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닦음의 길 4

지난해 고불총림(古佛叢林) 백양사가 총림에서 해제되면서 많은 이들의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오랫동안 총림의 요건을 충족하지 못했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를 계기로 사람들은 그 어느 때보다 총림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총림이란 본래 승려들이 모여서 수행하는 공간을 가리키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참선을 수행하는 선원(禪院)과 경전 교육기관인 강원(講院)이나 승가대학, 계율을 공부하는 율원(律院) 등을 갖춘 사찰을 의미한다. 〈총림법〉에는 선원과 강원, 율원 외에도 염불원(念佛院)을 갖추고 정진하는 종합수행도량이라고 규정되어있다. 현재 해인사와 통도사, 송광사 등 큰 사찰들이 총림으로 지정되어 있다.

총림의 구성은 불교의 종합적 수행체계인 계정혜(戒定慧) 삼학(三學)을 이론적 배경으로 하고 있다. 계학(율원)은 계율을 바르게 지키는 것이고, 정학(선원)은 마음을 고요히 다스리는 수행이며, 혜학(강원)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공부다. 계율과 선정, 지혜를 단계적으로 닦는 삼학은 불교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중요한 수행법이다.

삼학의 단계적인 공부법은 ‘계의 그릇이 깨끗해야 선정의 물이 고이고, 선정의 물이 고여야 지혜의 달이 비친다.’는 말에서도 드러난다. 그릇이 깨끗하지 않으면 그 안에 아무리 맑은 물을 담는다고 해도 더러울 수밖에 없다. 계율을 지키는 것이 선정과 지혜 공부의 바탕이 되는 이유다. 그리고 그릇에 담긴 물이 출렁임이 없어야 그 안의 사물이 있는 그대로 보이는 것처럼, 선정을 통해 마음이 고요해야 지혜의 달이 비춰서 대상을 왜곡하지 않고 제대로 볼 수 있게 된다.

근본불교의 실천체계인 팔정도(八正道) 또한 삼학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먼저 계학에 속하는 실천으로 말이나 행위를 바르게 하는 정어(正語)와 정업(正業), 정명(正命)이 있다. 그리고 바른 수행을 강조하는 정정진(正精進)과 정념(正念), 정정(正定) 공부는 정학에 포함되며, 바르게 보고 사유하는 정견(正見)과 정사(正思)는 혜학으로 구분할 수 있다. 한마디로 삼학은 다양한 과자들이 들어있는 종합선물세트에 비유할 수 있다. 불교의 모든 수행을 담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선불교에 이르게 되면 삼학이 새롭게 해석된다. 계율을 통해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선정 공부로 산란한 마음을 고요하게 함으로써 지혜를 증진시키는 단계적인 이해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인도에서 건너온 선(禪)을 중국적인 색채로 바꿔놓은 6조 혜능(慧能)은 삼학을 우리의 본래 마음인 자성(自性)으로 압축하여 해석한다. 즉, 우리의 마음에 본래 그릇됨이 없는 것(心地無非)이 자성계(自性戒)이며, 산란함이 없는 것(心地無亂)이 자성정(自性定)이라는 것이다. 자성혜(自性慧) 또한 본래 마음에 어리석음(心地無痴)이 없는 것이다. 선불교에서는 이를 자성삼학(自性三學)이라 하는데, 그릇됨과 산란함, 어리석음을 대치하는 수상삼학(隨相三學)과 대비되는 말이다. 선에서 가장 중시하는 견성(見性)은 다름 아닌 우리의 마음에 본래 그릇됨과 산란함, 어리석음이 없다는 실상을 깨치는 것이다.

여기에서 주목되는 것은 자성삼학과 수상삼학을 공부하는 사람의 근기에 따라 구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하면 근기가 뛰어난 사람은 자성삼학을, 그렇지 못한 사람은 수상삼학을 닦는다는 것이다. 오늘날로 비유하자면 학생들의 학업 성취도에 따른 수준별 학습을 채택한 셈이다. 선불교의 시선에서 보면 자성삼학은 즉각적인 깨침을 강조하는 혜능의 돈문(頓門)의 전통이며, 수상삼학은 점차적이고 단계적인 닦음을 중시하는 신수(神秀)의 점문(漸門)에 해당된다.

삼학을 종합적 수행체계로 인식한 근본불교와 이를 자성(自性)으로 압축한 선불교의 해석은 옳고 그름이 아니라 다양성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시대와 문화, 철학의 차이에서 기인하기 때문이다. 각자 자신에게 맞는 방법을 택해서 수행의 기초로 삼으면 되는 일이다. 근기가 뛰어나지 않아서 계율을 지키고 선정과 지혜를 닦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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