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떠한 악조건이 닥친다 하더라도 자기 주인공 한 점에 맡겨 놓으세요

여기서 공부하시는 분들은 좀 더 마음으로 음미해 가면서 ‘자기의 맛’으로서의 맛을 알 수 있게끔 노력을 해 주셨으면 합니다. 부처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항상 겉으로 돌아가는, 기복으로 돌아가는 분들은 부처님의 속을 알 수가 없고 남의 속을 알 수가 없고, 하다못해 애들의 속까지도 몰라. 부부로 살면서도 자기 남편의 속을 모르고 자기 자식의 속을 몰라. 어떠한 일이 있다 할지라도 내가 그 자식이 돼 봐 주는, 내가 자식이 돼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는 그런 여유를 가지고서 안으로 굴려 보는 그런 마음을 가지시고, 또 남편이 어떡할 때 다시 한번 바꿔서 내가 남편이 되어서 생각을 해 볼 수 있는 그러한 마음의 굴림이 여러분에게 삶의 의지와 생동력 있고 보람 있는 삶을 가져다 주는 그런 이익을 줄 수 있는 것입니다.

물 속에 빠져 보기도 하고 불 속에 뛰어들어 보기도 하고
떡그릇에 엎드러져 보기도 하고,
번연히 알면서도 엎드러져 보는 그러한 패기와
물러서지 않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기복으로 항상 날뛰고, 빌고, 달라고 그러고 온통 자기 것, “자기 자기 자기” 하면서 자기가 자기로서 달라는 것, 이렇게 둘로 안다면 항상 얻으러 다녀야 하고, 항상 종을 면치 못해. 주인이 되지 못한 채 종을 면치 못함으로써 종 문서는 항상 따라다니게 마련이거든.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때에 따라서 이 색(色)만 보고 이름만 보고 이렇게 모든 걸 해 나가는데….

어저께 어떤 어린애 하나 때문에…, 그걸 바탕으로 삼아서 여러분에게 얘기를 하고자 합니다. 그 몸뚱이를 쥐고 아무리 이름을 부르며 불쌍하다 해도 그게 안 불쌍해지는 게 아닙니다. 그러나 그 불쌍한 걸 건지기 위해서는 이 마음 깊이 진정으로 내 아픔과 같이 내 마음으로 굴리면서 그것을 끝내, 한생각에 항상 같이해 줄 수 있는 그런 마음을 내 주는 것이 그 애 앞으로의 장래를 위해서 길을 밝혀 주는 길입니다. 몸뚱이를 붙잡고 이름을 붙잡고 아무리 말을 해 봤던들 소용이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모든 것이, 우리가 생활 속에서 살아나가는 데의 그 문제들도 그렇습니다. 어저께도 누구나가 마음 아프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었겠습니까? 나도 나가면서도 ‘어, 그래. 너의 장래를 위해서 밝게 길을 인도하리라.’ 이렇게 하고서 나갔어요. 그것이 여기에서 부모가 기른 것보다도 더 잘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예전에 제가 나이 젊어서, 출가를 해 가지고 또 돌아다니게 될 그 무렵에 빨치산으로 낙인이 찍혀 가지고 집으로 연락이 갔던지 어머니가 허위단심해서 찾아오셨습니다. 그때가 참 오래간만에 만나는 상봉이었죠. 그랬는데 오셔서 보니까 옷도 다 갈갈이 뜯어졌지마는 살도 입술도 얼굴도 이건 볼 수 없이 갈갈이 뜯어져서 피가 나고 딱정이가 떨어지고 갈라지고 이랬으니 사람을 볼 수가 없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니까 거기서 보는 순간 까무러쳐서 그냥 주저앉아서 수족을 못 쓰시게 됐습니다. 이거 거짓말 아닙니다. 그러면서 입에서 거품이 나오면서 피가 흘렀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생각하는 마음이 얼마나 아팠기에 순간 그렇게 되겠습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나 분명코 나는 그 자리에서 그렇게 말했습니다. “어머니! 들리시죠? 나는 이 세상에 나와서 어머니가 고생하는 것만 봤지, 그 고생 고생, 말도 못 하는 고생만 봤지, 다른 거는 난 못 봤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인간이 되고자 해서, 내가 참인간이 된다면 어머님 무릎 앞에 다시 올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없는 셈 대십시오. 사람이 언제 같이 만났다가, 뜬구름과 같이 몰렸다가 뜬구름 헤어지듯이 헤어지는 것이 인생 아닙니까? 먼저 죽으나 나중 죽으나, 어린애 적에 죽으나 쪼금 커서 죽으나 어른이 다 돼서 죽으나 자식 죽었다고 생각하면 될 거 아닙니까? 그러니 그저 오빠가 오시걸랑은 따라가십시오.” 하고선 그냥 그 길로 가니까 손도 쳐들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 수족은 못 쓰나 눈물은 줄줄줄줄 흘렀습니다. 그러면서 한쪽 손으로 보따리 싸 가지고 온 걸 이렇게 이렇게 했습니다.

