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심지법(心地法)

“여러분, 산승이 법을 설하는 것이 무슨 법을 설한다고 생각하는가? 심지법(心地法)을 설하는 것이니라. 범부(凡)에도 들어가고 성인(聖)에도 들어가며 깨끗한(淨) 데도 들어가고 더러운(穢) 데도 들어가며 참된(眞) 것에도 들어가고 속(俗)된 것에도 들어가는 것이니라.

중요한 것은 진(眞)·속俗)·범(凡)·성(聖)이라 구분하여 말하지만 실제로는 진·속·범·성이라 이름 붙여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진·속 ·범 ·성이 사람에게 이름을 붙여 달라 할 수도 없는 것이니라. 여러분, 잡아 쓰면 그만이지 다시는 이름을 붙이지 말라. 이런 것을 현묘한 뜻(玄旨)이라 하는 것이니라.

산승이 설하는 법은 천하 사람들이 설하는 것과 다르니라. 문수보살이나 보현보살이 내 눈앞에 나와 각각 하나씩 몸을 나타내 법을 묻되 ‘화상에게 묻겠습니다’라고 한다면 그 즉시 나는 벌써 알아차려 버린다.

노승이 안온하게 앉아 있는데 도를 닦는 어떤 이가 찾아와 서로 만날 때도 나는 다 알아차려 버린다. 어째서 그런가 하면 산승의 보는 곳은 달라서 밖으로 범 · 성을 취하지 않으며 안으로 근본(마음)에도 머물지 아니하여 보는 것이 철저해서 더 이상 의심하거나 그르침이 없기 때문이니라.”

심지법문(心地法門)이란 마음을 깨친 경지를 드러내는 법문이라는 말이다. 〈심지관경〉, 〈능엄경〉, 〈범망경〉 등 여러 경전에도 심지법문이라는 말이 자주 나오듯이 부처님의 법문이 넓은 의미로 볼 때 모두가 심지법문이다. 하지만 여기서는 선수행을 통한 마음자리를 깨친 법문이란 뜻에서 쓰인 말이다. 깨달음으로써 법칙을 삼아(以悟爲則) 확철대오하여 종통(宗通)을 얻은 법문이다. 선에서는 종통을 중요시한다. 상대적인 말에 설통(說通)이란 말도 있다. 이론적 설명을 잘 해주는 것을 말한다. 아무리 교리적 혹은 선리적(禪理的) 설명을 잘 해도 설명이 깨달음 자체는 아닌 것이다. 마치 음식 맛을 육미(六味)로 설명을 해도 “달다 쓰다” 하는 것이 맛 자체는 아닌 것처럼.

이 심지법문은 차별의 경계에서 나눠지는 모든 상대적인 것을 불식시킨다고 임제는 말하고 있다. 마치 허공 자체가 어느 특정 소속이나 사방의 방향을 가질 수 없듯이 심지법문은 차별적 명상(名相)에 의해 한정되어지지 않는다고 하였다. 범(凡)·성(聖)·진(眞)·속(俗)에 드나들지만 범·성·진·속이 아니라 한다. 범부라 해도 범부가 아니며 성인이라 해도 성인이 아니다. 진제(眞諦)도 아니고 속제(俗諦)의 경계도 아니라 했다. 사람들은 곧잘 진리(眞理) 혹은 도(道)에 대해 특정 관념을 세우고 이것이 진리고 이것이 도이다, 하는 주장을 내 세우는 경향이 있다. 이른바 분별의식이 일어나면서 객관대상을 개념화시키는 것이다. 그리하여 때로는 어떤 주장을 강력히 내세울 때 그냥 도그마(dogma)를 만들어 버린다. 그렇게 하는 것이 바로 자성을 바로 보지 못한 망상적 분별일 뿐인데도 그러한 언어적 습관이나 관념적인 분별의식을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심지법문에 계합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름도 없고 모양도 없는 것을 이름으로 이해하고 모양으로 이해하는 것이 깨닫지 못한 자들의 잘못된 허물이라고 보는 것이다.

임제는 자신의 설법이 보통 사람들의 설법과 다르다는 것을 말한다. 자신이 하는 말은 개념을 만들어 조립하는 언어가 아니라는 말이다. 말하자면 언어 이전에 직관의 통찰에서 나오는 말이라 할까. 그리하여 그는 척하면 그냥 알아버린다 하였다. ‘눈이 부딪치는 데 도(道)가 있다’는 목격이도존의(目擊而道存矣)라는 공자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는 말이다.

또 심지수행(心地修行)이라 하여 마음에 갖춰진 불성을 계발하는 수행으로 정혜등지(定慧等持)를 닦는 것을 이르는 말도 있다. 〈육조단경〉이나 황벽의 〈전심법요〉에서 심지법문의 요지를 설명하는 대목이 나온다. 단경에서는 계(戒) · 정(定) · 혜(慧)의 삼학(三學)을 심지에 의거하여 설명하고 있고, 법요에서는 말하기를 심지법문에서는 만법이 모두 마음을 의거하여 건립되는 것이라 하였다. 대지(大地)가 일체 종자를 싹 트게 해 자라게 하듯이 심지(心地)에서 모든 수행이 일어나기 때문에 만행(萬行)의 근원을 심지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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