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쪽 부처 아미타불 ‘극락’ 내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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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미타불 주석 중인 ‘극락정토’
善者가 사후에 가는 이상세계

‘아미타상찬’ 펴낸 동진 지도림?
츐師에게 극락정토 구현 주문해
4세기 後 관련 도상 정립 시작
페르시아 등 다른 문화권 영향도

539년 경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중국 맥적산 석굴 127굴 감실 벽에 도해된 ‘서방정토변상도’의 모습. 동진 승려 지도림의 〈아미타불상찬〉의 내용을 재현한 사례 중 가장 이른 시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화면에는 연화대좌에 결가부좌한 아미타여래를 중심으로 관음과 대세지보살이 시립하고 있으며, 양측에는 칠보로 장식한 누각과 여러 보살과 청중들이 운집해 있다.

지난 글에서는 미륵부처가 이 땅에 나투시면 속세의 인간들이 맞이하게 될 최고의 이상세계에 관해서 살펴보았다. 그런데 미륵부처가 하생하시기 전에 생을 끝낸 사람들의 혼은 지옥 혹은 극락으로 간다고 알고 있다. 

‘극락’(極樂, Sukhavati, 蘇訶눞帝)을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끝없는 즐거움의 세계’ 혹은 ‘최고의 아름다움’ 정도로 해석될 수 있다. 불교에서 극락은 무량의 광명을 뜻하는 아미타여래(阿彌陀如來)가 계신 서방정토(西方淨土)로, 살아서 선을 행한 자가 사후에 가는 천상의 세계라고 한다. 

아미타여래는 〈불설관무량수경(佛說觀無量壽經)〉 〈불설무량수경(佛說無量壽經)〉 〈불설아미타경(佛說阿彌陀經)〉의 세 경전을 도상학적 근거로 하여 아미타정토변상도·관경변상도·아미타내영도 등이 회화나 조각으로 묘사되어져 왔다. 관련 경전에서 아미타여래의 정토는 서방 십만 억의 국토를 넘은 곳에 있는데, 이 세계는 법장보살이 48원을 달성하여 아미타불이 된 후 건설했다는 이상향이다.

이러한 아미타여래의 극락정토는 안락세계(安樂世界), 안양국(安養國), 서방정토, 아미타정토, 아미타극락정토, 극락정토, 무량청정토 등으로 다양하게 불리며, 시대·지역·국적에 따라 도상이 변화하면서 표현되어 왔을 정도로 친숙하고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극락세계에 주처하는 아미타여래에 관한 정토신앙은 중국에 후한양진(後漢兩晋)시기에 전래되어 동진(東晋)의 혜원(慧陶, 334~416)에 의해 일반 민중에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이후 북위(北魏)말기 담란(曇鸞)이 무량수경의 십념을 염불하면서 칭명염불의 효과를 알렸으며, 그의 제자 도작(道綽)에 의해 수~초당시기에 정토교가 일반 민중에까지 전파되었다. 도작의 염불교화가 북방의 산서성(山西省)을 중심으로 확산되었다면, 이를 문화의 중심인 장안에까지 유행시킨 사람은 선도(善導, 613~681)이다.

위와 같은 아미타신앙의 유행을 반영한 현존 가장 이른 사례가 병령사(炳靈寺) 169굴의 ‘아미타불상’이다. 169굴의 아미타불상은 건홍원년(建弘元年, 420년)에 제작되었다는 제작년도와 ‘아미타불’이라는 존명, 좌우의 협시보살인 관음과 대세지보살에 관해서도 묵서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아미타여래와 협시보살을 표현한 것은 명확하지만, 극락의 전경에 대해서는 묘사하고 있지 않다.

한편 후한 말기 중국에 유입된 정토신앙은 예배의 대상인 아미타여래의 구현을 필요로 하였는데, 동진(東晋)의 승려 지도림(支道林, 314~366)이 화사에게 청하여 아미타부처님과 그 세계를 그리게 하였다는 기록이 남아있어 주목된다.

비록 이 그림이 현존하지는 않지만, 그가 편찬한 〈아미타불상찬(阿彌陀佛像贊)〉에 “서방의 나라 이름은 안양국이며, 그곳에 계신 부처님은 아미타여래이시다. 진나라 말에는 무량수라고도 칭하였다. 남녀가 연꽃의 가운데에서 태어나고, 사람의 몸에서 잉태되지는 않는다. 집은 궁전이며 칠보로 장식되지만, 장인들이 만들지 않고 스스로 지어진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 이미 4세기 중엽에 아미타의 극락세계에 관한 이미지가 정립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지도림의 〈아미타불상찬〉의 내용을 재현한 사례 중에서 현존 가장 이른 것이 서위시기인 대략 539년경에 조영된 맥적산(麥積山)석굴 127굴의 감실 벽에 도해된 ‘서방정토변상도’이다. 화면은 연화대좌에 결가부좌한 아미타여래를 중심으로 관음과 대세지보살이 시립하고 있으며, 양측에는 칠보로 장식한 누각과 여러 보살과 청중들이 운집해 있다.

