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교하는 마음과 수용하는 마음

8-1 거울은 어느 것도 받아들이면서 또한 어느 것도 붙잡지 않습니다. 우리의 진실한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줍니다. 마음의 거울도 우리의 진실한 모습을 보여 줍니다. 여러분도 자신의 실제 모습을 만나볼 준비가 충분히 되셨지요?(웃음)

에고의 중요한 속성 가운데 하나가 판단 비교하는 기능입니다. 판단을 내리는 기능은 소중하지요. 에고의 기능이 모두 편협하거나 부정적인 것은 아니지만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을 모두 보지 못할 때 그 폐해가 극심하여 고통에 이르므로 어두운 측면을 명료하게 볼 수 있어야겠습니다.

얽매임, 편협·경직 원인
분쟁 격화 원인은 ‘편들기’
모두 수용하는 지혜 필요

8-2 비교하면 어떻게 되나요? 그 중 비교하는 마음은 상대를 능력으로 평가하여 우월하다 열등하다 결론내곤 합니다. 자신에게도 비교의 잣대를 들이대어 열등감으로 지나치게 위축되거나 아니면 우월감으로 지나치게 거들먹거립니다. 특히 우월감은 상대를 경시하고 경청 대신 설교 조언하려들고 지배하려듭니다. 이 때에 상대가 순응하지 않으면 엄청난 불쾌감과 반감으로 증오하게 되지요. 비교하면 불만스럽군요. 비교하여 보다 완벽한 아내, 보다 완벽한 남편, 보다 완벽한 자식, 완벽한 부모를 요구하지만 삶에서 완벽함이 존재하나요? 완벽한 구원, 완벽한 행복 등을 희구하지만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신기루와 같아서 갈증이 채워지지 않습니다. 불만의 그림자들이 우리를 얼마나 불행하게 만드는지요? 비교 평가하여 내린 결론(원칙)에 얽매이고 경직되면 편협하게 되고 충돌하게 됩니다.

8-3 황희 정승의 일화입니다. 하루는 정승이 퇴근하여 집앞에 오니 집안이 시끄럽습니다. 하인들끼리 다투는 고함 소리와 그걸 나무라는 청지기의 호통소리들이 섞여 있습니다. 정승은 자초지종을 묻습니다. A하인이 답합니다. 이러이러해서 자신이 옳다고 합니다. 정승은 “그래 네 말이 옳다.” 그러자 B하인이 그게 아니라 자신이 옳은 이유를 주절댑니다. 그러자 정승은 “그렇구나. 네 말도 옳다.” 옆에서 나무라고 호통치던 C청지기가 정승에게 항의 합니다. “대감 마님, 둘 가운데 하나는 옳고 하나는 그릇된 것인데 둘 다 옳다하심은 부당합니다.” 그 말을 들은 정승은 불쾌해 하지 않고 “네 말도 옳구나.”라고 답합니다.

멋진 판결을 기대하던 사람들은 모두 침묵하게 됩니다. 각자의 부족함을 돌아보게 되었지요. 편들기는 분쟁을 악화시킬 수 있어서 위험합니다. 어느 한 쪽이 옳다고 평가하지 않고 모두를 수용하는 지혜가 놀랍습니다.

ABC는 우리의 내면에 있는 자화상들입니다. 서로 갈등하는 자아와 이를 중재 또는 심판하는 자아, 그리고 정승은 이 모든 것들에 속하지 않고 배경에서 바라보고 지켜보는 순수한 자기입니다. 모든 걸 허용하면서도 그 어느 것에도 속하지 않습니다. 이런 편견 없는 바라봄이 진정한 이해를 낳는 묘약입니다. 수용성, 포용성, 전체를 아우르는 넓은 시각, 모든 이를 배려하는 인자한 마음. 자존감의 날세움과는 다른 차원이군요. 같은 마음을 쓰는데 어떻게 이리 달라질 수 있을까요? 의식의 층위가 다양하다는 걸 말해줍니다.

8-4 누구나 정승의 의식 수준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정승의 마음은 포용 및 통합이군요. 이게 가능하려면 무엇이 전제되어야 하나요?

