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연기법과 자기중심 정치해석

정치인과 국민은 과연 이성적 존재인가?

미국에서 민주당 정치인의 한심한 행위를 공화당 지지자에게 보여 주었더니 ‘이런 나쁜 놈’이라는 식의 반응이었다. 민주당 지지자에게 보여 주었더니 ‘뭐 그럴 수 있지’라는 식의 반응을 보였다. 이번에는 반대로 공화당 정치인의 한심한 행위를 민주당 지지자에게 보여 주었더니 ‘이런 나쁜 놈’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공화당 지지자에게 보여 주었더니 ‘뭐 그럴 수 있지’라는 반응이었음은 물론이다.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이중 잣대를 우리는 ‘내로남불’이라고 표현하는데 정치인만 그런게 아니라 국민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일관성 없는 행위는 정치의 영역만이 아니라 우리가 사회생활을 하면서 수없이 목격한다. 인간은 감성적으로 선택하고 선택한 이유를 물으면 그때서야 이성적으로 설명한다. 흔히 정치를 국민의 거울이라고 하는데 국민 수준도 별거 아니다. 다만 정치인은 국민 평균보다 훨씬 못하다는데 문제가 있지만 오십보 백보라고 해도 할말이 없을 때가 많다.

‘객관적’ 판단 이면 속에
인간 주관적 개입 있어
삼독(三毒) 인정 연기법
주관 고려, 합리적 판단

앞의 실험에서 뇌과학자가 공화당 지지지와 민주당 지지자가 답변할 때 뇌의 어느 부위가 활성화되는지 측정했다. 공화당 지지자, 민주당 지지자 할 것 없이 모두 이성을 관장하는 부위가 아니라 감성을 관장하는 부위가 활성화되었다. 우리가 정치인에 대한 반응을 보일 때 이성의 작용이라고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감성의 작용이었던 것이다. 이건 우리의 예상과 다른 결과여서 우리를 상당히 당혹하게 만든다. 우리가 그토록 열을 내서 비판하고 옹호하던 것이 이성의 작용이 아니라 감성의 작용이라니 어쩌면 우리는 싸울 필요도 없는게 아닐까?

오랫동안 인간은 합리성을 추구하는 존재이며 이성적인 존재라고 생각해왔다. 최근의 연구 결과는 우리의 이런 생각이 여지없이 잘못임을 낱낱이 드러낸다. 연구 결과가 나올 수록 우리 스스로 부끄러워해야할 정도로 인간은 비합리적이고 비이성적이다. 정치의 영역만이 아니다. 행동경제학은 지난 수십년 동안 인간의 경제활동이 얼마나 비합리적이고 비이성적인지 보여주었다. 어차피 싸움판인 정치판은 그렇다 치더라도 냉혹한 돈 계산의 논리가 적용되는 경제판은 안 그럴줄 알았는데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객관성을 추구하면서 사실에 근거한 주장은 객관적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과연 세상에서 사물과 현상에 대해 우리가 얼마나 객관적일 수 있을까? 아니 객관성이라는게 존재할 수 있을까? 어쩌면 모두가 주관이 개입된 것이 아닐까?

통계학 과목 첫 수업에 교수가 들어와서 던진 첫 마디가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통계는 거의 모든 것을 증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1929년 세계경제대공황에서 어떻게 탈출했는가를 놓고 아직도 학자들의 주장은 엇갈린다. 케인즈의 이론에 의한 뉴딜 정책의 성공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는가하면 2차 세계대전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둘 다 통계수치를 가지고 경제모델을 동원하여 현란하게 분석한 결과이다.

4대강 사업이 대한민국에 얼마나 경제적 이익을 가져왔는지 통계수치와 경제용어를 사용하여 분석할 수 있다. 반대로 경제적 손실이 얼마나 큰지도 보여줄 수 있다. 비록 소수이지만 4대강 사업이 국가이익에 기여했다고 아직도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우리가 가져다 쓸 통계와 이론은 넘쳐 난다. 동일한 통계수치와 이론을 가지고 특정 정책을 찬성하기도 하고 반대하기도 한다.

통계수치마저 주관이 개입된다. 어떤 회사는 ‘출퇴근 버스 서비스’를 더 이상 제공하지 않고 출퇴근 수당으로 지불한다. 출퇴근 수당으로 지불하면 인건비가 올라가지만 버스 서비스로 인한 비용은 인건비에 포함되지 않는다. 버스 서비스 비용을 인건비로 포함해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의 논쟁은 모든 통계수치에 주관이 개입되어 있다는 증거다.

정책평가라는 학문영역이 처음 등장했을 때 많은 학자들은 환호했다. 드디어 객관적으로 정책의 잘잘못을 평가할 수 있구나하는 기대 때문이었다. 수십년이 지난 오늘날 정책평가는 결코 객관적으로 누가 잘했고 누가 잘못했는가를 평가할 수 있는 학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편견, 선입관, 아집, 독선, 분노, 슬픔, 사랑, 애착, 욕망으로 점철된 인간에게 객관적 평가란 불가능하다. 원래 인간에게 객관적 평가란 불가능하다. 다만 시간이 지나면서 다수가 좋아하고 다수가 인정하는 성공하는 정책이 있을 뿐이다. 정책평가란 전문가, 언론, 국민이 서로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여론의 흐름에 불과하다. 그 판단이 맞는지 틀린지는 영원히 알 수가 없다.