더불어 전각의 양쪽에 기악대와 무희가 묘사되어 있고, 아래에는 연꽃과 새가 칠보로 채워진 연못 위를 장식하고 있다. 또한 북제(北齊, 550~577)시기에 조영된 남향당산(南響堂山)석굴의 ‘아미타정토도’는 부조로 표현되었지만, 중국에서 극락정토가 도해되기 시작한 시기는 대략 6세기 중후반으로 볼 수 있다. 

4세기 이후 정토신앙과 만난 아미타불도상은 한국과 중국서 계승·발전됐다. 근대시기 조성된 통도사의 ‘아미타극락구품도’에 나타난 아치 다리, 호선무 보살 등의 도상이 이를 보여준다.

이후 초당시기 6세기 말부터 7세기 초 돈황(敦煌) 220굴의 남벽에 도해된 ‘아미타정토변상도’는 도상과 화면의 구성이 앞의 사례보다 더 다양하고 복잡해졌다. 앞 시기부터 묘사되었던 칠보로 장식한 누각과 연못, 기악대 이외에 기악대 사이 카페트 위에서 둥그렇게 회전하는 춤을 추는 무희의 모습이 추가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춤은 페르시아계 호인(胡人)들이 춘다는 ‘호선무(胡旋舞)’를 묘사한 것으로 호인들의 석관장식이나 당삼채 등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다.

‘아미타정토도’가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같은 화면구성을 완성한 시기는 대략 성당시기로, 그 대표적인 예가 8세기 경 제작된 돈황 148굴 북벽의 ‘관무량수경변상도(觀無量壽經變相圖)’이다. 화면의 중앙에는 설법상의 아미타여래가 위치하며 그 좌우에 관음보살과 세지보살이 협시보살로 묘사되어 있고, 주위에는 청문찬탄하는 많은 성중을 배치하고 있다.

또 배경에는 보루각을 두르고, 허공단에는 여러 무리의 공양 비천과 악기가 날고 있다. 전경에는 보화가 흐르는 연못이 있고 그 안에는 연화 화생하는 왕생자와 금어 및 가릉빈가와 공명조가 묘사되어 있으며, 연못 위에는 아치형 다리가 놓여져 있다. 그리고 무대에는 카페트 위에서 호선무를 추는 보살과 악기를 연주하는 무악대가 장엄되어 있다.

이후 극락정토는 위와 같은 도상으로 화면을 구성하며, 한국과 중국의 근대기까지도 이러한 구성으로 극락의 세계가 묘사되어져 왔다. 

〈불설무량수경〉과 〈불설아미타경〉에서 묘사하는 극락정토는 칠보로 이루어진 불국토로서 아름다운 궁전과 누각, 황금연못이 있으며, 악기, 가릉빈가, 공명조 등의 새가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청정지역이라고 한다. 그러나 당대 이후에 제작된 ‘아미타정토도’는 소의 경전에서 언급하고 있지 않은 호선무를 추는 보살, 연못 위에 놓여진 아치형 다리 등을 표현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아미타정토도’를 구성하는 요소들은 중국의 전통건축과 불교적인 것뿐만 아니라, 다른 종교 및 타문화와의 교섭과 수용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을 짐작하게 한다.

당대에 정형화된 ‘아미타정토도’에 묘사된 수조(水鳥), 호선무를 추는 보살, 사산조 보관을 쓴 기악보살, 그리고 망자가 사후에 극락의 세계에 태어났음을 상징하는 다리 등에서 페르시아의 종교인 조로아스터교의 요소를 찾을 수 있다. 이러한 요소들은 당대에 특히 유행한 호풍(胡風)의 영향으로 더 깊게 중국의 문화에 침투해 왔고, 유행하던 정토사상에까지 유입되어 아미타정토도가 초당과 성당을 거치면서 정형화되었다고 본다.

그리고 이처럼 정형화된 ‘아미타극락정토도’를 한국과 중국에서 계승하여 발전하였다고 생각한다. 근대까지도 조선 불화의 화사들은 극락정토에 묘사된 아치형의 다리, 수조, 호선무를 추는 보살 등의 도상을 답습해 오고 있는데, 일례로 한국의 근대시기에 제작된 통도사의 〈아미타극락구품도(阿彌陀極樂九品圖)〉에 이러한 도상들이 오롯이 묘사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실크로드를 통해 전래된 페르시아의 종교와 미술은 불교의 아미타극락정토에 차용되어 천년이 넘는 시간이 지나도록 이어져 내려와 조선의 근대불화에까지 그 모습을 남기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또 한번 불교의 세계성과 포용력에 감탄을 금치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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