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경봉 스님

 

‘무가애(無핯碍)’ -경봉 스님의 유묵

 

경봉 스님은 우리 집에서 가까운 통도사 극락암에 계셨기 때문에 따로 서신을 주고받지는 않았다. 여쭐 것이 있거나 들을 것이 있으면 그때그때 찾아뵈었다. 서신은 아니지만 서신처럼 생각하며 받은 것이 있다. 어느 날, 유묵을 한 점 주셨는데, 주신 말씀은 ‘무가애(無핯碍)’였다. 번뇌 망상에서 벗어나 막힘이 없고 걸림이 없는 자유로운 삶을 당부하셨다. 불자라면 누구나 한 번 쯤 가슴에 품어야 할 공부라고 생각한다. 평소에 잘 알고 있던 글이었지만 스님의 글씨로 받고나니 새삼 무겁고 경건하게 다가왔다. 그리고 실천의 의지가 전에 없이 새로웠다.

경봉 스님과의 인연은 아버지가 먼저다. 아버지께서 환약이나 경옥고를 지으실 때면 언제나 경봉 스님과 월하 스님께 먼저 공양을 올리고 난 후에 대중에게 판매를 시작했다. 그리고 다른 스님들께도 기회가 되면 약 공양을 많이 하셨다.

하지만 경봉 스님이 극락암에 주석하시는 것은 연꽃모임을 만든 후에 알게 됐다. 당시 극락암에서 일요법회가 열릴 때마다 그 길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때 서울에서 온 지인이 경봉 스님 친견을 원해서 함께 스님을 뵈러 간 적이 있다. 여름이라 모가가 많았다. 모기장 안에 계신 스님을 가까이서 뵙겠다고 우리는 스님이 계신 모기장 안으로 들어가서 스님의 법문을 기다렸다. 바로 그때 스님이 “명초당 딸이라고?” 하시며 아버지와 인연이 있었음을 일러주었다. 스님은 아버지의 안부를 물으시고는 나와 도반에게 손바닥을 펴보라고 하셨다. 그리고 스님은 스님의 손바닥으로 우리의 손바닥을 탁탁 치시면서 “소리가 났재? 이 소리가 어디로 갔는지 잡아봐라”고 하셨다. 화두였다.

근대 한국불교의 산증인이자 통도사를 대표하는 선지식 경봉 스님은 틈이 날 때마다 붓글씨를 쓰셨는데, 하루는 내게도 한 점을 주셨다. ‘무가애(無핯碍)’, 세 글자로 된 서신이었다. 우리집 가보 중의 하나다.

스님은 36세에 화엄산림 기간 중 오도한 후 통도사 극락암에 선원을 열어 수많은 납자들을 제접했다. 그리고 근대 한국불교 선풍의 중흥을 이끌었다.

스님은 화엄산림법회 6일째 되던 날 새벽에 활연개오하여 이전까지 화엄의 테두리 안에서 경계 지어진 화엄의 틀을 깨고 조사선의 진정한 위용과 함께 선승으로서 이사무애한 삶을 산다. 그런 선승의 면모 뒤에는 한시로 자신의 사상을 이야기했던 시승(詩僧)의 면모도 간단하지 않다.

경봉 스님은 개인의 사소한 일상이나 자연에서 느끼는 감성, 주변인과의 교류, 문학작품들을 ‘일지’를 통해 남겼다. 통도사 시승의 계보를 이은 스님께서 세연을 다하시고 열반에 드셨다. 영결식을 하던 날이었다. 큰 소낙비가 퍼붓더니 갑자기 큰 쌍무지개가 하늘에 떴다. 무지개는 한참을 떠있다 사라졌다. 스님의 마지막 법문처럼 느껴졌다.

그 시절의 스님을 생각할 때마다 인자하신 그 미소와 “극락엔 길이 없는데 어째 왔느냐?”던 선문답과 “가다가 돌부리에 넘어지지 말고 물조심해서 잘 가거라”던 따뜻한 말씀이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근대 한국불교의 산증인이자 통도사를 대표하는 선지식 경봉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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