주장은 모두가 주관적이다

우리는 과학적 주장은 객관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상반된 과학적 주장을 들어보면 과연 객관적 사실이라는게 있을 수 있는가 의문을 갖게 된다. 노태우 대통령이 시작한 새만금 사업은 김대중 대통령 때 암초에 직면한다. 새만금 사업의 마지막 단계에서 방조제 공사를 중단해 달라는 환경단체의 반발로 공사가 중단되었다가 법원의 판결로 계속되어 완공에 이른다.

환경단체의 반발로 공사가 중단되었을 때 새만금 사업에 반대하는 측과 찬성하는 측의 의견을 들은 적이 있다. 처음 새만금 사업 반대의견을 들었을 때 너무나 잘못된 사업 같았고 당장 중단해야 하는 사업 같았다. 그런데 곧 이어 찬성 의견을 듣자 나를 포함한 수 십명의 학자들이 혼란스러워했다. 반대의견을 들었을 때는 반대의견이 타당한 것 같았는데 찬성의견을 듣자 찬성의견이 타당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두 의견 모두 각종 환경오염에 관한 과학적 용어와 수치로 정교하게 전개된 논리였다. 김대중 대통령도 누구 주장이 옳은지 모르겠다고 실토하였다.

우리는 수치로 전개되는 논리는 객관적이라고 믿지만 수치에는 많은 가정과 논리의 비약이 개입된다.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무리한 억측과 수치가 동원되고 주관적인 내용이 객관적 사실로 포장된다. 정치와 정책의 영역에서 객관으로 포장된 수많은 사실은 사실이라는 이름의 주관일 경우가 대부분이다. 인건비라는 수치 뒤에는 버스 서비스 수당에 관한 인간의 주관이 개입된다. 새만금 방조제로 인한 환경오염 통계에는 반대하고 싶은 인간의 마음과 찬성하고 싶은 인간의 마음이 의도하지 않은 조작을 만들어낸다.

신제품을 생산하기에 앞서 기업은 시장조사를 한다. 어떤 여성잡지 회사에서 여성잡지가 스캔들이나 가십에 집중하는 저질 출판물이라는 비판에 직면하고 보다 수준 높은 고급 교양 잡지를 기획했다. 시장조사를 했더니 그렇게 수준 높은 교양잡지라면 구매하겠다는 의사가 대부분이었다. 그걸 믿고 수준 높은 새 잡지를 발행했는데 뜻밖에도 소비자가 외면하여 실패했다. 과거에는 제품을 소개하고 소비자의 구매의사를 직접적으로 물어봤다. ‘이런 제품이 있으면 사시겠습니까?’라는 시장조사였는데 요즘은 이런 식의 직설적인 방법으로 시장조사를 하지 않는다. 소비자는 자신이 진정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지 못한다. 우리는 과연 신뢰할 수 있는 정치인을 선호하는걸까?

나쁜 여자, 나쁜 남자에 끌린다는 ‘나쁜 여자 신드롬, 나쁜 남자 신드롬’이 있다. 말로는 수준 높은 교양잡지가 필요하다고 말하지만 막상 수준 낮은 선정적인 잡지에 끌리는게 인간이다. 물론 누가 신뢰할 수 있는 정치인인지 국민이 알 수 없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속마음으로는 신뢰할 수 있는 정치인보다 매력 있는 정치인을 원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성실하고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은 재미 없고 끌리는게 없다. 나쁜 여자, 나쁜 남자가 선거에 더 유리할 수 있다. 정치란 인간의 불완전성에 기생하는 필요악이다.

부처님은 사람이 연기법을 알아야 올바른 사유를 할 수 있다고 하셨다. 세상의 모든 정치현상이 수많은 원인과 조건에 의해 임시적으로 발생할 뿐인데 한 두가지 원인이나 한 두가지 조건에만 함몰되는게 인간이다. 정치현상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오직 임시적인 현상일 뿐인데 영구적인 가치를 부여하고 도그마처럼 부여잡는게 인간이다.

인지활동 중 애착이 판단 흐려

부처님은 인간에게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라는 탐진치 삼독(三毒)이 있어 전도망상된 생각에 빠져 있다고 하셨다. 부처님은 인간의 인지기관이 외부의 대상에 접촉하여 인지활동을 하면 애착이 발생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객관적 사실에 접해도 인간은 주관적으로 치우칠 수밖에 없고 여기에 좋은 감정이나 싫은 감정을 내므로 탐욕과 애착이 발생한다. 인간은 따라서 정치현상에 대해서도 이성적일 수 없고 비합리적이며 일관성이 없다.

인간은 외부의 정보와 자료에 감각기관이 접촉하면 뇌 속에서 정보와 자료를 처리한다. 정보와 자료의 처리과정에서 뇌 속에 저장된 이미지, 기억 등은 필연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우리가 어떤 유전자를 타고 났으며, 어떤 경험을 했고, 어떤 교육을 받았으며, 어떤 환경에서 성장했는가는 정보와 자료 처리과정을 좌우한다. 불교는 인간을 색수상행식의 다섯 요소로 구성된 분산시스템으로 이해하며 최근의 과학적 연구결과와 부합한다.

불교는 불교의 인간관과 세계관에 기초해 문제해결 방법을 제시한다. 불교의 인간관은 자연과학의 최근 연구결과와 부합한다. 불교의 세계관은 사회과학의 가장 최근의 관점과 부합한다. 우리가 그동안 정치문제로 인한 고통해결에서 돌파구를 찾지 못했다면 불교의 지혜에 의존해볼만 하다.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이며 일관성도 없고 자기중심적인 인간에 대해 불교는 무어라고 말하고 있는가? 부처님의 지혜가 궁금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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