 없다. ‘부처도 없고 중생도 없다’ ‘수행할 것도 없고 깨달을 것도 없다’한 임제의 말이 이러한 차원에서 나온 말이다.

간화선의 한 교본(敎本)으로 알려진 〈몽산법어〉에서도 “생각이 일어나고 없어지는 것이 바로 생사(生死)다.(念起念滅卽生死)”라는 말이 나온다. 이 말은 분별심 속에 생사가 있다는 말이다. 한 생각 끊어지면 생사가 없으므로 생사를 유발하는 원인이 생멸심(生滅心)이다. 이 생멸심을 벗어나는 것이 도에 들어가는 것이라 했다.

“밖으로 모든 반연(攀緣)을 쉬고 안으로 마음에 헐떡거림이 없어서 마음이 장벽(墻壁)과 같아야만 도(道)에 들어갈 수 있다.(外息諸緣 內心無喘 心如墻壁 可以入道)”

달마가 혜가에서 도에 들어가는 방편을 일러준 말이다.

주로 동양에서 말해온 도(道)와 서양에서 말해온 철학의 차이를 무분별지와 분별지로 구분하여 말하기도 한다. 또 노자 〈도덕경〉에도 학문과 도를 비교해 말하면서 학문은 쌓아 늘려가는 것이지만 도는 비워 덜어가는 것이라 하였다. 분별은 늘리는 것이고 무분별은 분별이 없는 것이니까 텅 비어 아무것도 들어있는 내용이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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