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사회적 거리두기 속
취약계층 피해 확산돼
모두를 끌어안는 노력
불교계의 당위적 책무

삶의 ‘잠깐멈춤’ 속에서
당연시된 타성 의문생겨
발전·성장주의 경종 의미
삶에 대한 성찰 필요해

코로나 팬데믹이 세상을 휩쓸고 있다. 코로나19는 독특해서 사회의 빈부를 절묘하게 파고드는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육체적으로는 쇠약한 자를 집중 공격하고, 물질적으로는 가난한 자를 집중 공격하고, 의료적 측면에서는 의료시스템이 취약한 곳을 집중 공격하고, 사회적으로는 안전망이 약한 곳만 골라서 집중 공격하는 것처럼 보인다. 

세계 대부분의 국가들은 코로나 팬데믹에 대응해 인간과 인간의 사이에 물리적 거리라는 장벽을 설치하고 있다. 일명 ‘사회적 거리두기’ 혹은 ‘물리적 거리두기’ 운동이다. 코로나19가 가진 근본적인 약점을 활용해서, 사회가 그리고 인간이 당할 수 있는 피해를 최소화하려는 노력이다. 

이 같은 대응은 일정 부분 성공을 거두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성공의 다른 쪽에서는 인간 개개인과 사회 시스템 전체에 있어서 적잖은 희생을 감수하고 있고, 또 그 시스템에서 취약한 계층이 더 많은 피해를 당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여전히 제대로 대응 못할 수밖에 없는 취약계층은 존재한다. 그리고 그러한 취약계층을 끌어안고, 모두를 끌어안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종교계 특히 우리 불교계가 당위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책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 같은 팬데믹 사태가 끝났을 때, 우리의 삶이 어떻게 바뀔 것인가 하는 것 역시 중요한 문제로 마음 한쪽의 화두로 남아있다. 

반면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에 따른 바쁘지 않은 혹은 바쁜 일상에 대응하는 방법론의 근본적인 변화가 우리 삶의 방식에 전혀 새로운 과제를 환기시킨다. 가족 내부 구성원 간의 관계 역시 만만찮은 변화의 경험을 제공하고 있음을 부정하기 힘들다.

필자는 스스로와 주변의 삶에 일어나고 있는, 콕 찍어서 말하기 힘든 이러한 변화들을 ‘잠깐 멈춤’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방식과 지금까지의 생각하는 방식에 고민을 던지게 하는 그 ‘잠깐 멈춤’이다. 그런데 그 ‘잠깐 멈춤’이 의외로 길어지면서,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삶의 타성들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혹은 산업화 이후의 최근 백여 년에 이르는 동안, 우리 인간이 추구해온 발전과 성장 위주의 삶에 경종을 울리는 ‘잠깐 멈춤’으로도 읽힌다.     

올해 2564번째로 맞이하는 부처님 오신 날은 유독 길어졌다. 코로나 팬데믹에 대응하기 위해 범불교계가 올해의 부처님 오신 날 봉축법요식을 윤4월 초파일인 5월 30일에 치르기로 연기하면서다. 실제로는 한 달 동안 내내 부처님이 우리 옆에 머물면서, 우리 삶에 화두를 던지시게 된 셈이다. 
 

언제나처럼 단 하루에 불과한 부처님 오신 날이었다면, 올해도 여느 해처럼 몇몇 사찰을 찾아다니며 연등공양을 올리기 바빴을 것이다. 그런데 한 달 동안 우리 곁에 머무시는 것이라 생각을 돌려보니, 한층 여유를 부리게 되었다. 그 와중에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다 문득 든 생각이다.

“왜 올해에는 부처님이 우리 곁에 한 달이나 머무시는 것일까?” 올해는 유독 신경 써야할 중생들이 많아져서? 아니면, 우리가 타성처럼 받아들인 삶의 방식을 고치기에 하루만으로는 너무 부족해서?

저마다 떠오르는 답변은 다르겠지만, 코로나 팬데믹이 던져준 ‘잠깐 멈춤’과 ‘한 달 동안 부처님 바로 옆에 계심’에 즈음하여, 내가 손에 든 화두는 ‘내가 젖어있는 타성’ ‘내 주변 사람들이 젖어있는 타성’은 무엇인가이다. 그리고 그에 앞서 스스로에게 던져지는 질문은 누구나 비슷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잘 살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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