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자유스럽게 살지 못하는 것은 자기가 자기를 못 믿기 때문입니다

 

주인공에 관한다는 것은

질문 : 요즘은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져서 우연히 대행 스님 법문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가끔씩 큰 행사 때만 친구 따라 절에 가 보긴 했지만 실질적으로 마음공부를 해 본 적이 없습니다. 스님 법문 듣고 이제 공부를 좀 해 보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그런데 주인공에 관한다 하시는데 어떻게 관을 하는 것인지요.

답변 : 누구든지 앉아서 관하든지 서서 관하든지 누워서 관하든지 일하면서 관하든지 바로 들어간다면 참선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관한다는 것은 예를 들어서, ‘지금 내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한마음 주인공밖에 없어!’ 그렇게 믿고 그 자리에 맡겨 놓는 것이 관이에요. 관해 본다, 관해 듣는다, 또 이 세상에서 살고 있다, 말하고 있다, 움죽거리고 있다 이런 걸 이름해서 관세음라고 이름할 수 있어요.

없는 것을 새롭게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원래 갖추어져 있는데도 여러분이 모르고 못 믿으니까
관하라는 거고, 믿으라는 거고, 일체를 맡기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 진짜고 믿고 물러서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관세음이라고 하기 이전에 각자 나를 먼저 발견해야 하니까, 나부터 알아야 하니까, 진리 속에서 참구해서 알아야 하니까 내가 있는 것을, 즉 말하자면 내 집에 전화부터 놔야 남의 집에 전화도 할 수 있고, 또 내가 남의 전화도 받을 수 있듯이, 나부터 먼저 믿고 알아야 된다는 겁니다. ‘내가 있다는 것을, 내 근본 불성 자체가 있다는 것을, 주인공, 너만이 알게 할 수 있다.’ 하는 게 참구하는 거고 관하는 거예요.

그렇게만 알고 진실히 공부해 나가다 보면 그다음에는 일하면서도 관하게 되는 거죠. 사람이 살아나가면서 어떠한 용도에 따라서 애로가 닥치는데, 누가 아프다든가 뭐 별의별 게 다 닥치죠. 그런데 그렇게 닥치더라도 ‘거기서만이 해결을 할 수 있다!’ 하고 거기 맡기고, ‘거기서만이 이끌어 줄 수 있고 화목하게 이끌어 갈 수 있다. 안 되는 것도 거기서 나오는 거니까 되게 하는 것도 거기서 나올 수 있다.’ 하고 모든 걸 하나로 둥글려서 놓고 가다 보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또 우주 만물 천체가 내 도량 아님이 없음을 알게 되니, 비로소 관한다는 말조차도 붙지 않는 자기 근본 자리를 발현하게 되는 겁니다.

없는 것을 새롭게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원래 갖추어져 있는데도 여러분이 모르고 또 못 믿으니까 관하라고 하는 거고, 믿으라고 하는 거고, 일체를 맡기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 진짜로 믿고 물러서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것은 자기 근본에다 놓아야 되는 것입니다.

마음의 속박에서 벗어나고 싶어요

질문 : 큰스님 가르침 받들어 열심히 정진하고 싶은데 자꾸 바깥으로 끄달리는 마음을 돌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 마음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요?

답변 : 이게 우리가 목마를 때 물 마시고 배고플 때 밥 먹고 똥 마려울 때 똥 누고 잠 올 때 잠자고 이러는 처지라면 이건 도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그렇게 자유스럽게 살 수 있는 건데 자유스럽게 못 사는 것은 자기를 자기가 못 믿기 때문입니다. 그 습성 때문에. 자기를 자기가 못 믿는다면 자기가 망가지지 딴 사람이 망가집니까? 못 믿는 것도 믿는 것도 바로 자기가 자기를 믿는 거죠.

