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환상과 진실

9-1 룸비니 동산에 꽃비 내리던 날 부처님은 탄생하셨습니다. 태어나자마자 사방으로 일곱 걸음을 걷고 하늘과 땅을 가리키며 “하늘 위와 하늘 아래에서 오직 내가 홀로 존귀하다(천상천하天上天下 유아독존唯我獨尊)”고 외치셨다고 대승경전에서는 전합니다. 이것을 액면 그대로 믿으면 신앙이 되고 이 안의 숨은 메시지를 읽고 깨우치면 깨달음이 됩니다.

이 땅에 부처님이 오신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요?

후기 대승 경전에 실린 부처님 탄생 내용을 초기경전(니까야)에서 찾아보면 싯다르타가 오랜 수행 끝에 정각을 이룬 후 “나는 신들의 세계, 악마들의 세계, 성직자들과 수도자들, 왕들과 백성들의 세계에서 위없는 깨달음을 바르고 원만하게 깨달았다”고 선언하는 대목과 만납니다.

9-2 스스로 가장 높다는 말에는 두 가지 전혀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독존과 자기애입니다. 독존은 모든 구속에서 벗어난 순수한 상태가 독존입니다. 붓다가 선언한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독존이 그것이지요. 그러나 자기애로서 독존은 자신만 알고 자신만 높고 위대해서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자신의 생각만 옳다고 고집하며 마음을 닫고 삽니다. 누구의 말도 듣지 않고 자기주장만 내세우지요. 그 주장이 아무리 그럴 듯해도 다른 사람과 소통이 막혀 있는 장애인입니다. 자기애적 성격의 소유자와 과대망상증 환자에서 볼 수 있습니다.

부처님의 육적인 탄생 메시지와 영적인 탄생(깨달음)의 메시지 사이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중생과 부처의 차이는 무엇인가요?

종교는 개인적 신념의 결집
맹목적 믿음서 쓰임 살펴야
부처님 오신 참의미에 부합

9-3 자신의 종교를 신격화시키고 최고의 종교로 만들고 싶은 마음은 동서가 같습니다. 동정녀 마리아로부터 아버지 없이 탄생한 예수나 태어나자마자 걸으며 우주에서 최상자라고 선언하는 싯다르타나 닮은꼴입니다. 종교의 양면성은 기대 어린 환상을 쫓는가 하면 진실한 삶을 추구하는 동력을 제공하기도 합니다. 코로나 사태를 겪으며 우리는 내면의 어두운 민낯과 함께 밝은 본성도 보았습니다. 상황을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전적으로 우리의 책임입니다. 그 기준은 지금껏 살아오면서 겪은 경험과 배운 지식들에 의해 세워진 각자의 신념과 원칙들입니다. 이 신념과 원칙은 종교 정치 사회 전반에 걸쳐 강력한 잣대로 작용합니다. 그러나 신념들은 진실은 아닙니다. 매우 주관적이기 때문이지요. 개인적인 신념은 각자의 성격을 규정하고 집단적인 신념들은 각 나라의 문화적 특성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사회적 관습이나 규범으로 나타나기도 하지요. 상황을 사실에 입각하여 보고 부풀리거나 왜곡시켜서 보지 않는 게 중요한 것은 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른 믿음과 그릇된 믿음으로 갈리게 되니까요.

