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성범죄와 자유의지

 

유럽에서 성범죄를 반복해서 저지른 범인이 자신을 거세해달라고 요청했다. 자신은 석방되면 또 동일한 범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고 자신은 성적 욕망을 통제할 능력이 없다고 호소했다. 미국이나 유럽은 성범죄자의 화학적 거세가 가능하다. 강제로 실시하는 나라도 있고 범인이 요청해야 실시하는 나라도 있다. 심지어 화학적 거세가 아닌 물리적 거세를 강제하는 나라도 있다. 우리나라도 성범죄자에게 화학적 거세를 할 수 있는 법이 통과되어 현재 시행되고 있다. 검사의 청구나 위원회의 결정으로 가능하다고 하니 선진국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자유주의 욕망 이면의
윤리 이념 보완책 필요
불교 ‘업’사상 활용가능

 

인간은 과연 자유의지가 있을까? 인간은 성적 욕망 이외에도 많은 욕망이 있다. 식욕도 대표적인 인간의 본능이다. 인간은 어느 정도 식욕을 통제할 수 있을까? 담배와 술을 끊지 못하는 사람도 많고 마약 중독도 우리나라에서 증가 추세라고 한다. 불교는 욕망으로 인하여 고통이 생긴다고 보는 종교다. 욕망의 문제는 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과학적 연구주제이다.

뇌과학이 발달하면서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연구가 많이 진행되었다. 최초의 연구는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없다는 결과여서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다. 실험대상자에게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게 한 뒤에 선택의 과정을 뇌과학적으로 측정했는데 선택하기 전에 뇌에서 이미 결정이 이루어진다는 연구결과였다. 우리가 선택하는 순간 이전에 뇌에서 모든게 결정되고 우리는 어쩌면 뇌의 결정을 따르기만 하는지도 모른다는 연구결과였기에 충격적이었다. 이 실험에 문제가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동일한 실험을 더 정교하게 반복했는데 결과는 처음 실험과 동일했다.

우리는 자유의지로 선택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많은 선택은 이미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없는 요인에 의해 결정되는지도 모른다. 유전자, 교육, 경험 등이 우리의 뇌신경회로, 호르몬 등의 결정요인을 좌우하는데 인간이란 뇌신경회로, 호르몬 등이 지시하는 대로 하는 좀비라니 인간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연구결과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수긍되는 점이 많은 연구결과다. 최근에는 인체 내의 미생물 체계가 우리의 생각과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결과도 나왔으니 뇌신경회로, 호르몬, 유전자, 미생물 체계 이외에도 우리의 생각과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은 계속 밝혀질 것이다.

그동안의 여러 학문적 연구에 의해 유전자의 역할은 잘 알려져 있다. 일란성 쌍생아는 유전자가 동일하다. 만약 일란성 쌍생아가 태어나자 마자 헤어져 양육되면 과연 얼마나 다르게 자랄까? 미국에서 수천명의 이러한 사례를 조사한 연구 또한 흥미롭다. 아무리 다른 환경에서 자랐어도 유전자의 영향은 상당히 높았다. 연구에 의하면 일란성 쌍생아들은 100% 일치하지는 않았지만 여러 가지 선택에 있어 유사성이 평균보다 훨씬 높았다. 예를 들어 결혼한 배우자가 비슷한 유형이었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동일한 정당을 지지하는 일란성 쌍생아의 비율이 매우 높았다.

범인이 범죄를 저지른 게 자유의지가 아니라면 그 사람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을까? 우리는 자칫 자유의지가 없다면 책임을 물을 수 없으니 그 사람을 감옥에서 풀어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책임의 유무를 가지고 논하기보다 범죄를 저지르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를 논해야 한다. 지금까지는 범죄를 저지르면 일정 기간을 감옥에서 보내게 한 뒤 석방했다. 만약 자유의지가 없기에 범죄를 저질렀다면 완전히 인간이 바뀌기 전에는 절대 석방하면 안된다. 행위에 대해 책임지기 위해서 감옥에서 계속 있어야 하는게 아니라 자유의지가 없기 때문에 계속 감옥에 있어야 한다. 자유의지가 없는 위험한 인물을 풀어주면 또 다시 범죄를 저지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말 인간에겐 자유의지가 없을까? 다행히 최근 뇌과학 연구에 의하면 인간에겐 자유의지가 전혀 없지는 않고 약간의 자유의지가 있다고 한다. 자유의지의 영역이 생각보다 좁다는 연구결과지만 이 연구가 과연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진행될지는 모른다. 자유의지의 영역이 매우 좁다는 연구결과는 우리의 상식에 제법 부합한다. ‘세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우리 속담이 있다. 한번 형성된 습관이 바뀌기 어렵다는 뜻이다. 즉 자유 의지로 버릇을 없애려고 해도 잘 안된다는 의미이다. 그렇지만 못된 습관을 바꾸는 게 불가능하지는 않다. 버릇을 고친 소수의 사람이 있지 않은가?

