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법정 스님과 부처님오신날

법정 스님의 유품사진. 평소 법정 스님이 ‘자비’와 못지 않게 즐겨 쓴 말이 ‘행하라’였다. 자비를 실천하는 이가 바로 부처다.

 

“저거 왜 달았어?”
“모르겠습니다.”
“떼어요.”
“스님들이 붙이신 걸 제가 어찌 떼겠습니까?”

1999년 부처님오신날을 앞두고 길상사에 오신 법정 스님과 한 거사가 극락전 앞 처마에 걸린 커다란 연등에 달린 ‘법정 대화상’이라는 꼬리표를 보며 나눈 말이다. 스승은 거사가 하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바로 그 꼬리표를 떼어냈다. 등에 이름표를 다는 것을 못마땅했을 뿐 아니라 세상에 큰 스님, 작은 스님이 어디에 있느냐고 말씀하던 어른이었으니 ‘대화상’이라는 말도 거슬렸을 터이다.

이보다 세 해 전, 부처님오신날을 앞둔 BTN 대담에서 이런 말씀을 했다.

“일부 절에서 얼마짜리 등이라고 하는 게 영 거슬리거든요. 또 누구를 보라고 그러는지 몰라도 이름표를 다는 것도 보기 좋지 않습니다. 등 값을 매길 것 없이 제 힘닿는 대로 정성껏 동참금 내고 아무 등이나 달 수 있도록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입니다.”

‘부처님 오시는 날’ 말씀
주변이웃 살피길 강조해
자비실천 이어지는 사회
진정한 봉축의미 아닐까

요즘에는 어떤지 알 수 없으나 스승이 살아계실 때 길상사에서는 등값을 매기지 않고 1,000원이든 10,000원이든 형편 닿는 대로 돈을 내고 연등을 달도록 했다.

어느 해 부처님오신날을 앞두고 부산에 사는 불자가 스승에게 알리지도 않고 등을 잔뜩 접수하여 불일암으로 올라왔다. 스승은 나는 준비도 없고 내 성미로 보아 불 밝힐 까닭도 없으니 큰 절에 가서 밝히라고 말씀한다. 그러나 그이는 모처럼 이 사람 저 사람 뜻을 모아 왔으니 꼭 불일암에서 연등을 밝혔으면 좋겠다고 빈다.

스승은 “마침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어떤 잡지 별책 부록이 나와 있다. 그 책을 사서 교도소나 군대에 보내면 불일암에 불 밝히기보다 훨씬 나은 공덕일 것”이라며 일깨워 책을 나서 나누도록 한다.

이와 같은 뜻을 이어받아, 길상사에 다니는 이들은 식구들 안녕을 비는 연등과 어려운 이웃을 아우르는 연등을 나란히 달았다. 어떤 해에는 결식이웃을 아우르는 등을 하나 더 달고, 다른 해에는 탈북주민을 품는 등을 달며, 이라크 전쟁이 한창이던 2003년에는 이라크 어린이를 품는 등을 달고, 이듬해에는 장애인 올림픽인 페럴림픽에는 나서는 장애인에게 힘을 보태는 등을 달았으며, 그다음 해엔 사랑하고 화합하는 등을 달아 모은 돈을 가톨릭 단체 성가정입양원에 내놓는 것처럼, 해마다 알맞은 주제를 골라 이웃을 아우르는 등을 달곤 했다.