그렇습니다. 경청입니다. 모두의 이야기를 편견 없이 자기 신념 개입 없이 있는 그대로 들어주는 자세. 경청입니다. 경청은 공감이요 수용이요 상대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이고 포용하는 것입니다. 주의깊게 들어주는 자체로 상대방은 인정받는 느낌으로 우호감, 친근감, 존중감, 사랑의 마음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렇게 갈등과 분쟁의 상황에서 경청과 공감은 관계의 뒤틀림을 바로 잡고 삶 전체를 치유시킵니다. 경청이 있으면 바른 이해와 공감이 뒤따르는군요.

8-5 상대방의 마음을 이해하려면 잘보고 잘 들어야 합니다. 잘 보고 듣는다는 것은 그 사람 마음 그대로를 이해한다는 것인데 자신의 가치관이나 선입견으로 굴절시키지 않음을 말합니다. 상담가의 첫번째 조건인 중립성이지요. 종교나 사상, 신념으로 무장된 상태에서는 있는 그대로 볼 수 없습니다. 특히 자신의 경험에 얽매어 있는 상태에서, 치유되지 않은 상처를 안고 있는 사람이 타인을 치유한다는 것은 기만일 수 있겠군요. 자신의 상처로 굴절된 시각이나 종교 등의 주입된 신념으로 단정하거나 가르치는 것은 온전한 치유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고 물들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상태를 중립성이라 하고 평정하고 평등한 마음이라 하지요.

8-6 바른 이해는 자신의 신념이나 경험을 내세우지 않고 굴절 없이 보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합니다. 겉으로 보는 현상과 내면에 잠재한 뿌리는 다르기 때문이지요. 흙 밖으로는 고구마 꽃이 피었는데 흙속을 캐보면 고구마 줄기가 넝쿨넝쿨 줄줄이 나오는 것처럼. 양파도 한 덩이로 보였는데 껍질을 까보면 또 껍질이 나오는 것처럼. 속마음까지 보아야 상처를 치유할 수 있습니다. 상대방의 말을 새겨 듣지 않고 상대방의 마음을 이해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자기 말만 하고서 대화를 나눴다고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상대의 말은 반도 듣지 않고 허리를 끊은 후 자기 생각만 자기 입장만 옳다고 우기지 않나요? 이렇게 되면 상대가 승복할 리가 없고 평행선의 다툼이 되지요. 모든 다툼에는 이렇게 자기중심적인 이기주의가 도사리고 있군요. ‘자신만을 인정해 달라.’ ‘내가 옳고 너는 그르니 네가 고쳐라.’ 그래서 다툼은 평행선을 긋습니다.

8-7 올바르게 본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요? 겉만 보고 판단해버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요? 부분만 보면 옳은데 전체에서 보면 틀리는 경우가 많지 않나요? 작은 것은 얻고 큰 것을 놓친다면 얼마나 한스러운가요? 상대의 귀하고 훌륭한 부분이 조그만 시비 분별에 의해 모두 부정되어버리지 않나요?

현재 보이는 모습을 깊이 본다는 것은 그 형성 과정, 즉 역사를 본다는 것이고 이는 과거와 연결된 맥락을 본다는 것입니다. 과거의 경험이 현재를 형성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과거를 잘 음미해보아야 합니다. 과거 환원주의라 비판하는 가벼움은 현재의 생각이나 신념이 쉽게 바뀔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과거의 경험은 기억과 생각(인지)만으로 구성된 결합물이 아닙니다. 가장 핵심에는 감정이 응축되어 있고 이 감정이 풀려나야 비로소 자유로워집니다. 이 감정의 족쇄로부터 풀려나기 전에는 마음의 상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이 족쇄에서 풀려날 때 해방감과 함께 행동이 바뀌고 삶의 양식이 바뀌게 되지요. 문제되는 행동패턴을 반복했던 악순환에서 벗어나 관점이 바뀌고 생각하는 틀도 비로소 바뀌게 됩니다. 그래서 과거의 잘못에 대한 조사와 탐구는 과거 환원이 결코 아닙니다. 미래의 발전과 성장을 위해 필수적인 과정인 것이지요. 기억 속에 꼭꼭 묻어두었던 상처를 헤집어서 무엇 하느냐고들 하지만 수술이 필요할 때는 개복 수술을 해야 합니다. 상처가 곪아 있는데 그것을 덮어버린다면 더 큰 병으로 발전하기 때문입니다. 과거를 용서하기 어렵지만 잘못을 확실하게 알고 뉘우친다면 용서 못할 과오도 없습니다. 살인귀 앙굴리말라가 아라한이 되지 않았나요?

