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危機)는 위험(危險)과 기회(機會)라는 두 단어로 합성된 단어이다. 사람들은 위기에 직면하면 두 가지 반응을 보인다고 한다. 약 90%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위기를 위험으로 보는데 반해, 나머지 10%만이 위기를 기회로 본다고 한다. 말하자면 성공하는 사람은 위기에서 10%의 가능성을 보고 그것에 도전하고 그것을 이겨내려고 한다는 이야기다.

영어 단어 ‘Impossible’을 보자. 이 단어의 의미는 ‘불가능’이다. 이 단어에 ‘′’를 더하면 ‘I′mpossible’이 되어 ‘가능하다’가 된다. 

또 다른 영어문장을 살펴보자. ‘Opportunity is nowhere’는 ‘기회는 아무 데도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것도 보는 시각을 바꿔 보면 다른 문장이 된다. 이 문장에서 ‘nowhere’를 단어를 나누어 ‘now here’로 바꾸어 보자. 바로 ‘Opportunity is now here’가 되어 ‘지금 바로 기회가 있다’란 뜻으로 바뀌어 전혀 다른 내용이 된다.

‘Change’도 ‘g’를 ‘c’로 바꾸면 ‘Chance(기회)’로 변한다. 변화도 달리 보면 언제든 기회의 장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듯 생각을 바꾸면 다른 게 보이기 마련이다.

흔히 일이 풀리지 않으면 ‘운명(運命)’을 탓 한다. 그런데 이 운명이란 글자도 앞뒤로 바꾸면 ‘명운(命運)’이 된다 즉 ‘운에 명령을 한다’는 전혀 다른 내용이 된다.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는 ‘실패’를 보자. 실패가 정말 끝을 의미하는 걸까? 물론, 실패를 액면 그대로 봤을 때에는 성공의 반대말이다. 

하지만 다각적인 사고로 살펴보면 ‘아무 것도 이루지 못했다’는 ‘앞으로 배워야 할 것이 남았다’로 바꿔 말할 수 있다. ‘얻은 것 하나 없이 손해만 봤다’는 ‘다른 방법으로 해야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실패하면 안 된다는 것을 배웠다’로 바꿔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실패는 결코 당신이 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다른 무엇인가가 더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살다보면 실패도 있고 실수도 있을 수 있다.

그러기에 불자들은 일상생활 속에서 지혜롭게 사는 법을 배워 나가야 한다. 자만하지 않고 겸손과 겸양으로 성실히 살아가면서 참선이나 염불, 주력 중에서 자기 근기에 맞게 열심히 수행하다보면 행복한 삶은 더욱 우리 가까이 다가온다.
 

중국 초나라 때 양유기는 화살로 200m에 있는 버드나무 잎을 맞추어 떨어뜨리는 당대 최고의 궁사였다. 그는 5일장이 설 때마다 많은 사람을 모아 놓고 자신의 솜씨를 자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나그네가 그에게 다가와 이렇게 말했다. “여보시오! 선생, 제가 활 쏘는 법을 다시 가르쳐 주겠소.” 
 

권표 스님/ 일본 교토 고려사

양유기는 어이가 없고 기가 막혀 “나그네 양반, 당대 최고의 궁사에게 그렇게 망언을 해도 되는 것이요”라고 핀잔을 줬다. 이에 나그네는 “당신이 매일같이 활줄을 당기면 활대는 자꾸 굽어지고 활줄은 늘어져 어느 땐가 활줄이 끊어져 개망신을 당할 때가 분명 있을 것이요”라고 답했다. 이 말을 들은 양유기는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 그 이후로는 자신을 과신하지 않고 겸허하게 살아갔다고 한다. 

우리네 속담에 ‘매사 불여 튼튼’이라고 했다. 인생사는 예기치 않는 난관이 많다. 항상 기도하고 복도 짓고 덕도 쌓으면서 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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