그때 나는 그 보따리를 가지고 가라는 줄 알고 보따리를 들고 그냥 갔습니다. 8·15 해방 되고 자기 딸자식, 자식이라고 오면 입히겠다고 소중히 비로드 옷도 있고 뭐, 여러 가지 세 벌이나 가져오셨습니다. 아주 좋은 옷입니다. 그 예전부터 해 놓으신 것을 못 주고 있다가 그때 그렇게 가져오셨나 본데, 그것을 가다가 혼인기가 있는 시골 처녀들 줘 버리고 갔습니다. 그 몸에다 그걸 입으면 뭘 합니까? 아무리 옷이 입을 게 없다 치더라도. 내가 나를 알기 위해서 입산을 했고, 또 입산을 하고 난 뒤에 그렇게 됐다 하더라도, 입을 게 없다 하더라도 그 옷을 어디다 걸칩니까? 그래서 그냥 버리고 산모퉁이에…, 그때 좀 추운 가을이었습니다.

그런데 낙엽을 딛고 가는 그 모습, 자기가 자기를 생각하면서 그 어머니를 생각하니 기가 막혔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돌아서는 그 마음은 어땠을까요? 여러분이 당해 보지 않으면 그 마음 모를 겁니다. 그냥 성해서 버리고 가는 것도 아니고 그랬을 때에 그 마음은 어땠겠습니까? 그러면서도 내가 떠나니까 팔도 이렇게 쳐들지도 못하면서 요 손끝만 이렇게 이렇게 했습니다. 그러는 걸 보고 떠난 뒤에 얼마 만에 돌아가셨다는 기별도 들었습니다마는, 그때 돌아가신 뒤에 한번 가 뵀습니다. 허허허…. 그런 이치도 있습니다.

그건 왜 그랬을까요? 우리가 몸을 잡고서 아무리 애를 써 봤던들 그건 당치도 않아, 어머니를 구하려면. 어머니의 그 사랑하는 마음과 내가 어머니를 생각하는 마음이 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 부처님의 마음도 불쌍한 사람들의 마음도 역시, 여러분이 자식을 기르고 부모를 생각하고 그러는 그 마음이, 또 남편을 사랑하고,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고 부모를 사랑하는 그 마음이 부처의 마음이라는 뜻입니다, 그 마음이요.

마음으로 안으로 굴리지 않는다면 그 길은 밝아지지 않습니다. 이 마음의 굴림에 의해서 앞날이 펴지고 밝아지지, 거죽으로 “얘야, 너는 어떡하고 어떡하고 어떡하고….” 말이 많고 그러면 이거는 똑바로 가르치겠다고 하는 그 말 자체가 오히려 삐뚜로 나가게 하는 수가 100% 될 수 있죠. 남편도 자꾸자꾸 “이것을 당신은 왜 이렇게 합니까? 지금 세상에 이렇게 해 가지고 삽니까?” 하고 그렇게 해 봤던들 오히려 그런 걸 번연히 알면서도 이것은 주장을 잡지 못합니다. 오히려 파괴가 됩니다, 알면서도. 이걸 아셔야 됩니다. 우리가 배웠죠? 나는 배우지 못했지만. 저 햇빛을 따뜻하게, 여름에 무덥게 아주 쨍쨍 쪼여 보십시오. 그러면 입었던 옷도 훨훨 벗어 버립니다, 원리가. 그러나 아주 강하게 찬기가 오고 모진 바람이 몰아닥칠 때는 반드시 옷을 더 껴입고 더 옹그리고 더 조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그래서 자기 한 꺼풀 한 꺼풀을 벗어 버리지 못합니다. 그리고 자유스럽게 뛰어놀지 못합니다. 자유스럽게 살 수도 없습니다. 속박돼 있고, 창살 없는 감옥에서 허덕이고, ‘이것이 내가 업보가 얼마나 많기에 이런가. 팔자 운명이 얼마나 이렇기에 이런가. 내가 죄를 얼마나 지었기에 이런가.’ 이러한 사념에 끄달리면서 그 암흑 같은 길을 걸어야만 하고, 그 걸어가는 길이 바로 자기의 밝은 길을 걷는 게 아니라 캄캄한 암흑 길을 걸어가니 이 몸을 벗는다 할지라도, 죽는다 할지라도 그것은 또 낙향돼서 껌껌한 길을 또 걸어야 하는 그런 모임에 의해서 다시 인연이 돼서 또 생산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마음 하나에 우리가, 세세생생의 삶에 의해서 거기에 그 인연 뿌리가, 인과 뿌리가 얼마나 지독한지 아십니까?