8-8 삶 속에서 관계가 틀어지고 끊어지는 경우를 돌아보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혼자만의 공간을 확보하고 충분한 시간 경험해봅니다.) 눈을 감고 호흡을 바라보고 내쉬는 숨에 이완하면서 들뜬 마음을 가라앉힌 후 관계가 멀어지거나 틀어진 경우를 돌아보세요. 호흡과 함께 아픈 기억을 떠올려보세요. 창피스럽고 모욕 받고 배신감으로 분노했던 기억들 속에서 올라오는 이야기들을 충분히 들어주세요. 충분히 표현하도록 허용하세요. 감정도 억누르지 말고 허용합니다. 그 장면에서 무엇이 일어났는지 돌아봅니다. 먼저 상대의 말과 행동에서 상처 받았는지를 봅니다. 기억할수록 괘씸하고 분하고 억울하고 속상한 마음을 충분히 안아줍니다. 이제는 상대가 나를 어떻게 보았을지 바라봅니다. 상대도 나와 똑같은 사람이고 똑같이 속상하고 억울하고 아팠을 것을 느껴봅니다. 나의 언행에 얼마나 아팠을까요? 마음은 내 마음 다르고 네 마음 다르지 않습니다. 동일한 마음입니다. 마음을 쓰는 것이 다를 뿐이지 않나요? 우리는 모두 행복하고 싶은 점에서 평등한 존재입니다.

8-9 숙고명상과 심리치료는 모두 현재에 작용하고 있고 미래에도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어린 시절의 상처를 보살피는 것입니다. 어려서 충분히 사랑받지 못했는지, 충분히 화내보지 못했는지, 충분히 요구를 해보지 못했는지, 충분히 슬퍼해보지 못했는지 두루 살펴보고 어루만져주고 보듬어 주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흔히 쓰이는 기법이 상상력이 기초가 된 연상입니다. 마음속 깊은 곳에 간직된 내용들이 떠오르게 하는 연상 기법은 심리치료의 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설득이 나 행동의 수정, 인지 치료에는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지만 무의식을 다루는 분석적 심리치료에는 필수적입니다. 무엇이 떠오르는지, 어떤 생각이, 어떤 기억이, 어떤 기분이 드는지 물어보는 것. 적절한 상황에서 적절한 공감적 질문은 연상을 촉진시킵니다. 주입식 교육이나 설교는 연상을 억압합니다. 강의나 책을 통한 정보만으로는 마음이 치유가 되지 않은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연상을 자유롭게 허용하는 것은 내담자의 자발성을 성장시키고 자기 치유력을 높이는 데에도 기여합니다. 마침내 지금껏 자각하지 못한 해묵은 자신의 문제를 깨닫게 되는 통찰의 단초가 되지요.

8-10 비교하여 평가하고 결론 내리려는 마음을 바라보고 자각한다면 비로소 비교를 중지하고 온전히 전체를 관조하는 정승이 되는군요. 이렇게 바라보고 살펴보는 가운데 의식이 확장됩니다. 의식의 성장과 성숙은 우리가 죽을 때까지 익혀야 할 과제입니다. 보다 높은 의식을 추구하는 자기실현의 욕구는 탐욕과는 궤를 달리 합니다. 탐욕은 발전이 없고 퇴행하지만 자기실현은 이기적 욕망에서 이타적 헌신으로 발전합니다. 나만의 이익에서 사회적 공헌으로 행동 범위가 확장되는 것이지요. 중생심에서 벗어나 보살의 삶을 살게 됩니다. 정승의 마음을 깨워내서 정승으로 살아야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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