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수행의 이론과 실천법

〈소실육문(少室六門)〉 제3문 이종입(二種入)은 이입사행론(二入四行論) 또는 대승입도사행관(大乘入道四行觀)이라고도 불린다. 짧지만 보리달마대사의 수행의 이론과 실천법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논서이다.

‘도(道)에 이르는 길’ 곧 깨달음에 이르는 수행법을 요약하면 이입[理入, 이론]과 행입[行入, 실천법]이 있다.

‘이입(이론)’은 교[敎, 경론(經論)]를 빌어 모든 중생의 참성품[진성(眞性), 본체, 진여]이 동일한 하나임을 믿고, 망상을 걷어내고 참으로 돌아가며[사망귀진(捨妄歸眞)], 자타성범[自他聖凡, 나와 너 그리고 성인과 범부]이 하나인 부동지(不動地)에 머물되, 교(문자로 된 경론)마저 버리고 그 참뜻을 취하는 것[사교입선(捨敎入禪)]이다.

여기에서 사교입선(捨敎入禪)을 흔히 ‘교(경론)를 버리고 선에 들어간다.’고 번역한다. 이러한 번역은 자칫 교를 비하하고 선을 높이는 어리석음을 범하기 쉽다. 청화 스님께서는 사교입선을 ‘교를 배운 후에 선에 들어간다’고 번역하셨다.

우리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물과 음식을 먹고 마신다. 그러면 몸은 신진대사[新陳代謝]를 통해, 생명의 유지를 위한 영양분을 섭취하고 필요 없는 물질은 걸러서 소변과 대변으로 배출해 낸다. 여기에서 물과 음식의 섭취, 신진대사, 소대변의 배출 중에 어느 하나라도 생략하거나 빠지면 생명유지가 되지 않는다. ‘어차피 대소변으로 배출될 것이니 나는 물과 음식을 섭취하지 않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버린다’에는 반드시 ‘취해서 가진다’라는 것이 선행한다. 가진 것은 버릴 수 있으나, 가지지 않은 것은 버릴 수 없다. ‘교를 버리고 선에 들어간다’를 생명유지 기전과 비교하여 곰곰이 살펴보면, 우선 교를 취하고 배워서 정신고양에 필요한 영양분을 섭취하고, 교의 문자를 버리고 정신고양의 영양분을 이용해 선에 들어가는 것이다. ‘어차피 버릴 문자이니, 나는 교를 취하지 않겠다.’라고 생각한다면, ‘어차피 대소변으로 버릴 것이니 나는 물과 음식을 취하지 않겠다’는 사람과 다르지 않다.

행입(실천법)은 ‘보원행(報睹行)’, ‘수연행(隨緣行)’, ‘무소구행(無所求行)’, ‘칭법행(稱法行)’의 4종으로 대별된다.

보원행이란 역경을 맞았을 때, 이는 과거생의 원증(怨憎)의 과보임을 알고, 원망심 없이 수도의 밑거름으로 삼는 것이다. 수연행이란 좋은 일이 생기면 과거생에 지은 인연의 과보로 생긴 것이니 곧 인연 따라 스러질 것을 알아, 기쁨에 들뜨지 않는 것이다.

일체가 항상 변해 실체가 없으니, 없는 실체를 갈구(渴求)하고 잡으려하는 것이 고통인 줄 깨달아, ‘갈구함이 없이 평안한 것’을 무소구행이라 한다.

칭법행이란 ‘모든 현상이 비어있고 본래성품이 맑음’을 철저히 알아, 6바라밀(波羅蜜)을 닦되, 닦는다는 모습을 내지 않는 것이다.

행입의 4행을 관통하고 있는 것은 연기(緣起)이고, 연기즉공[緣起卽空, 연기이므로 공(空)]의 공지(空智)에 투철한 삶을 사는 것이다.

붓다께서, “연기를 내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연기를 발견한 것이다”고 하셨다. 사제법(四諦法)으로 집인고과(集因苦果)의 유전연기(流轉緣起)와 도인멸과(道因滅果)의 환멸연기(還滅緣起)를 체계적으로 가르쳐주신 붓다께 사무치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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