우리는 지금 그 공기주머니 속이라는 주머니에 들어 있어서 알궁달궁하고 그 여럿이 그냥 거기 다 들어서 살고 있어요. 그 주머니는 여러분들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게 돌고 있거든요. 그런 것 생각해 볼 때에 바로 이 몸뚱이도 우리가 일로 가든 절로 가든 그 속에 있는 생명들은 우리가 어디로 다니는지 모르죠. 어디로 돌아다니는지를 몰라요.

그러니깐 항상 자기가 거기다 놓고 관하면 이 의식들도 전부 한마음으로 통한다 이런 뜻이죠. 통해서 내 마음을 내가 마음먹고 결정하는 대로 다 한마음으로 따라 준다 이런 뜻이죠. 그래서 공생이면서 공심이면서 공체면서 공용이면서 공식화한다 이런 뜻이죠. 이것이 각각 있는 게 아니라 네 가지가 모두 한데 합쳐져서 다섯 가지 중에 공식으로서 산다 이런 뜻이죠.

그러니깐 모든 게 우리가 생각하기에 달렸는데 모습 있는 이 유의 세계에서는 이 ‘이것이 있다, 없다’가 꼭 들어가지마는 이 무의 세계에서는 있다 없다가 없죠. 그리고 크다 작다도 없고요. 길다 짧다도 없고, 높다 얕다도 없고요. 못났다 잘났다 그런 것도 없고요. 그런데 이것을 어떻게 합류화시켜서 그렇게 잘 돌아가게 하느냐. 그 도리를 알면은 합류화가 저절로 그냥 자동적으로 돼서 돌아간다 이거죠. 컴퓨터에서는 쪼끔만, 번호만 잊어버리면 다 그냥 회사가 몽땅 다 날아가지만 우리 머리의 입력이라는 것은 누구도 그건 뺏어 갈 수가 없는 거니까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그냥 이 절에 와서 부처님을 믿는다, 이건 벌써 대상이에요. 이 부처님 앞에 오면 부처님 모습은 내 모습이고 부처님 마음도 내 마음, 부처님의 생명도 내 생명, 모두가 나와 둘이 아니죠. 둘이 아닌 까닭에 예배를 올리되 내면에서 이렇게 부처님한테 다 맡기고 하든지 안고 하든지 하여튼 예배를 올리는 거죠. 그러니 얼마나 간편합니까.

여기 찾아다니면서 기도하고 저기 찾아다니면서 기도하고 이렇게 분잡하게 하지 않아도, 이게 우리가 이 우주의 에너지 창고가 하나가 있다면 그 에너지 창고에서 수없이, 우리가 쓸 수 있는 거 용도에 따라서 다 꺼내 쓰는 거죠. 에너지 창고가 뭐, 수없이 있는 게 아니라 에너지 창고는 하난데 그 하나 속에서 다 나온다. 그래서 암흑은 암흑인 줄만 알았는데 암흑도 아니고 이게 밝음도 아니다. 그러면 밝음이 더 많이 비싸냐 암흑이 더 비싸냐. 암흑이 밝음을 가져오게 하는 바도 그 대비 대책을 세우는 에너지기 때문에 그건 둘이 아닌 까닭에 더 소중하다. 근데 그것만 소중한 게 아니죠. 밝음도 소중하고 그 에너지도 소중하고 그래서 둘이 아니라는 거예요. 우리 몸속과 이 모습과 어떻게 둘입니까, 그게. 둘이 아니죠.

그래서 믿는 것을 이렇게 상대를 놓고 믿지 말라 이런 뜻이죠. 전에 내가 어릴 때, 신부님한테 가서 고해 성사를 한다고 모두들 하는데 쭉들 서서 하는데 거기에 한데 끼어서 어린 마음이지만 그때 뭣을 생각했느냐 하면 ‘죄를 지은 사람들이 제각각 자기가 지어 놓고 저 신부님한테 저렇게 가서 죄 얘기를 하고선 죄가 없어진다고 생각하니 얼마나 어리석으냐. 난 여기 서 있기가 싫구나.’ 그래서 다시 나왔거든요.