그래서 이 모두가, 사람사람이, 공부하는 사람들은 더군다나 더 그렇고, 이 공부 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공부라고 할 것도 없지요. 이 세상에 살아나가는 것이 전부 공부니까. 하나하나 뉘우치면서 하나하나 진화되면서 창조해 가면서 우리가 살고 있지 않습니까? 옮겨 가면서 고정된 게 하나도 없고, 고정된 행도 없고, 고정된 말도 없고, 고정되게 먹는 것도 없습니다. 단지 빈 그릇 그저 일렁일렁 움죽거릴 뿐입니다. 단지 내놓으라면 내놓을 것도 없는 마음이 자기를 움죽거리고 갑니다. 그 마음이 선장이라면 바로 그 선장은 나침반을 놓고서 그냥 가곤 있지요.

그런데 모두 여러분은 이 색에, 물질에 착을 두고 이름에 착을 두고 이렇게 살다 보니까, 지난번에도 얘기했지만 여러분이 금강경이다 화엄경이다, 몇 독을 했다 뭐, 천배를 했다 삼천배를 했다 하지만 육신으로써, 말로써 그것을 아무리 해 봤던들 그 뜻을 몰라서, 부처님이 말씀해 놓으신 뒷면의 그 뜻을 몰라서 한마디도 옮길 수가 없고, 남한테 옮겨 봤던들 이익이 하나도 없어. 공덕 될 게 하나도 없어. 자기로부터, 남으로부터 전체가 공덕 될 게 하나도 없거든. (중략)

그러니 우리 이 마음이 너무나 중요하다는 겁니다. 둘로 보지 말라. 안으로 굴리지 않는다면 보살이 아니니라. 깨쳤다 하더라도 안으로 굴리지 않고 바깥으로 도는 자, 이 법문을 제대로 해 주지 못하느니라. 이 법문을 제대로 전달을 못 함으로써 공덕은 하나도 없고 보살이 아니니라. 이 몸으로, 모습으로, 이름으로 부처님의 마음을 알 길이 없고, 이 모습으로, 이름으로 부모의 마음을 알 수 없고, 자식의 마음을 알 수 없고, 일체 만물의 유생 무생의 마음을 알 수가 없어서 굴릴 수가 없느니라. 제도할 수도 없느니라. 제도했다고 하느냐? 제도를 했다고 하지 말라. 본래 둘이 아니기에 제도한 것도 없고 안 한 것도 없느니라. 그대로 마음으로 굴리면서 항상 따뜻한 마음을 내 주면 되느니라. 따뜻하게 둘로 보지 않는 마음, 남이 아프면 내 아픔으로 생각하고 마음을 내 준다면 그것이 바로 네 아픔과 둘이 아니니라.

이것이 바로 보살의 마음이요, 이것이 바로 부처의 마음이요, 진짜 들어가서는 인간의 마음이라. 인간이라는 것도 이름이요, 부처라는 것도 이름이니라. 여래라는 것도 이름이요, 다 이름이니 그 이름을 가지고 소중하게 생각하지 말라. 그 이름 속에 소중한 것이 있느니라. 그 모습 속의 소중한 것을 발견하라. 발견하기 위해서는 안으로 보림을 하면서, 항상 그 안으로 굴리면서 거죽으로 나타내지 말고 경솔하지 말고 또한 항상 겸손하게, 남을 깔보지 말 것이며 벌레 하나를 본다 할지라도 너로 알아라. 저 꽃 이파리 저 나무 이파리, 무정물이나 하다못해 돌 하나를 본다 하더라도 그것이 남이 아니니라.

