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회 다시(茶詩)로 본 고려차문화

어원 옥아와 백차.

고려의 문인들은 육우(陸羽733~804)의 <다경(茶經)>을 읽으며 차의 원리를 터득하려 하였고, 차를 즐긴 당대의 문장가 한유(韓愈, 768~824)나 유종원(柳宗元, 773~819), 이백(李白, 701~762), 두보(杜甫, 712~770), 노동(盧仝, 790~835) 같은 이들의 시문을 통해 문인이 지향했던 오묘한 차의 세계를 이해하려 하였다.

그리고 송대의 구양수(歐陽脩, 1007~1072), 삼소(三蘇)로 칭송된 소순(蘇洵, 1009~1066), 소식(蘇軾, 1036~1101), 소철(蘇轍, 1039~1112)), 왕안석(王安石, 1021~1086) 같은 사대부들의 시문에 드러난 이상적인 차의 효능을 경험하고 공감하려 하였는데, 현재까지 남아 있는 고려의 관료 문인들이 남긴 수십 편의 다시(茶詩)는 이를 확인할 문헌 자료이다.

특히 고려 문인들의 다시 중에도 이규보(李奎報, 1168~1241)의 시는 차의 고아한 세계를 잘 드러냈는데, 이는 그의 차에 대한 안목뿐 아니라 당대 문인들의 차에 대한 인식, 그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던 찻그릇, 승원에서 벌어진 명전(茗戰) 놀이 등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담고 있는 점이다.

그런데 그의 <옥당(玉堂) 손득지(孫得之), 사관(史館) 이윤보(李允甫), 사관 왕숭(王崇), 내한(內翰) 김철(金轍), 사관 오주경(吳柱卿)이 화답시(和答詩)를 보내왔기에 다시 운을 따라 화답하다(孫玉堂得之李史館允甫王史館崇金內翰轍吳史館柱卿見和 復次韻答之)>는 한 편의 장시이지만 차 문화의 전반을 살필 수 있는 정보가 담겨 있다. <동국이상국집> 권13에 수록된 이 시는 유려한 문체로, 차 역사와 13세기 고려의 차 문화를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그러므로 그의 이 다시는 고려 차 문화의 전반적인 흐름을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전체의 시를 그 맥락에 따라 세분하여 그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이 시의 첫째 단락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상품간아

옛적에 신농씨는 온갖 초목을 맛보고(昔者神農嘗草木)
방경을 저술하여 기혈을 보충하려 했는데,(著之方經要補氣)
유독 차만은 기록하지 않고 버려두어(獨於茗飮棄不收)
온갖 만물과 차의 같고 다름을 논하지 않았네(不與萬品論同異)
성인의 말하지 않은 바를 누가 먼저 평했던가(聖所未到誰唱先)
해탈에 힘쓰는 연 스님이 더욱 즐긴 것이라(?昏釋?尤所嗜)

윗글은 이규보가 인식한 고대 중국 차 역사인데, 차를 처음 응용했던 그룹이 승려라는 견해를 피력했다는 점이 눈에 띈다. 알려진 바와 같이 신농씨는 전설 속의 인물이자 농사법과 약초를 규명하여 세상을 이롭게 했던 황제로, 염제(炎帝)를 말한다. 그런데 이규보는 “옛적에 신농씨는 온갖 초목을 맛보고” 병을 치료하는 약초를 사람들에게 알려준 인물인데, 약효가 좋은 차를 언급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그의 이런 견해는 종래의 설과는 다르다. 성당 때 중국의 차 문화를 집대성한 육우의 <다경>에 “삼황(三皇) 중에 염제 신농씨가 최초로 차를 알았다”고 하였는데, 이런 그의 견해는 일반적인 통설로 인정되었기에 초의선사(1786~1866)도 <동다송>에서 “염제의 <식경(食經)>에 차를 오래 마시면 사람이 힘이 생기고 마음이 즐겁다고 했다”고 하여 육우의 견해를 수용한 것으로 생각한다. 더구나 이규보는 <다경>을 애독했던 인물이었다. 처음 차를 즐긴 그룹이 승려였다는 그의 견해는 무엇을 근거로 한 것인지 분명하지는 않다. 다만 고려 시대 차 문화를 주도했던 핵심이 승려였음을 드러내려는 의도가 아닐까. 아무튼 다음 단락을 살펴보면 13세기 고려에서는 차가 유통된 정황을 밝혔다. 그 내용은 이렇다.

요사이 사고 파는 차는 속임수가 많아(近遭販?多眩眞)
약삭빠른 장사꾼의 계략에 달렸구나(競落?商謀計裏)
속된 의원들이 신선의 방술에 어두운 것과 같아(有如俗醫迷仙方)
망령되게 새머루를 가리켜 칡덩굴이라 하네(妄把??云是?)
그런 중에도 (차)오묘하고도 정미함을 평하는 자 있으니(箇中評品妙且精)
오직 운봉에 사는 한 선사라네(唯有雲峰一禪子)

이규보가 살았던 13세기의 차 문화는 발전할 대로 발전하였던 시기로, 왕실귀족, 승려, 관료문인들 사이에서는 최고급 백차(白茶)가 유행되었던 시기다. 그러므로 차를 애호하는 사람이 많아지자 중국차를 사고파는 상인이 있었는데, 나쁜 차를 좋은 차로 속여 파는 일이 허다했나 보다. 그러기에 “망령되게 새머루를 가리켜 칡덩굴이라(妄把??云是?)”하는 상인들의 속임수가 많았던 폐단을 지적하였다.

