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사 ‘말·행동’ 간화선 토대 이루다

禪어록·전등록 선문답 집합체
어록 발달, 중국적 사유 특색
선사 행적·대화서 가르침 확인
어록 일부는 공안으로 발전해

중국 사천성 신도현 보광사 선방 방장의 자리. 간화선은 선사의 말과 행동들은 어록으로 모았고 이후 어록의 일부는 공안으로 발전했다.

1)선 문헌에 관한 모든 것 
①선문답과 어록의 성립

중국 고유 분류법에 따르면, 선종의 어록은 ‘자(子)’, 저술은 ‘집(集)’이라고 한다. ‘자’는 <노자> <장자> <한비자> 등 사상적인 기록 문헌이며, ‘집’은 시문집과 같은 문학적 범주에 속하는 문헌이다. 어록(語錄)은 ‘자’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선종의 기록 문헌인 <어록>이나 <전등록>은 선문답의 집합성이라고 할 수 있다. 

당대 조사선 시대에 선문답이 발전하면서 대승경전을 중심으로 정립했던 선사상이 송대로 들어서면서 어록 중심으로 옮겨갔다. 이 어록의 발달은 중국에서 <논어> 이래 중국적인 사유의 독특한 특색이다. 어록은 선사 개인의 행록과 법어로 이루어진다. <조주록> <마조록> <임제록> <위앙록> <조동록> 등이 널리 알려져 있으며, 한국에서 편찬된 어록으로는 한국 임제종의 시조인 보우의 <태고화상어록> <나옹어록> <백운어록>, 선시(禪詩)의 보고인 진각혜심의 <선문염송집(禪門拈頌集)> 등이 유명하다. 

②전등사    
선종의 법계와 역사를 편찬한 대형 선종사서이다. <능가사자기> <전법보기(傳法寶紀)> <보림전(寶林傳)> <조당집> <전등록> <오등회원(五燈會元)> <지월록(指月錄)> 등이다. 
                                                                        
③공안집 
선의 공안을 모아서 후대에 규범으로 편찬한 것이다. <벽암록(碧巖錄)> <무문관(無門關)> <종용록(從容錄)> 진각혜심의 <선문염송집(禪門拈頌集)> 등이다. 

④청규 
선사들의 수행과 선원의 생활 규칙에는 <백장청규(百丈淸規)>(선원의 생활 규칙) <종문십규론(宗門十規論)> <초발심자경문(初發心自警文)> 등이 있다.  

⑤좌선론 
좌선 방법을 언급한 좌선론에는 <좌선의(坐禪儀)> <좌선잠(坐禪箴)> <휴휴암좌선문(休休庵坐禪文)> 등이 있다. 

⑥수필 
선문 일화집은 수필이라고 볼 수 있는데, 선문의 여러 가지 일화를 모은 것이다. 주로 송대에 많이 편찬되었다. <임간록(林間錄)> <대혜종문무고(大慧宗門武庫)> <설당습유록(雪堂拾遺錄)> <나호야록(羅湖野錄)> <운와기담(雲臥記譚)> <선림보훈(禪林寶訓)> 등이다.  

2)어록의 특징 및 구성                                       
①어록의 특징 

어록이란 용어는 선종, 특히 조사선 시대에 선사들의 일상생활에서 대화나 행적을 기록한 것을 말한다. 후대에는 이 단어가 위인이나 유명인의 말을 모은 기록으로 광범위하게 쓰이고 있다. 그런데 어록이 발전하게 된 데도 시대와 맞물려 있다. 당나라 말기 오대에 정치적인 혼란을 극복하고자 왕권 중심의 국가주의와 유교를 통치에 반영하고자 하였다(유교가 발전하는 시기). 불교계 선종도 어록과 공안을 편집하고 총림 제도의 완비를 통해 당대에 완성된 선종을 계승·정리가 요구되었다. 즉 송대에 들어 점점 퇴색해가는 당대의 선을 계승코자 하는 선사들의 노력이기도 하다. 

이에 선자들은 달마 이후 선종의 법계를 정리한 <조당집>과 <전등록>을 완성하고, 어록에 수록된 선사들의 언어와 행동을 사상적인 판례로 삼기 시작했다. 이것이 공안선 출현의 배경이 된다.   

어록은 조사선의 특질 가운데 큰 위치를 차지한다. 당나라 때까지만 해도 선사들이 대승경전에서 수행의 근거를 찾았다. 점차 후대로 가면서 경전 인용이 점차 줄어들었다. 경론을 중시하는 인도적인 색채를 벗어나 중국 특유의 선종이 탄생되었다. 즉 어록이 등장하면서부터 중국에서는 위경(僞經)이 사라지는 현상이 드러났다. 상당설법(上堂說法)뿐만 아니라 스승과 제자간의 일상적인 대화와 행동을 단편적으로 모아 수록한 것으로, 선을 일상의 종교화로 만든 중요 요인이 되었다. 

직접적으로 인간의 말이 존중되고, 경전의 권위보다는 사람의 생활을 문제 삼았다. 어록의 편집은 본인이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제 3자가 기록하는 것이 특징이지만 선사 생전에 그의 감독 하에 행해져 해당 선사가 입적하면 곧 간행되기도 하였고, 경우에 따라서는 선사 생전에 간행되기도 하였다. 입적 후에 편집되는 경우에도 완성된 원고를 다른 선배들에게 보여 첨삭을 부탁한 후에 그들의 서문과 발문을 받아 간행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②어록의 구성
선사가 생전에 주석했던 사찰의 순서대로 편집하는 방식이 있고, 대체로 선사의 전기·법어·선문답·선시로 구성을 이룬다. 법어에는 상당설법·시중(示衆, 선사가 제자에게 조참朝參이나 만참晩參하는 것)·송고(頌古) 등으로 분류하여 편집하는 방식이 있다.