우리가 바로 부처님 화신

스승은 1993년 어느 텔레비전 인터뷰에서 “부처님 오신 날이라고 과거 완료형으로 이야기하는데 그 의미로 볼 때는 부처님 오시는 날이라고 이야기해야 한다”라고 말씀하면서 “인류 스승으로서 이분이 남긴 말 가운데서 마지막 유언이 의미가 있을 것 같다. ‘모든 것은 변한다. 게으르지 말고 정진하라’고 말씀하면서 덧붙이기를 ‘제게 의지하고 진리에 의지하라. 저를 등불 삼고 진리를 등불 삼으라’고 하셨다. 제게 의지하라는 것은 성내고 욕심부리고 꽉 막혀서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일상에서 부대끼는 자기가 아니라 본질인 자아에 의지하라는 것이고, 여러 가지 의지할 것이 많지만 다른 것은 허망하니 진리에 의지하라는 것”이라고 했다. 스승은 또 “그래서 불교는 다른 종교와 다르게 부처님을 믿는 종교가 아니다. 우주 신비와 인과 법칙을 깨달은 부처님 가르침에 따라 우리 스스로 부처가 되라는 교훈이다. 그러니 혼란된 사회 안에서 불자들이 해야 할 몫이 무엇인가를 생각한다면 ‘2,500년 전에 지나가 버린 부처님이 아니라 저마다 제 부처님이 오시는 날이 되지 않겠는가’는 의미로 오늘을 축하해야지, 등이나 켜고 제등 행렬이나 하고 어디서 불공이나 하고 기도나 하는 걸로 마친다고 한다면 부처님 오시는 날이 아니고 이미 오신 날로 그치고 말 것”이라고 흔든다.

1999년 여름 안거를 푸는 날인 우란분절에는 “진정한 재는 스님들에게 공양하는 일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스님에게 공양하면 공덕이 크다는 까닭은 수행자들이 가진 것이 없어서, 특히 인도 같은 데서는 수행자들이 거의 걸식을 하므로, 아무것도 없는 가난한 사람에게 베풀면 공덕이 된다는 뜻이다. 굶주리는 이웃을 보살피는 일, 이것이 진정한 재”라면서 “어려운 이웃에게 법다운 공양을 하면 그것이 곧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과 다를 게 없다는 것이 부처님 말씀”이라고 짚어준다.

2003년 부처님오신날에도 “아름다운 세상이란 이렇게 연등을 잔뜩 걸어놓고, 꽃이 만발하는 세상이 아니다. 사람들이 서로 믿고 도우며 인정이 넘치는 곳이 아름다운 세상이다. 내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선뜻 도울 때 덕이 자란다”라고 하면서 “남을 도울 때 제 생각대로만 해서는 안 되며, 상대편 자존심과 선택권을 존중해야 한다”라고 일깨운다. 이어 “남을 돕는 일에 어떤 보상이 따른다면, 그 보상이란 곧 내 가슴이 그만큼 따뜻해지는 일일 것이다. 그만큼 시야가 넓어지고 사는 의미가 그만큼 깊어진다. 오늘이 부처님오신날이라고 한다. 부처님이 오신다니 어디서 왔으며 무엇 하러 왔는가? 저마다 한번 생각해보라. 부처님과 우리를 별개로 보지 말라. 우리가 그런 도리를 가르친, 그 부처님 화신이다. 우리는 저마다 그런 부처님이다. 이웃이 겪는 어려움을 함께 나누어 가질 때, 그 자리에 자비로운 부처님이 오신다. 또 부처님오신날이 오늘 하루로 그친다면 생일잔치를 하고 마는 것과 같다. 부처님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 모든 불자는, 언제 어디서나 서 있는 그 자리에 부처님이 오시도록 마음에 새겨 끊임없이 정진해야 한다. 어떤 특정한 날에만 부처님이 오신다면 대단한 일이 아니다. 언제 어디서든 부처님이 오셔야 한다”하고 흔들었다.

이 말씀을 들으면서 ‘뱁새가 황새를 따라가다가 가랑이가 찢어진다.’라는 속담을 뒤집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승 말씀을 뱁새와 함께 가는 황새는 뱁새 가랑이가 찢어지지 않도록 보폭을 뱁새에 맞춰 걸어야 하며, 제가 밥 먹을 때 뱁새와 같이 먹어야 한다는 말씀으로 새겼다.