9-4 무고한 사람들이 정복자들에 의해 무자비하게 죽임을 당하거나 노예로 고생합니다. 로마의 지배에 놓인 유대인들의 오랜 고난이 육신 부활의 신앙을 낳습니다. 고통 받은 사람들 편에 섰던 그 고귀한 죽음이 그대로 끝난다면 너무나 불공평하지요. 또 무자비한 정복자들의 호화로움이 영원히 지속된다면 역시 너무나 불공정합니다. 인생이 일회적이라고 누가 말하나요? 하루가 하루로 끝난다거나 일년이 일년으로 끝난다고 말하는 근거는 그렇게 개념을 설정했기에 하루가 되고 일년이 된 거지요. 본래 시간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데 구획을 정하기를 좋아하는 마음이 그리 한 거지요. 봄이 되어 싹트고 여름되어 푸르르다가 가을되어 노랗게 되고 겨울 되어 땅에 떨어지는 낙엽은 흙속에 썩어 어느 세월 다시 뿌리로 흡수되어 다시 싹트거나 빗물에 씻겨나가 강이 되고 바다가 되어 다른 생명의 일원이 되기도 하지요. 순환의 법칙은 자연에만 적용되는 게 아닙니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지 자연의 법칙에서 예외적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9-5 무서운 4월은 기독교에서는 고난(수난)의 주간에 이은 부활절의 달이기도 합니다. 고통을 극복하면 행복이 온다는 메시지이지요. 그런데 부활을 문자적으로 믿으면 전지전능하고 불사의 신으로 신격화되어 오직 한 사람이 되고 맙니다. 그분의 뜻과 상관없이 모든 사람은 그를 통해서만 구원이 가능하고 한 사람만이 하느님의 아들이고 모든 인간은 죄인이 되고 말지요. 모두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시편의 말씀과 상충합니다. 역시 석가모니만 부처님이고 그 외엔 부처가 아닌 중생으로 자처하는 불교 신앙도 같은 맥락입니다.

붓다는 당신만 믿고 따르라거나 구원을 요청하면 들어주겠다는 말 대신 오히려 “자기 자신에게 의지하고(自歸依) 가르침에 의지하라(法歸依). 결코 다른 것에 의지 말라”고 유언을 하셨으며, 정각을 이룬 후 “희유하고 희유하다. 모든 중생들이 부처의 성품을 가지고 있구나(일체중생一切衆生 실유불성悉有佛性)”라고 선언하셨습니다. 부처님 당신처럼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고 선언한 거지요. 인류의 고통을 위한 헌신의 가르침은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아들이고 존귀한 부처라는 메시지, 부활의 메시지이고 깨달음의 메시지입니다.

9-6 우리는 결점을 숨기려 합니다. 거의 본능적입니다. 왜일까요? 언제 거짓말을 하고 왜 상대를 속이려 하는지 살펴보세요.(잠시 멈추고 호흡을 바라보고 눈을 감습니다. 충분히 숙고해봅니다) 결점 때문에 거부당할까 봐 두려운 거지요. 사실 어려서 그렇게 거부당한 쓰라린 경험이 그렇게 만들지 않았나요? 실패를 모르고 실수가 부끄럽지 않던 영유아 시절, 모든 게 수용되던 황금시절을 지나 훈육의 시기를 거치면서 부끄러움과 수치감 자존감의 손상이 왔지요. 그래서 다시 상처받지 않으려고 결점과 실수를 은폐하기 시작하였지요.

이것이 거짓의 시작입니다. 상처에 대한 자기 방어가 있는 한 거짓은 여러 형태로 우리의 삶을 지배하게 됩니다. 결점을 숨기고 상처를 덮어버리고 남의 기대에 부응하려고 분투하게 되고 자신은 불완전하고 무가치하다는 패배의식(노예의식)에 사로잡히지요. 실패를 두려워한 나머지 결점을 숨기기 급급하다면 발전은 없습니다. 영원히 노예적 상태에 머물고 말지요. 이를 역전시키려면 결점을 마주 바라보고 인정하고 깊이 살펴서 분명히 자각하고 결점을 따뜻하게 안아주면 결점은 녹아 더 이상 결점이 아니게 됩니다. 자신감과 자존감이 회복되고 당당하게 살기 시작합니다. 노예에서 주인이 되는 거지요. 치유와 성장이고 영적인 재탄생입니다.

9-7 조선 태조 이성계와 왕사인 무학 대사의 일화가 있습니다. 하루는 태조가 제안합니다.