그러니까 그것도 한 생각이에요. 생각이 그런 생각이 들어서죠. 여러분들도 그냥 길을 걷다가도 한 생각이 나면 부자가 될 수도 있고 한 생각이 처절하게 되면 또 낙오가 될 수도 있고 그래요. 이 낙오되느냐, 부자가 되느냐 이런 것도 둘이 아닌 그 가운데서 네 마음이 결정하는 거다. “어떤 것이 불법입니까.” 하니까 “이리 오너라, 내 가르쳐 줄게.” 이렇게 불러 가지고선 멱살을 쥐고 그냥 한데 쥐어박으니까 “아이구” 그러곤 엎드러지더랍니다. 그러니깐 “아이구 하는 놈은 누구냐.” 하더랍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인공이라는 그 자체의 종자를 발현해 내는 겁니다, 지금. 발현해 내는 데에 우리 주인공이라는 것은 쥘래야 쥘 수도 없고 볼래야 볼 수도 없고 그런 까닭에 종자 아닌 종자다. 그런데 “종자 아닌 종자를 심어서 키우는 데는 어떻게 해야 잘 큽니까?” 하고 물으니깐 “방귀씨를 갖다가 심어서 키우려면 방귀털을 먹여야지.” 이러더란 말입니다. “그 방귀털을 먹이는 것도 또 더 먹여도 안 되고 덜 먹여도 안 되느니라.”

우리가 다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는 문제 아닙니까? 그래서 옛날에 그런 대답을 하려면 연세가 많이 잡수신 어른들한테는 합장을 곱게 하고 하고, 좀 젊은이들한테 그 답을 하려면 또 소리가 나게 하고, 이런 문제들이 많이 있었죠. 그러나 그런 답을 그렇게 소리 나게 하고도 한 번도 벽 하나 손바닥으로 치지 못했다는 얘기가 있지 않습니까. 이 장벽 하나 치지 못했다. 하하하.

구경경지에 이르러야 된다 하시는데

질문 : 저는 어려운 일 있으면 큰스님을 부르고 찾게 됩니다. 그런데 큰스님 법문에 구경경지에 이르러야 된다는 말씀을 하시는데 저희같이 세속에 있는 사람도 그런 경지까지 갈 수 있을까요?

답변 : 구경경지란 삼세를 한데 포함해서 하나로 돌아가는 원리를 알고 그 하나도 공해서 둘 아니라는 걸 알 때에 비로소 구경경지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살아생전에 공부할 때에 구경경지에 이르러야만 된다 이겁니다. 구경경지에 이르러서도 우리가 항상 그 도리를…, 즉 말하자면 주인공 찾으면서 나를 또 덧붙이기로 이름을 갖다 거기다가 붙이고 그랬다는데 그래도 좋고 저래도 좋지만 그건 이름이지 실체는 아니죠. 그러니까 주인공, 자기 주인공만 열심히 하면 그 주인공에는 다 같이 합해져서 있다 이 소립니다.

딴 이름 부를 게 없죠. 때로는 그렇게 그냥 열심히 하다 보면, 그 자기 뿌리와 내 뿌리가 동일하게 같이 돌아가는데, 제자다 스승이다 하고 같이 돌아가는데 어찌 그게 둘이겠습니까? 자기와 나와. 그러니 모든 것이 인연에 따라서 인연이 되고 인연이 됨으로써 우리가 같이 한 방석에 같이 앉을 수 있는 그런 문제죠. 우리가 얼마나 이것을 잘, 생활 속에서 잘 리드해 가면서 잘해야만이 사자좌에 앉게 될 겁니까?