2004년 부처님오신날에도 “부처라는 말은 단 한 사람밖에 없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보통명사이다. 누구든 부처가 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우리는 하루에도 몇 차례씩 살아 있는 부처를 만날 수 있다. 그러면서도 어떤 특정한 인물만을 부처로 떠받들려고 하기 때문에 스치고 지나간다. 부처를 어떤 특정 인물로 고정하면 살아 있는 참 부처를 놓치고 만다. 그러니 자비심이 곧 부처이고 보살이라는 말을 깊이깊이 새기”라고 말씀한다. 2007년에도 “모든 중생이 불성을 지니고 있다고 하지 않는가? 누구나 부처 씨앗을, 깨달음 씨앗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그것이 활짝 열리면 저마다 부처다. 부처님 가르침을 받아 내 안에 있는 불성을 일깨우고 꽃피워야 한다. 저마다 사는 그곳에서 이 시대 부처가 되어 한몫씩 하기 바란다.”라고 거듭 흔들었다.

2008년 부처님오신날 법석에서는 “이 세상은 사람만 모여 사는 곳이 아니라, 수많은 생명체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조화와 균형을 이루고 있다. 식물과 동물이 없다면 사람도 살아갈 수 없다. 어머니가 목숨을 걸고 외동이를 보호하듯이 모든 살아 있는 것에게 한량없는 자비심을 드러내라”라는 부처님 말씀을 새겨주면서 “삶이 곧 수행이 되어야 한다. 사랑을 펼치면서 거듭거듭 성숙해질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 이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는 데 지혜와 용기가 생겨서 휩쓸리지 않고 깨어있는 정신으로 헤쳐나갈 수 있다”라고 말씀을 마쳤다.

부처는 한마디로 ‘사랑하는 사람’

사실 스승은 오래전부터 부처님오신날은 새로운 부처님이 오시는 날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했다. 1970년에 남긴 ‘오시는 날’이란 제목이 달린 글에서는 “부처님오신날을 기리는 것은 그가 몸소 보였던 대비원력이 오늘 우리 것으로 분화될 때 비로소 그 의미가 있다. 그렇지 않고서는 설사 등불 억만 개를 대낮같이 밝힌다 할지라도, 사람 세계는 암흑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이다. ‘오신 날’은 마땅히 새 부처님이 ‘오시는 날’을 위해서 있어야 할 것이다.(영혼의 모음)”

 

같은 책 ‘부처님오신날에 부치는 글’에서도 “불자들은 이 시대에 태어난 부처님 화신임을 자각, 스승이 품은 대비원력이 곧 내 원력으로 수용되어야 할 것(1971)”이라고 말씀한다. ‘무엇을 개혁할 것인가’하는 꼭지에서도 “지혜롭게 살려는 사람은 먼저 자비의 화신이 되어야 한다. 자비란 추상적인 사랑이 아니다. 일상에서 가까운 이웃에게 구체적으로 베푸는 따뜻한 손길이다. 그이에게는 일체가 자기 세계요 분신이므로 따로 욕심부릴 것이 없다. 나는 이웃과 본질로 맺어진 것임을 알기에 남의 일이 곧 내 일(1971)”이라고 일깨웠다.

일상에서 부처님이 오시도록 하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열차는 죽전역까지만 가는 열차입니다. 수원 쪽으로 가실 분들은 이곳 오리역에서 갈아타시기 바랍니다. 죽전역은 지상이어서 몹시 춥습니다.”

세 해 전 12월, 기온이 영하로 뚝뚝 떨어지고 있는 밤 열 시쯤 오리역에서 손님을 내려주고 막 떠나려던 분당선 전동차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다. 열차를 갈아가고 다섯 정거장을 더 가야 했던 나는 서둘러 내렸다.

그보다 세 해 전 12월, 용산역에서 덕소로 가는 경의 중앙선 전철에 오른 시각은 10시 42분. 열차가 떠나려면 8분쯤 더 기다려야 하는데 문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찬 바람에 저도 모르게 몸이 움츠러든다. 그때 계단 쪽 문만 남기고 나머지 문이 닫힌다. 바로 전철 안이 안온하다. 밀려드는 바람에 잔뜩 웅크린 손님 마음을 헤아린 전동차 기관사가 일으킨 기적이다.

스승이 ‘사랑’과 ‘자비’란 낱말 못지않게 즐겨 쓴 말이 ‘행하라’와 ‘실천하라’였다. 이 바탕에서 부처를 한마디로 드러낸다면 ‘사랑하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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