차가 유통된 정황은 서긍의 <선화봉사고려도경>에도 “(중국 황실에서)하사한 차 이외에도 상인들도 가져다 팔기 때문에 근래에 두루 차 마시기를 좋아하여 다구에 더욱 정성을 들인다.(自錫賚之外 商賈亦通販故 邇來頗喜飮茶 益治茶具)”라고 한 대목에서도 확인된다. 따라서 12~13세기 고려에서는 송나라 황실에서 하사한 용봉단차이 외에도 상인들이 거래하는 중국차가 유통되고 있었다. 그런데 예나 지금이나 이해관계에 밝았던 상인들의 속임수는 여전했던 듯하다.

한편에는 이런 흐름이 있었다 하더라도 차의 고수는 있게 마련이다. 그 중에도 차에 밝은 사람은 이규보와 막역했던 운봉에 사는 승려라는 것인데, 운봉에 사는 수행자는 바로 규(珪)선사을 말한다. 일찍이 이규보는 <운봉에 사는 규선사께>라는 시를 썼는데 여기에서도 운봉의 규 선사가 차에 밝았던 인물임을 극찬한 대목이 보인다.

그렇다면 승원이나 왕실 귀족, 관료 문인들이 향유했던 최고급 백차는 어떤 차였든 것일까. 차의 품색을 서사적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평소 절로 미소 짓게 하는 섣달에 움튼 차 싹이(平生自笑臘後芽)
톡 쏘는 강렬한 (차) 향기, 코를 찌르네(辛香辣氣堪掩鼻)
우연히 몽산에서 딴 첫차를 얻어(偶得蒙山第一摘)
물이 끓기도 전에 우선 맛을 보았지(不待烹煎先嚼味)
미친 객이 한번 맛보고 유다라 부르니(狂客一見呼孺茶)
늙은 나이에 어린애처럼 탐내는 데야 어이하리(無奈老境貪幼稚)
강남에선 눈 속에서 따지 않았다면(不是江南冒雪收)
이월 중에 어이 서울에 당도하랴(京華二月何能致)
물건 팔림이 모두 사람에 달렸으니(物之自?皆由人)
다리 없는 옥 같은 차도 오히려 찾아오네.(珠玉亦猶無脛至)
시로써 논평하여 보계(譜系)에 대신하고 싶지만(作詩論詰欲代譜)
붓 끝에 혀 없으니 자세히 진술할 수 없구려(筆端無舌莫詳備)
유선(儒仙)에게 그 정수(精粹)를 발췌하게 하여(要令儒仙抉其精)
허술한 종이에 거친 글씨로 써 보내오(硬??字書以寄)

다섯 친구 연원 찾는 데 노력하였기에(五君騁思採淵源)
거울에 비치듯 조금도 어긋남이 없네(毫髮莫逃如印水)
시를 감상해 보니 다경보다 좋구려(見詩猶勝見茶經)
육우가 품한 것도 찌꺼기에 불과할 뿐이네(陸生所品糟粕耳)

격조 높은 이소경에 붙일 것은 못되지만(調高未合綴離騷)
시편의 뒤에 이을 정도는 되리(當繫詩篇聯四始)

소식의 초상화

이규보를 미소 짓게 한 차는 섣달에 움튼 차 싹으로 만든 최상급의 단차(團茶)였다. 1186년에 저술된 조여려(趙汝礪)의 <북원별록(北苑別錄)>에 섣달에 움튼 차 싹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작은 싹은 그 작기가 매 발톱과 같다. 처음 용단승설 백차를 만들 때, 그 차 싹을 먼저 골라 다음에 쪄 익힌다. 찐 잎을 물동이에 넣고 그 정령한 것을 쪼게 (속대를 ) 취하니 겨우 작은 침과 같았다. 이것을 수아(水芽)라 부른다. 이것을 작은 차싹 중에 가장 좋은 것이라 한다.(小芽者 其小如鷹爪 初造龍團勝雪白茶 以其芽先次蒸熟 置之水盆中 剔取其精英 僅如針小 謂之水芽。是小芽中之最精者也)

매 발톱처럼 생긴 차 싹을 따기 위해 차출된 백성의 노고를 짐작하게 한다. 더구나 차를 쪄서 속대를 발라냈는데, 물속에 잠긴 속대가 마치 은으로 만든 실처럼 보이기에 은선수아(銀線水芽)라 불렀던 차를 말한 것이다.

이규보를 미소 짓게 한 차는 이런 차였다. 그러니 “톡 쏘는 강렬한 (차) 향기, 코를 찌르네”라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보계를 짓고 싶지만, 붓끝으로 표현할 수 없었던 진귀한 차였다. 나름대로 차를 잘 알았던 이규보의 친구, 옥당(玉堂) 손득지(孫得之), 사관(史館) 이윤보(李允甫), 사관 왕숭(王崇), 내한(內翰) 김철(金轍), 사관 오주경(吳柱卿) 등은 차의 연원을 잘 아는 사람들이라 차의 품평에 오차를 내지 않을 실력을 갖췄다. 그러니 이들이 쓴 차의 화답시는 <다경>보다 뛰어났고, 육우보다 상등한 품평가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 시는 고려인의 차에 대한 열정이나 긍지, 안목에 관한 자신감을 함께 드러낸 것이라 하겠다.

박동춘 (사)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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