누구라고 그렇게 못 한다 하는 법도 없어요. 그거는 누구나가 다 권리가 있는 거니까요. 못생기고 잘나고 그런 것도 아니고 권리가 적고 권리가 없고 이것도 아니에요. 그러니까 가정에서 생활하시면서 하나하나 그렇게 해서 체험을 하세요.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디다. 아이, 별안간에 잘되더니만 안되는 게 탁 오길래 ‘허, 이것 또 나를 알게 하기 위해서, 없는 것도 법이라는 걸 알게 하기 위해서 나한테 이런 게 오는구나!’ 하고선 딱 굴려서 놓으니까 그냥 그게 싹 없어지고 변하더랍니다.

그러니까 그런 거를 배우지, 안 되는 걸 배우지 못하고는 도가 아니에요. 되는 것도 배우고 안 되는 것도 배우고 또 그 안 되는 거 되는 거를 다 놓고, 또 이 인생길이 바로 도의 길이니까 그 길을 걷는다면 얼마나 좋고 묘하겠어요? 그러니까 안 된다, 된다 이거를 탓하지 말고, 그러면 된다 된다 이렇게 해도…. 왜, 우리가 길을 가다가도 탁 넘어지면 되게 넘어지면 “엄마!” 하잖아요. 그거와 같아야 돼요. 이게 넘어질 때 그냥 “엄마!” 부르듯이, 급한 일이 있을 때는 항상 “엄마!” 부르듯이 그렇게 말입니다.

부딪칠 때마다…

질문 : 모든 게 자기 탓이라 하지만 여러 가지 생활고에 부딪칠 때마다 팔자 운명 탓으로 돌려지곤 합니다.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 여일하게 대처하고 싶은데 아직은 그게 안 됩니다. 한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답변 : 우리가 지금 지수화풍으로 바탕이 됐기 때문에 모두 지수화풍을 먹고 살죠? 지수화풍 아니라면 우리가 지금 이렇게 말도 할 수 없어요. 지수화풍 아니었더라면 딛고 다니지도 못해요, 붙어서. 또 만약에 떨어진다 하면 날아서 돌아가기 때문에. 안 그런가요? 그렇기 때문에 감사히 생각해라. 내가 이 세상에 난 것도 감사히 생각해라 이겁니다. 허망하게 생각하지 말고. 이 세상에 났으니까 고생도 하고 아파도 보고 별짓 다 해 보고 별것 다 보고 별생각 다 해 보고…. 그러고 있기 때문에 내 차원이 높아져요. 그걸 전부 경험을 하기 때문에. 그래서 요다음 세상에 다시금 내가 나올 때는 정말이지 자유스럽게 나올 수 있는, 그 만물의 영장이 될 수 있다 이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과정을 높이고 우리의 과정을 익히기 위해서, 무르익어서 맛이 나게 하기 위해서 이 사람으로 태어난 걸 생각할 때 얼마나 감사하냐 이거예요. 고생하는 거를 갖다가 허물치 말라. 왜냐하면 고생하는 것도 그게 외려 덕이다 이겁니다. 모든 것을 생각하게 되고 어려운 사람을 알게 되고, 죽어 가는 사람을 알게 되고 아픈 사람의 괴로움을 알게 되고, 가난한 사람의 경험을 알게 되고…. 모든 경험을 하기 때문에 지극한 그 마음속에서 용솟음치는 그 용광로는 모든 것을 생산해 낼 수 있는 그런 의욕과 그런 능력과 그런 것이 부여된다 이겁니다. 잠시 잠깐, 이래도 한 세상 저래도 한 세상 살 거를 그렇게 그런 것이 언짢다고, 그런 것이 괴롭다고 그렇게 살 필요가 없죠. 몸뚱이는 가을 잎과 같아요. 가을이 되면 이파리가 낙엽이 져서 떨어지죠. 떨어졌다고 해서 뿌리마저 죽나요? 그렇듯이 인간의 뿌리는 영원한 것이니까 말이에요.