어록은 특히 한 선사의 전기(행록)로 이루어진 부분이 많다. 선사의 행록에서 선사와 제자의 관계를 축으로 선종사가 발전하게 된다. 개인과 개인의 체험, 선사들 간의 대화가 엮어져 선종의 역사를 이루었다. 여기에 편지나 선사의 저작을 모두 함께 넣어서 편집한 문헌을 광록(廣錄)이라고 한다. 대표적인 광록으로는 <굉지선사광록> <천목중봉화상광록> 등이 있다. 

또한 한 일파의 (법맥으로) 네 선사들의 기록을 모은 것을 사가어록(四家語錄)이라고 한다.   사가어록의 대표로는 송나라 초기인 1085년, 황룡 혜남에 의해 편집된 마조계 어록이다. 즉 마조-백장-황벽-임제의 어록을 모은 것이다. 또한 <황룡사가록(1153)>이 전하는데 황룡-회당조심-사심 오신-조종 혜방의 어록 모음이다. 운문종에서도 덕산-암두전활-설봉의존-현사사비의 어록을 모은 <덕산사가록>이 전한다. 또한 <자명사가록>이 전하는데, 자명 초원-양기방회-백운수단-오조 법연의 어록을 모은 것이다.  
  
③어록이 끼친 영향 
당대에 발전한 어록 문학의 장르는 점차 후대로 가면서 다른 양상을 띠게 되었다. 

첫째, 송나라 시대로 접어들어 어록의 내용 중 일부가 공안으로 변형되어 간화선이 형성되는 근원이 되었다.  

둘째, 송대에 이르러 유가(儒家)의 어록 형성에도 영향을 주었다. 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영향을 미치어 보편적으로 쓰이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로 현재 마오쩌뚱의 말을 모아놓은 <마오쩌뚱 어록>이 중국 인민들에게 읽히고 있다. 

3)공안이 형성된 機緣               
당나라 시대, 선이 활발하게 발달하면서 스승과 제자들은 단순히 선방에 앉아 좌선하는 것만으로 깨달음을 구하지 않았다. 스승과 제자가 함께 생활하는 속에서 선이 발달했던 것이다. 곧 스승과 제자들은 농사 짓고, 밥 먹으며, 차를 마시고, 산책하는 등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선문답이 이루어졌다. 이것이 후대 공안으로 만들어졌는데, 그 기원을 마조 도일(馬祖道一, 709∼788, 조사선의 開祖)에 두고 있다. 할의 기원으로는 삼일이롱과 황벽토설이고, 행위의 기원으로는 백장야압이다.  
 
①喝의 기원- 삼일이롱·황벽토설 
백장 회해(百丈懷海, 749~814)가 마조 선사를 모시고 있을 때의 일이다. 백장은 법상 모서리에 있는 불자(拂子)를 보고 마조선사에게 물었다. 
“이 불자에 즉(卽)해서 작용합니까?, 아니면 이 불자를 여의고(離) 작용합니까?” 
“그대가 훗날, 법을 설하게 되면 무엇을 가지고 대중을 위해 제접할 것인가?”  
백장이 대답을 하지 않고, 그 대신 불자를 잡아 세웠다. 마조가 이를 보고 물었다. “이것(拂子)에 즉해서 작용하느냐, 아니면 이것을 여의고 작용하느냐?”
백장이 불자를 다시 제자리에 갖다 놓았다. 마조가 순간, ‘악!’하고 고함을 질렀다. 백장은 사흘 동안 귀가 먹었다. -<백장록>

이 이야기는 스승 마조의 고함소리에 제자 백장이 3일 동안이나 귀가 먹었다는 삼일이롱(三日耳聾)의 공안이다. 훗날 백장의 제자인 황벽 희운(黃檗希運, ?~856)이 백장에게 말한다. 
“마조선사를 친견하고 싶습니다.”
백장이 ‘마조선사는 이미 돌아가셨다’고 답한다. 이에 황벽이 ‘그렇다면 마조스님이 어떤 법문을 남겼느냐?’고 질문한다. 백장은 제자 황벽에게 이렇게 말한다. 
“불법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내가 지난날 마조의 두 번째 할을 듣고, 3일 동안 귀가 먹고 눈이 멀었느니라.”
이 말을 듣고 황벽이 그 자리에서 깨닫고 혀를 내밀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이를 ‘황벽토설(黃檗吐舌)’ 공안이라고 한다. 이 공안도 <백장록>에 전한다. 

②行爲의 기원- 백장야압
마조와 백장이 들판을 지나는 중이었다. 이때 들오리 떼들이 날아가는 것을 보고, 마조가 백장에게 물었다. “저것이 무슨 물건인고?”
“들오리입니다.” 
“어디로 갔는가?”
“이미 날아갔습니다.” 
마조 선사가 머리를 돌려 백장의 코를 한번 비틀었다. 백장은 아픔을 참느라고 소리를 질렀다. 마조가 말했다. “다시 한 번 날아갔다고 말해봐라.” 백장은 마조의 말끝에 깨달은 바가 있었다. -<백장록>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할 것이 있다. 고함소리에 3일이나 귀가 먹는다는 것은 약간 비상식적이다. 그만큼 스승의 가르침에 대한 강한 의미를 상징한다. 이 점은 후대 임제계 양기파에서 선종이 발달하면서 마조-백장-황벽-임제 등으로 법맥이 흘러온 것을 정립하기 위한 것이다. 곧 사자상승의 상징적인 의미를 덧붙여 선의 법맥을 강조한 측면으로 보인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