우리가 과학적으로 생각할 때도 지, 수, 화, 풍으로 뭉쳐서 바람과 흙과 물 이 모든 것이 한데 합쳐져서 큰 성을 이루어서 그것이 바로 우리의 지구라는 집이 됐고 대천세계라는 집이 됐고 중천세계도 있고 하천세계도 있고, 이렇게 돼서 우리가 지금 조화를 이루고 돌아가는 것이 전체가 아닙니까? 당장 우리 살아나가는 데에 물이 없어도 아니 되고, 불이 없어도 아니 되고, 흙이 없어도 아니 되고, 바람이 없어도 아니 됩니다. 그럼으로써 사대가 공해서 태양이라는 그 자체의 따뜻한 그런, 보람 있는 밝음이 생긴 겁니다.

우리의 마음도 역시 그러한 밝음이, 우리를 전부 이끌어 줄 수 있는 그 밝음이 되기 때문에 바로 우리의 한마음 그 한 점의 근본이 태양의 근본도 될 것이요, 천지의 근본도 될 것이요, 우주의 근본도 되니 그 어디에도, 이 오온에 스스로 밝아서 돌고 스스로 밝아서 걸릴 게 없는데 어찌 이 오온에 칠보가 가득 차 있지 않겠는가! 그러니 아니 닿는 데가 없거늘 사람들은 모습과 이름을 칭하고 자기의 삶을 거기에서 취하려고 하니 그것이 가는 곳마다 걸려. 그 걸리는 것을 언제 어느 때에 벗어날 길이 없다고 해서 부처님이 그렇게 가르쳐 주셨는데도…. 부처님이라는 이름도 이름인 것입니다. 그것은 똑바른 참사람, 참사람이라는 것이 부처님이라는 얘깁니다.

그러니 우리가 참사람 되려고 욕심을 부리지도 말고 또는 참사람 아니 된다고 걱정할 필요도 없고, 오직 자기가 본래 가지고 있는 그 한 점의 공한 자리에, 공한 데서 나오는 거 공한 데다 다시 놓는다면, 다시 맡겨 놓고 믿음을 진실하게 갖는다면, 그리고 물러서지 않는다면 바로 거기에서 자기의 마음을 스스로 알게 되고, 그때는 부처님의 마음도 모든 중생들의 마음도 모든 걸 다 알게 되며 남한테 해하지 않는 마음, 둘로 보지 않는 마음이 됩니다.

이 자비라는 것은, 헐고 깨끗하고 더럽고 이런 것이 몰락 없는, 높고 낮음도 없고 부처 중생도 없는 그러한 한 점의 내놓을 게 없는 이런 빈 그릇 자체가, 바로 우리가 찰나찰나 나투면서 밝게 비추어 주는 손 없는 손이요, 발 없는 발이요, 길 없는 길이라. 평이마요, 평손이요, 평발이요, 이것이 바로 한 손 들어서 천지를 삿갓으로 쓰고 한 손 들어 해와 달을 꿰어 굴리면서, 한 발 들어 이 산 저 산 푸른 산 한 발 디디니, 목마르면 물 마시고 대장부 살림살이 이만하면 족하다는 말이 얼마나 참사람의 마음이겠습니까?

참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은 물 한 모금 떠 마실 때, 여러분이 목마를 때 ‘물 먹겠다’ 하고 계산하고 먹습니까? 무심으로 그냥 떠 먹습니다. 그게 바로 참사람의 활용이야. 여러분이 금을 가졌다면 그걸 얼른 내놓지 않겠지만 걸레를 빨아 쥐었다면 빨리 내던질 겁니다. 빨리 빨아서 얼른 짜서 놓습니다. 금을 가졌더라도 빨리 짜서 걸레 놓듯 하십시오. 신발 벗어 놓고 올라가듯. 아시겠습니까? 금을 가졌다고 해서 이걸 소중히 생각하는 건 절대 금물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갖지 말라는 게 아니에요. 관리인만 되라는 얘깁니다. 착을 두지 말고 욕심부리지 말고 분수를 알고 살고, 건너뛰지 못할 걸 건너뛰다가 개천에 빠지지 말고, 구덩이에 빠지지 말고 서서히 침착하게, 산이 태산같이 이렇게 있으면 서서히 돌아가고, 구덩이가 있으면 구덩이를 채우고 물이 흐르듯이 이렇게 침착하게, 어떠한 악조건이 닥친다 하더라도 안으로 굴리면서 그 자기 주인공 한 점에 모든 것을 맡겨 놓고서….