그러니 내 몸이 없었더라면 어떻게 그런 경험을 하면서 어떻게 차원을 올리고 내릴 수 있으며 그 경험을, 참 만사 만생의 경험을 어떻게 다 할 수 있으리까. 죽어 가는 사람을 볼 수 있으리까. 살아나는 사람을 볼 수 있으리까. 굶는 사람을 볼 수 있으리까. 자기가 그런 경험을 안 해 보고야 어찌 이 세상의 모든 삼라만상의 뜻을 알겠습니까? 오히려 복된 사람이 가난한 생활을 하게 되고 고생을 하게 되는 거예요.

한세상! 고생을 하고 사는 사람도 한세상, 부자로 사는 사람도 한세상이다 이겁니다. 자기 몸뚱이도 버리고 가는 거를…. 무엇을 바라겠소? 이렇게 살고 한세상 가는 거나 저렇게 살고 가는 사람이나 똑같지마는 고생하고 그 괴로움, 그 모든 것을 보고 그렇게 한 사람은 경험을 많이 얻어서 남을 리드할 수 있고 고생하는 사람 밥을 줄 수가 있고, 고생하는 사람 불쌍하게 생각할 수 있고, 병고에 휘달리는 사람을 마음으로라도 뜨겁게 생각하고 눈물 흘려 줄 수 있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이다음에 대통령으로도 태어날 수 있어요. 대통령도 아무나 되는 게 아니에요. 그런 경험을 다 쌓아 본 사람들이나 이 세상에 나와서 대통령 노릇을 할 수 있어요.

석존이 이 세상에 나오기 이전에 “너는 석가가 돼라. 그런 재목이 되는구나.” 이런 거 가지고 이 세상에 나왔거든요. 오늘 없는 내일은 없거든요. 그러니 누구한테 따귀를 맞는다 하더라도 남의 탓을 하지 말라 이거죠. 만약에 언덕이 없다면 소가 가다가 그 언덕에 비빌 수가 없거든요. 내가 만약에 그 언덕이라면 바로 내가 언덕이 있으니까 소가 비볐지 언덕이 없고 평전인데 어떻게 소가 비비고 갈 수 있겠어요?

그렇듯이 내가 있기 때문에 그런 어려운 고비를 그냥, 어려운 아픔을 당하게 되는 이런 문제도 있죠, 많이. 배신을 당할 수도 있고. 그럴 때에 그 상대방 탓이 아니라 내 탓이죠. 그렇게 하는 사람은 자기 탓으로 또 그렇게 받을 거고 그건 상관할 필요가 없다 이겁니다. 나한테 잘못한 것도 내가 그 사람 탓을 하지 말고 그걸 상관할 필요가 없다 이거예요. 그건 그것대로 자기가 한 대로 하는 거니까. 아주 영원한 컴퓨터에 탁탁 입력이 돼 들어가니깐 말입니다. 그러니깐 나는 거기에 상관할 거 없다 이거예요.

그러니 내가 있는 탓이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탓으로 돌려라. 그래야 모든 게 풍족해지고 물리가 터지고 세상만사를 다 리드해 나갈 수 있는 그 포용력이, 두 팔을 벌리면 이 우주 천하가 다 들어올 수 있는 그런 포용력이 생길 때 비로소…. 이 세상에 눈 깜짝할 사이에 늙어 죽어요. 그러면은 얼마 안 가서 이 세상에 다시 나오게 되죠. 다시 나오게 되면 그때 대통령으로서 출마한다고.

그러니 있고 없는 거, 이런 거? 그 쓰라림을 당하는 거, 잠시 잠깐이에요. 눈 깜짝할 새. 그런데 괜히 왜, 골이 비었나? 걱정 근심하고, 아니 괴롭게 살게? 골 비지 않은 사람은 그런 거 걱정할 필요가 없어요. 인제 아시겠어요?

가족이 화합이 안 돼요

질문 : 가족이 화합이 안 됩니다. 특히 고2 되는 큰딸은 가족 때문에 힘들다고 하고 또 학교생활도 힘들다고 쉬고 싶어 합니다. 어떻게 해야 가정이 화목하고 서로 소통하면서 살 수 있을까요?