“스승님, 오늘은 군신 관계를 떠나 편하게 서로에 대해 평소 하고 싶은 이야기를 나눕시다.”

“그러시죠, 전하. 먼저 말씀하시지요.”

그러자 이성계는 “당신은 도둑놈처럼 생겼소.”

이 말에 껄껄 웃고 나서 무학 대사가 말합니다.

“임금님은 부처님처럼 생기셨습니다.”

“아니, 아부하는 말 하지 않기로 하였잖소?”

이태조의 항변에 무학 대사는 또 다시 껄껄 웃으며 답합니다.

“하하, 도둑에게는 모두 도둑처럼 보이고 부처의 눈에는 모두 부처로 보인답니다.”

마음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천국과 지옥이 갈립니다. 중생 의식은 옳고 그름을 따지고 좋아하고 싫어함이 극명합니다. 붓다 의식은 판단 분별을 내려놓고 평등하게 수용하는 대자대비가 기조입니다. 중생은 나와 남의 잘못을 크게 힐난하지만 부처는 만중생의 아픔을 껴안습니다. 예수가 고난의 대중과 고통을 함께 하고 대변하다가 십자가 사형을 당한 이유와 같습니다.

믿음도 올바른 믿음이 아닌 맹목적인 믿음은 사망으로 안내하곤 합니다. 집단 자살을 한 ‘인민사원’ ‘오대양 사건’ 등이 그 예이지요. 믿음의 배경에는 고통과 두려움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고통과 불안의 그늘이 있기에 행복과 편안한 삶에 대한 희구가 있지요. 그저 믿음이 탄생하지는 않습니다. 마음이 아프고 힘들고 외로운 이들이 구원의 희망을 약속하는 이단 종교에 솔깃하며 끌려갑니다. 기적같은 신비한 구원이 있을까 하여 기성 종교인들도 기웃거리게 되지요.

십수 년 전 어떤 사람이 육신 부활을 굳게 믿은 나머지 자신의 누이 시신을 6개월간 아파트에 보관하다가 이웃에 의해 고발당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마음을 잘못쓰면 종교마저 독약이 되는 예입니다. 곰팡이는 음습한 것을 좋아하고 바이러스는 은밀하게 증식되듯이 사이비 종교일수록 비밀 결사처럼 행동하여 숨기는 게 많습니다.

9-8 거짓의 모습은 은밀하여 거짓인 줄도 모르고 진실인 것처럼 믿게 만듭니다. 거짓된 믿음은 코로나처럼 전파력이 강하여 주변을 선동합니다. 가족 친지 이웃으로 교세가 퍼져나가지요. 정작 위기 상황에서 불안에 대한 위로는 될지 몰라도 구원은 없습니다. 진정한 구원이란 고난 속에서 역경 속에서 배우는 영적 깨우침입니다. 애벌레는 나비가 되어야 하고 달걀은 닭이 되어야만 제대로 삽니다. 육신 부활을 믿는 맹목적 믿음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게 고통입니다. 에고를 내세우고 에고를 키우면 중생의 삶이요 에고를 내려놓고 에고를 부리면 부처의 삶입니다. 에고가 죽어서 참 자기로 거듭 태어나야만 진정한 부활이라 하겠지요. 2600년 전 태어난 그 분만이 부처님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부처라는 진실을 천명한 소식이 천상천하 유아독존이고 일체중생 실유불성입니다.

부처님 오심을 축하드리고 거룩한 가르침에 깊이 머리 숙입니다.

삶을 고통의 바다로 파악하고

고해에서 허우적거리는 모든 생명들을 위해

이 땅에 오신 그 분.

신들과 인간 세상에서

너 자신이 가장 존귀하다 하시네.

자신이 주인이 못되고

인정과 칭찬에 허기진

에고의 삶은 거짓된 삶이니

에고가 지어낸 온갖 신념들에 갇히지 않는

참 주인공으로 살라 하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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