거기서 나온 거니까. 자기로 인해서 나온 거니까, 악조건도. 자기로 인해서 악조건이 나온 것이지 딴 사람으로 인해서 나온 건 아니거든. 잘못했든 잘했든 자기가 있으니까 나온 거니까. 그러니까 거기에다가 모든 것을 맡겨 놓고서 한번 안으로 굴려서 바로 다시 놓는 그런 그 침착한 마음, 그리고 남을 원망하지 않고 둘로 보지 않는 그 마음을 갖는다면 스스로서 수레바퀴 돌듯 해, 시간과 공간도 없이.

이것이 참사람의 법입니다. 부처님의 법이라기보다도 참사람의 법을 알아야 부처님이 가르쳐 주신 그 뜻도 알 것이요, 한마디 한마디 해 놓으신 그 뜻을 우린 지금 현실에 맞추어서 현실의 용어로, 그때에 방편으로 쓰던 것을 현실의 방편으로써, 언어로써 이렇게 대치해서 그것을 서로에게 이득이 되고 공덕이 되게끔 이렇게 전달을 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악조건의 그 구정물, 핏물, 고름물 전부 한데 합쳐서, 한데 새겨서 말갛게 만들어서 생수 물을 해서 떠 주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한 한 방울의 생수가 아니라면 이건 전달할 수가 없는 겁니다. 부처님의 그 뜻을 전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한마디 같이 안 해도 같이 오고 감이 없이 전달이 되고, 미국이다 할지라도 여기에서 한번 말만 들었다 하면, 그 마음만 내면 서로 전달이 되고, 돌하고도 전달이 되고 돌하고도 말을 하게 되고 일체 만물과 더불어 같이 서로 말을 하고 서로 듣고 서로 공생하고 공체로서 돌아가는 조화를 이루니 그것이 바로 보살이며 부처이며, 그것이 인간이며 그것이 법신이며, 보신이며 화신이며 용왕신이며…. 용왕신이란다고 용왕신 따로 있고 모두가 따로…. (녹음 안됨) (중략)

나는 이날까지 살면서 ‘부처가 된다. 내가 위대하게 돼야지.’ 이런 적이 한 번도 없어요. 왜? 사람은 어디까지나 지옥을 거치지 않는다면 부처를 이룰 수가 없듯이 ‘사람’이 될 수가 없어요. 자기가 경험 안 해 본 것은 아픈 줄도 몰라. ‘아! 남이 그렇게 아팠다더라.’ 이런 정도지, 그렇게 실감 나게 아파 보지 못해. 어디고 한 번씩은 다 들어가서, 물 속에 빠져 보기도 하고, 불 속에 뛰어들어 보기도 하고, 떡 그릇에 엎드러져 보기도 하고, 번연히 알면서도 엎드러져 보는 그러한 패기가 있어야 하고 물러서지 않는 마음이 있어야 이 공부는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비구 비구니가 따로 없고 여자 남자가 따로 없고 애 어른이 따로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언제 적부터 어른입니까? 어른 된 지 며칠이나 되십니까? 또 애 된 지가 며칠이나 됐습니까? 허허허…. 우리가 옮겨 갈 뿐이지, 모습을 바꿔서 옮겨 갈 뿐이지 죽는 게 아니다. 그래서 생사윤회에 걸리지 말라. 본래 온 게 없기 때문에 본래 갈 것도 없어. 이 모두를, 이렇게 된 상황을 잘 아신다면…, 사량으로만 알고 이론으로만 알아서도 그 속의 근본을 몰라서 자비가 나오질 않아. 스스로 자비가 나와야 할 텐데 스스로 자비가 나오질 않으니까 가상적으로 어떻게 해 보려고 하니 그게 되나? 가다 가다가 그냥 그것은 어디로 가 버린 채 금방 자비를 냈건만도 그건 말뿐이었지, 이론뿐이었지, 돌아서면 그냥 도둑놈이야. 여자 남자를 막론하고. 앉으나 서나 자나 깨나.