답변 : 남을 원망하지 말라고 수차 얘기하지만 수억겁을 내려오면서 우리는 부모가 되고 자식이 되고 이렇게 엇갈리면서 나온 이 모습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삼천 년 전, 삼만 년 전이라도 그것은 내 부모였으니깐, 내 자식이었으니까 이것이 오늘이란 말입니다, 오늘. 멀지도 않고 가깝지도 않습니다. 그러는 까닭에 우리가 저 딴 혹성을 가서 볼래도 가서 보는 사이도 없이, 들고 와서 보는 사이도 없이 전체를 볼 수 있다. 그거와 같다 이거 이거죠.

이것이 우리가 정신계를 배우는 건데, 정신계를 배우는 데 정신계만 배우는 게 아니라 물질계와 정신계가 혼합이 돼서 같이 수레가 돌아가듯 하니까 우리는 언제나 같이 둘 아니게 쓴다. 악도 선도 둘이 아니다. 그럼 악은 악대로 악하게 구는데, 만약에 나한테 따귀를 때리고 악하게 군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럼 따귀 맞고 한번 관해 주는 거죠, 뭐. ‘전자에 내가 그 사람을 한번 때려 줬으니깐 맞았겠지.’ 이렇게 생각을 하십시오. 그러면 분기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게 인연 없다면, 즉 말하자면 자기가 한 일이 없고 받은 일이 없다면 그런 일이 없습니다. 남을 해하게 했으니까 나한테 해하게 돌아오지 해하게 하지도 않았는데 해한 일이 어떻게 돌아오겠습니까? 지금은 무섭게, 아주 그냥 무섭게, 알게 모르게 그냥 이 정신을 뺏어 가고 정신을 치고 그러니까 모습도 망가지고 이럭하게 만드는 분들이 많죠. 그러니깐 그런 사람을 자꾸 이렇게 관해 주면 그냥 바꿔져요.

그렇게 해 보세요, 이게 거짓말인가. 바꿔지고 외려 미안해하고 그렇게 돌이켜진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악한 사람도 악한 대로만 그냥 있는 게 아니고 선한 사람도 선한 대로만 그냥 있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악과 선을 다 놔라. 잘하는 것만이 선이라고 그러지만 잘하는 것만 있다면 나중에 잘못하는 것도 있다. 그러니깐 잘하는 거나 잘못하는 거나 다 놔라. 다 놓고 그 가운데서 너의 결정을 해라. 그 가운데서 너의 결정을 하되 항상 중심을 두고 중도를 택해라. 남을 해치지도 말고 나를 해치지도 말고, 또 일체 부처를 원망하지도 말고, 일체 조상들을 원망하지도 말고….”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들의 부모가 계셨다면 잘했든 못했든, 그 가정이 가난하든 부자든, 다 성격에 달렸겠지만 그렇게 하면서도 자식들은 얼마나 위하는지 모릅니다. 잘했든지 못했든지 말입니다. 잘해 주든지 못해 주든지 자식을 아주 위하는 반면에 그렇게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좀 억울하다고 부모가 그렇게 해 주는 바람에 내가 참 피곤하다고 이렇게만 생각하면 안 되죠.

그래서 세대 차이라고 그러지만 세대 차이가 아니라 우리들이 지금 태어나서 지금 배워서 지금 사는 사람들, 전에 태어나서 전에 살던 습, 습관이 있고 그렇기 때문에 차이가 나는 거죠. 차이가 나도 그렇게 자꾸 그럭하지 않으시는 게 좋겠다고 관하면 그렇게 안 하게끔 돼 있어요. 그리고 자식들에게도 이 관하는 도리를 잘 일러 주시고 연방 이렇게 실천을 하게 해 주신다면 돌에 갖다 세워 놔도 살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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