불교에서 업사상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우리가 말, 행동, 생각으로 업을 지으면 업은 분명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다. 만약 업사상을 숙명론으로 받아들이면 업사상을 잘못 이해하는 것이다. 업을 지었어도 다른 요인, 조건과 결합하여 결과가 발생하기 때문에 100% 업에 의해서만 결과가 결정되는 게 아니다. 게다가 수행에 의해 우리는 업을 소멸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업이 한 번 지어지면 거기에서 회피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부처님은 육사외도를 비판하시면서 숙명론은 잘못된 견해라고 하셨으니 업사상을 숙명론으로 해석하면 불교가 아니다. 업의 힘은 매우 강하다. 업을 소멸하기는 어렵다. 그렇기에 어쩌면 자유의지의 영역이 작다는 뇌과학의 최근 연구는 불교의 관점과 맥을 같이 한다.

불교는 수행의 종교이다. 부처에게 의존하고 기도하는 타력종교의 측면도 있지만 수행을 통해 스스로 변화하려는 자력종교의 측면도 있다. 부처님은 욕망에 좌우되는 인간의 나약함을 불타고 있는 욕망으로 표현하셨다. 해탈이란 욕망의 부림에서 벗어나는 것이라고 경전은 설한다. 수행이란 결국 욕망의 노예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100% 욕망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인간은 자유의지가 전혀 없는 욕망의 노예에 불과하다. 욕망에 의해 부림 받지 않는 인간이란 수행에 의해 자유의지를 갖는 인간이며 업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는 인간이다.

경제학자도 인간의 변화 가능성을 부인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경제학 교과서에는 인간을 어떻게 변화시켜서 효율적인 자원배분을 실현할까에 대한 내용은 거의 없다. 경제학에서 이기심과 욕망에 좌우되는 인간을 어떻게 변화시킬까에 대한 내용은 찾아보기 힘들다. 오히려 시장에 자율을 부여하면 인간의 본성인 이기심이 작동하지만 그 결과는 효율적인 자원배분이 달성된다는 주장이 신고전파 경제학의 핵심 내용이다. 2007년 세계 경제 위기로 이러한 주장이 다소 꺾인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도 경제학에서 건재하다.

불교 경제학은 인간의 변화 가능성이 핵심이다. 시장에는 수많은 생산자와 소비자가 있다. 생산자와 소비자 모두 욕망과 본능에 의해 좌우되는 존재다. 불교 경제학은 생산자와 소비자의 변화를 통해서 시장자본주의의 한계를 극복하고 보다 바람직한 자원배분을 실현할 수 있다고 믿는다. 경제학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아담 스미스는 윤리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도덕 감정론’이라는 저서까지 냈지만 후세 경제학자는 대부분 생산자와 소비자의 윤리 수준을 향상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해서 외면한 것은 사실이다.

정치학자도 인간의 변화 가능성을 부인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정치학 교과서에서 인간을 어떻게 변화시켜 좋은 정치를 달성할까에 대한 내용을 찾아보기는 매우 어렵다. 정치학은 경제학 보다는 경제학의 소비자에 해당하는 시민 교육에 관심을 기울이지만 불교의 관점에서 볼 때는 참으로 미흡하다. 정치학은 경제학 보다는 경제학의 생산자에 해당하는 정치인 양성에 관심을 기울이지만 정치학의 주류 내용은 아니다.

정치학과 경제학은 아직도 인간을 고정된 상수로 놓고 이론을 전개한다. 불교가 보는 정치는 인간의 변화를 통해서 많은 부분이 개선될 수 있는 영역이다. 불교에서 보는 인간의 변화는 단순히 정치인에게 정치에 도움이 되는 기술을 가르치라는 게 아니다. 불교는 사물과 현상을 어떻게 보고 어떻게 의사결정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획기적으로 다른 관점을 제시한다. 좋은 시민이 되기 위해서도 인간은 변화되어야 한다. 사물과 현상을 보는 방식과 의사결정을 하는 방식이 불교적으로 바뀐다면 정치는 한 단계 성큼 성장할 수 있다.

불교의 지혜란 사물과 현상을 보는 눈을 바꾸는 지혜이고 생각과 행동을 바꾸는 지혜이다. 경전은 해탈하면 사물과 현상을 있는 그대로 알고 볼 수 있다고(여실지견) 설한다. 정치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 알지 못하면 정치에 대해 생각하는 우리 수준이 결코 향상될 수 없다. 정치에 대해 생각하는 수준이 어리석은데 올바른 정치인과 국민의 행동이 나올 수 없다.

기도와 제사가 중심인 한국 불교는 수행의 종교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우리는 다시 부처에게 돌아가야 한다. 기도와 제사의 긍정적인 측면을 부인하는 게 아니다. 수행을 해야 불자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을 뿐이다. 정치도 수많은 원인과 조건, 즉 인연에 의해 발생하는 연기적 작용이다. 대한민국은 미세먼지와 정치만 개선되면 참으로 살기 좋은 나라다. 뉴스를 보기 싫어 TV 채널을 돌린다는 사람이 한 두명이 아니다. 정치는 국민의 고통을 해결해주어야 하는데 오히려 정치가 국민에게 고통을 준다. 잘못된 정치로 인한 고통도 생로병사의 고통처럼 불교적 관점에서 해결해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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