그래서 이런 말이 있어요. 자면서 먹을 줄 알아야 하고, 먹으면서 쌀 줄 알아야 되고, 싸면서 잘 줄을 알아야 한다. 이건 끊임없는 길을 말하는 거죠. 자는 것은, 우리가 모든 것을 그 공한 한 점에서 나오는 거 한 점에다 다시 맡겨 놓는 작업을 하는데, 습이 다 떨어져서 녹아 버리니까 그만 푹 쉰 거를 말하는 겁니다. 그 푹 쉰 사람이, 빈 그릇이 된 그 사람이 만약에 이 모든 법을 굴린다면 하나 깔축없이, 걸림 없이 굴릴 거라 이겁니다. 담았다 꺼냈다 담았다 꺼냈다 해도 항상 그릇은 비어 있을 테니까. 그러니 그렇게 담았다 꺼냈다 담았다 꺼냈다 하는 게 아니라 담으면 싸 버려. 담으면 싸고 담으면 싸고. 싸면서 또 자. 이 세 가지의 뜻에 우리가 평생을 배워도 못다 배우는 진리가, 근본이 거기 들었어요. 자고 먹고 싼다 하는 그 세 마디에 다 들어 있다 이거야, 부처님 법이.

여러분은 여러분대로 “진짜로 나는 여기를 믿고 다닙니다. 나는 공부합니다.” 이렇게 말하면서도 자기를 자기가 못 믿어. 자기를 자기가 못 믿고 자기가 자기 부처를 못 믿고, 자기 형상만 보고서 그러니까 자기를 자기가 못 믿어. 자기 그 공한 빈 그릇을 모르니까. 고정된 게 어딨다고 그게 비지 않았다는 겁니까, 모두가. 자기가 어디 있어? 어떤 사람 만날 때 자기라고 할까? 남편을 만날 때 자기라고 할까, 부모를 만날 때 자기라고 할까, 자식을 만날 때 자기라고 할까. 순간순간 나투면서 화해서 돌아가는데. 그러니 공했다는 건데, 그 공한 데서 그렇게 무수히 나오는 그 자체가 바로 거기에서 나오는 거니 거기다가 맡겨 놓고, 자기는 거기서 형성된 거니까 그대로 공부하다 보면 자기 마음과 실상이 그대로 사람이라는 게 나와요, 그대로. (중략)

오늘 말을 하다 보니까 이렇게 긴 것 같습니다. 여러분이 그저 생활을 하시면서도 누구의 원망도 탓도 하지 마시고 항상 안으로 굴려서, 자식이 병이 들었다 할지라도 그렇고, 또 잘못 나간다 할지라도 그렇고, 애들이 공부를 못한다 할지라도 그렇고 항상 내 마음 안에, 거기서 나오는데 거기다가, 바로 그 공한 거기에다가 모든 걸 맡겨 놓는다면 그 길이 수월하게 밝혀지면서 가환, 우환, 병고, 액난이 다 스스로 녹아져 버려. 한 번 두 번 스님한테다 얘기하면서 공부하면서 이렇게 하다 보면 그대로 그거 녹아져 버려.

어딜 가나, 자나 깨나, 낮과 밤도 없어. 이 도리에는 꿈도 생시도 없는 것이라. 낮과 밤도 없어. 동 서도 둘이 아니야. 그렇기 때문에 잘 적에도 나를, 길을 인도하는 당신께서, 당신! 바로 이 몸도 당신, 이 실상 자체 마음과 더불어 육신 자체, 모두 내고 들이는 게 당신이야. 그러니 당신이 나를 잘 이끌어서 나의 이 사량적인 분별을, 모든 거를, 길을 밝혀 달라고 하는 그 마음으로 그냥 관하고, ‘참 당신은 도대체 내가 알 길이 없으니 도대체 무엇일까.’ 하는 진실된 마음으로 관하세요. 화두를 잡고 화두를 쥐고 그러지 말고.

이게 화두라, 이게. 내 공한 몸뚱이가 화두니 그 몸뚱이에서 나오는 거 몸뚱이에다 다시 놓고 믿고 거기에다가 모든 걸 놔요. 그런다면 자기가 억겁을 거쳐서 나온 그 습, 종 문서는 몽탕 타 버릴 테니까. 내놓을 수 없는 원자력이거든. 자력이 돼서 그냥 닿기만 하면, 갖다 놓기만 하면 타 버리는 거라. 그래서 자기 눈에서는 자기도 모르는 눈물이 스스로 흐르게 되고, 그 흐르게 되는 눈물은 바로 그 습의 업이 그대로 녹아 버리는 거라. 다 녹는 거라.

그러니 그렇게 아시고 오늘은 이걸로써 마치겠습니다.

※위 법문은 대행 스님께서 1986년 5월 20일 일반법회에서 설법하신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한마음선원 홈페이지(www.hanmaum.org)에서도 같은 내용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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