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최주현

어느 해는 봄이 시작되자마자 여름이 몰려와 봄옷 입을 겨를도 없이 여름옷을 준비해야할 때가 있다. 특히 올해는 윤달이 있어서인지 유독 봄이 길게 느껴진다. 6년 전인 2014년도 윤달이 있는 해였는데, 그 때도 봄이 길게 느껴졌던 기억이 있다. 그 해의 화창한 봄날은 내게 특별한 추억이 있었다. 어느 병원 개원식에 참석했다가 지금은 고인이 된 아일랜드인 미리엄 수녀님을 만났다. 이전에도 서로 일면식이 있던 사이라 자연스레 인사 했고, 수녀님은 본인이 운영하는 공동체를 방문해 달라고 나를 초대했다.

며칠 후 방문한 수녀님의 작은 공동체는 2층 주택을 개조한 공간이었다. 이내 수녀님 처소가 있는 2층으로 안내 되었다. 밖으로 나있는 비좁은 계단을 올라가 도착한 2층은 수녀님 처소와 환자 방사가 있었다. 쉼터를 찾은 환자들이 많을 경우에는 2층 방까지 사용할 때도 있다고 말했다. 

수녀님의 안내로 올라간 2층서 유독 눈에 들어온 것이 있었다. 거실 벽면에 ‘오유지족(吾唯知足)’이라고 쓴 액자와 그 아래 놓여진 분홍 연꽃등이었다. 비록 외국인이지만 불교적이고 한국적인 물건들을 소중하고 의미있게 생각하는 모습이 내 마음에 잔잔한 울림으로 다가왔다.
잠시 후 수녀님은 알이 굵은 염주와 백팔 염주를 나에게 건네며 말했다. “이곳서 계시다 돌아가신 형제분이 불자셨어요. 그 분이 임종 후 남겨진 유품인데 이제 스님께 전합니다.” 

천천히 말하는 독특한 외국인의 발음이기에 그의 말이 더욱 또렷이 들린 것일까? 뒤통수를 세게 맞은 것처럼 아찔했다. ‘아! 이곳에도 불자가 계셨구나’라고 생각하니 느낌이 남달랐다. 

받아든 염주에선 기도한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염주 주인은 한 알씩 돌리며 부처님께 무엇을 기도했을까? 보리수 백팔염주가 내 손에 닿는 순간, 그 분의 간절함과 외로움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리고 그 염주를 오랜 세월 간직하다 전해 주시는 그 수녀님의 배려심과 환자의 다른 종교마저도 존중해 준 종교와 인간애에 가슴이 뭉클했다. 

그런데 작년 8월, 미리엄 수녀님이 갑자기 임종하셨다는 전화를 받았다. 정말 믿기지 않았다. 다리수술을 위해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듣고 병문안 갔을 때만도 괜찮았는데, 며칠 지나지 않아 들린 임종 소식은 정말 청천벽력과도 같았다. 수녀님으로부터 건네받은 그 염주를 돌리며 수녀님께서 편안히 영면에 드시길 기도했다. 감염 환자들을 위해 머나먼 타국인 우리나라에서 헌신과 사랑을 펼쳐주신 수녀님, 극락왕생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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