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닦음의 길 3 / 위빠사나 원리·실존적 의미

“눈 오는 날엔 / 사람과 사람끼리 만나는 게 아니라 / 마음과 마음끼리 만난다 / 그래서 눈 오는 날엔 / 사람은 여기 있는데 마음은 딴 데 가 있는 경우가 많다 / 눈 오는 날엔 그래서 / 마음이 아픈 사람이 많다”

눈 내리는 겨울이면 가끔 생각나는 이정하 시인의 〈눈 오는 날〉이라는 제목의 짧은 시다. 눈 내린 어느 날 몸은 여기 있지만, 마음은 다른 곳에 가 있는 아픈 사람들의 심정을 담백하게 그리고 있다. 중생이란 이처럼 몸 따로 마음 따로 놀고 있는 존재가 아닐까 싶다. 경우야 조금 다르지만 싯다르타가 당시 유행하던 선정과 고행을 버린 이유도 수행과 일상, 몸과 마음이 따로 작동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런 자신의 모습을 조금의 왜곡도 없이 ‘있는 그대로’ 보기 시작하였다. 그저 보기만 했을 뿐인데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그토록 원하던 존재의 참 모습을 깨치게 된 것이다.

싯다르타는 위빠사나를 통해 깨침에 이르게 되었다. 이 수행법은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그런데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다.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마음에 아무런 동요가 없어야 한다. 마치 물속에 담긴 수저를 제대로 보려면 물의 움직임이 없어야 하는 것과 같다. 물이 이리저리 흔들리면 수저의 모양이 구불구불하게 보인다. 이처럼 우리의 마음도 평온해야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다. 그래서 산란한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정정(正定)은 위빠사나 수행인 정념(正念)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선정과 지혜를 함께 닦는다는 정혜쌍수(定慧雙修)는 바로 이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위빠사나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보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자신의 몸(身)과 느낌(受), 생각(心), 생각의 대상(法)이다. 이 네 가지 대상을 관찰한다고 해서 위빠사나를 사념처관(四念處觀)이라 부르기도 한다. 먼저 신념처(身念處)는 우리가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 몸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관찰하는 것이다. 예컨대 숨을 들이쉬면 아랫배가 나오고 내쉬면 들어가는 현상에 마음을 집중하는 것이다. 둘째로 수념처(受念處)에서 ‘수(受)’는 느낌을 의미한다. 어떤 대상을 볼 때 받게 되는 좋다거나 싫다는 느낌을 속이지 않고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것이다. 셋째로 심념처(心念處)는 마음 안에서 탐욕이나 성냄 등의 생각들이 순간순간 일어나고 사라지는 과정을 여실히 관찰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법념처(法念處)에서 법은 생각의 대상을 뜻한다. 연기나 삼법인, 사성제 등의 진리를 관찰하는 것이다. 요약하면 관(觀)의 대상은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온갖 현상들이다. 이것들을 있는 그대로 낱낱이 관찰하면 무상과 무아를 깨칠 수 있다는 것이 위빠사나의 원리다.

위빠사나는 실존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것은 곧 현재의 자신을 분석하고 성찰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면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 수 있다. 현재의 내 모습은 과거 오랫동안 몸과 입, 생각으로 행한 업(業)의 결과물이다. 평소 쉽게 화를 낸다거나, 욕을 많이 한다면 그것은 과거로부터 쌓인 좋지 않은 에너지가 작동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런 나쁜 습관을 청산하고 새로운 삶을 창조하기 위해서는 화를 내거나 욕을 하는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관찰하면 멈출 수 있는 힘이 생긴다. 위빠사나는 그런 성찰의 힘을 기르는 수행이다.

싯다르타는 보리수 아래 앉아서 지금까지의 수행을 멈추고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기 시작하였다. 선정을 한다면서 몸 따로 마음 따로 놀고 있는 모습이 보였고 몸을 괴롭히면 마음의 고통이 사라질 것이라는 어리석음 또한 보였다. 그 순간 어리석음이 지혜로, 중생 싯다르타가 붓다로 질적 전환을 이루었다. 우리가 위빠사나에 주목하는 이유다.

원로 불교학자 강건기 교수는 어느 강연 마지막 시간에 “몸 있는 곳에 마음 있게 하라.”는 말을 남겼다. 위빠사나가 싯다르타에게 가져다준 선물은 몸과 마음, 생각과 행동이 하나 되는 붓다의 삶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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